[리뷰] 극작가 김영무가 파헤친 현대 비극 '장씨 일가'
[리뷰] 극작가 김영무가 파헤친 현대 비극 '장씨 일가'
  •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승인 2018.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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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제3회 늘푸른연극제' 참가작 '장씨 일가'...조미료 없이 연극의 진정성 살려내
커튼콜에서 무대에 나와 인사하는 김영무 작가(오른쪽에서 두번째)
연극 '장씨 일가' 커튼콜에서 무대에 나와 인사하는 김영무 작가(오른쪽에서 두번째)와 원숙한 연기를 보인 세 배우 양재성, 정욱, 박승태(왼쪽 부터)/사진=정중헌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제3회 늘푸른연극제에 선정된 김영무 작가의 '장씨 일가'(8월 24~9월 2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는 50대 이하의 관객들에게는 좀 황당하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작가와 동시대를 산 필자에게는 "이런 작품이 진정한 연극이 아닐까"하는 사실주의 연극에 대한 향수와 함께 작가의 주제 의식에 공감이 갔다.

통계가 반증하듯 현대 사회의 가장 예민한 화두는 '가족'이고 구체적으로는 가족의 해체와 붕괴, 이에 따르는 범죄와 후유증들이다.

김영무 작가는 그 같은 현상을 ’현대 비극’으로 그려내고자 했다. 작가는 기원전 5세기 희랍 비극과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모티브로 삼아 최근 사회문제로 대두된 존속 살인의 비극을 '장씨 일가'라는 희곡으로 형상화 해냈다.

연극 '장씨 일가'가 공연된 아르코소극장에서 배우 권병길, 필자, 작가 김영무, 연출 김아라(왼쪽부터)가 함께 했다/
연극 '장씨 일가'가 공연된 아르코소극장에서 배우 권병길, 필자, 작가 김영무, 연출 김아라(왼쪽부터)가 함께 했다.

필자는 김영무 작가를 안지가 4~5년 밖에 안 된다. 솔직히 그의 희곡 40여 편이 무대에 올려졌지만 관극한 작품은 손꼽을 정도다.

그런데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지 50년, 현대 사회를 보는 그의 작가의식은 예리했다. 그는 "전통적인 가치관이 해체되고, 그에 대신할 수 없는 어떤 가치관이 형성되지 못한 탓에 이 시대가 일종의 동공화 상태에 머물고 있다"며 "사람들이 가치관의 기준도 상실했고, 편안히 안주할 수 있는 어떤 신념조차 지닐 수 없다는 상실이야말로 지금 우리사회가 당면한 비극적 상황"이라고 했다.

그가 무대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장씨 일가'는 속된 말로 콩가루 집안이다.

양재성이 맡은 주인공 대학교수 장재성은 제자였던 술집 호스테스(임성언)를 집안에 끌어 들여 동숙하고, 위자료 없는 이혼 없다는 아내(권남희)는 하나님만 외치는 광신도다.

가부장적 권위에 젖어 있는 아버지 장주호(정욱)는 아들을 어려서부터 주눅 들게 했고, 그 서슬에 기를 못 펴고 살아온 어머니(박승태)는 나무관세음보살에 의지해 살고 있다.

큰딸(장일희)은 남편과 자식을 내팽개친 자유인이고, 둘째 딸(이샛별)은 술집에 나가고, 4대독자 장수남(김늘메)은 가수 지망생이다.

연극 '장씨 일가' 공연 장면/사진=한국연극협회
연극 '장씨 일가' 공연 장면/사진=한국연극협회

이런 콩가루 집안에서 사면초가인 장 교수는 제자와의 일탈로 자신의 인생을 찾으려 하지만 이미 마약류의 약물 중독으로 무너져 버린다. 환각에 빠진 그는 햄릿의 망령이 되어 자신을 옥죈 아버지를 찌른다.

70대 후반의 김영무 작가는 한 가족의 붕괴를 비극으로 몰아가면서도 현대적인 은유와 유머를 상황과 대사로 살려내 심각함 속에서도 재미를 잃지 않았다.

이 작품의 미덕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복고적인 리얼리즘이다. 1970년대 중반까지도 우리 연극은 봄가을 시즌에 몇 작품을 명동 국립극장에 올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연극의 형식도 집안 내부를 그대로 보여주는 사실적인 무대세트에 신파조가 채 가시지 않은 화술의 사실주의 연기가 주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느린 템포의 사실주의 연기는 빠른 템포의 퓨전 연기에 밀려나 박제된 상태였다.

그런데 1969년 이진순 연출의 '죽은 나무 꽃피우기'(조성현 작, 극단 광장) 같은 작품의 아우라를 반세기가 흐른 2018년 송훈상 연출이 되살린 것이다.

조금 답답하지만 그 안에 우리의 정서와 우리 언어의 맛을 담아낸 진지한 이런 형식은 중장년 관객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키지만 그 때를 경험하지 않은 세대에게는 느리고 신파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장춘재 역을 맡은 양재성은 복고풍 리얼리즘의 전형적인 연기를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초반에는 과장된 표정과 커다란 몸짓으로 부조화를 보였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같은 연기가 진실성을 수반하면서 설득력을 가지더니 극적인 클라이맥스로 관객에게 비극의 요체인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었다.

젊은 시절 '철부지들', '사운드 오브 뮤직', '햄릿' 등을 통해 아이돌 버금가는 인기를 얻었고 중장년기에는 악극을 많이 했던 양재성 배우는 가족의 붕괴 속에 파멸로 치닫는 한 지식인의 캐릭터를 저음의 진정성 있는 연기로 살려냈다.

연극 '장씨 일가'의 공연 장면/사진=한국연극협회

여기에 80대의 노배우 정욱과 연기파 박승태가 노부부로 호흡을 맞춰 원숙하고 노련한 앙상블로 극의 중심을 받쳐주었다.

교수의 젊은 애인 마은지 역을 맡은 임성언이 조금 부족하지만 자기 몫을 잘 소화해냈고, 광신도 역 권남희와 변호사 역 유민석, 큰딸 역 장일희, 둘째딸 이샛별, 아들 역 김늘메도 극 속에서 각각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대학로 연극동네에서 묵묵하게 작업을 해온 송훈상은 '장씨 일가'에서 리얼리즘 연극의 전통을 차분하게 되살리는 연출력으로 연극의 묘미가 무엇인지를 관객에게 보여주었다.

극작가 김영무가 파헤친 현대 비극 장씨 일가 김영무작가
연극 '장씨 일가'의 김영무 작가/사진=정중헌

김영무의 극작술을 돋보이게 한 이 느릿한 사실주의 연극이 젊은 층에게는 감각에 맞지 않았을지 모르나 요즘 말로 조미료를 전혀 치지 않고도 연극의 깊은 맛을 살려냈다는데 이 작품의 진가가 있다. 특히 일상에 지친 캐릭터를 허우적 대는 제스처와 잿빛 톤의 목소리로 구축해 가며 극적인 반전을 이루는 양재성의 때묻지 않은 순수 연기에 박수를 보낸다.

한 가지 연출과 주연배우에게 욕심을 낸다면 교수 장춘재가 환각상태에서 햄릿이 되어 아버지를 찌르는 장면이 더욱 드라마틱하고 절절했으면 하는 것이었다. 다른 배우들 또한 조명이 없는 곳에서도 연기를 해주어야 이 장면이 절정을 이루는데 몇몇 배우들이 구경 모드로 있어 좀 아쉬웠다.

2층 구조의 무대 세트(민병구)가 처음에는 허술한 듯 보였으나 1층과 2층의 유기적 연계로 교감을 살려냈고, 잘려나간 철골 구조와 벽체가 가족의 붕괴를 상징하는 의미로도 다가왔다. 음악(강석훈)과 분장(박팔영)이 상실의 색채를 담백하게 전해주는 역할을 했다.

작가의 '장씨 일가'는 늘푸른연극제에서 드물게 보는 창작극이자 우리가 처한 현실을 잘 반영했다는 점에서 재미 그 이상의 의미를 읽을 수 있었다.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현재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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