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 작가가 변주한 현대판 ‘고도를 기다리며’…낭독극 ‘고도의 투두 리스트’ [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18세 작가가 변주한 현대판 ‘고도를 기다리며’…낭독극 ‘고도의 투두 리스트’ [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승인 2026.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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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은 기획, 강훈구 연출로 링크 더 스페이스서 낭독공연
- ‘할 일 목록’에 중독된 현대인의 일상 풍자한 희극
낭독극 ‘고도의 투두 리스트’의 무대.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나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당신은 의지대로 살고 있나요?”

사무엘 베케트의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현대적으로 변주한 창작극 ‘고도의 투두 리스트’ 낭독공연을 3월 1일 대학로에 새로 개관한 링크 더 스페이스 2관에서 젊은 관객들과 함께 관람했다.

지난 50여 년 많은 연극을 보고 리뷰하면서 연극에 대한 이해가 조금은 있다고 자부했는데 변화는 빨랐고, 이 작품은 내용도 형식도 공연장도 모든 게 낯설었다.

우선 국내 초연이고 러닝타임도 40분이 좀 넘는 이 단막 공연을 보게 된 계기부터 남달랐다.

‘고도의 투두 리스트’ 포스터에 보면 작가 레오 심페-아산테, 연출 강훈구, 번역 유재민, 프로듀서 정재은으로 되어있다.

정재은은 필자의 딸이다. 한예종 연극원을 나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극장에서 일하다 4년 전 영국으로 유학 갔다가 직장을 그만두고 현재 가족과 함께 런던에 거주하며 공연 관련 일을 하고 있다. 지난해 5월 창작 희곡 ‘모래탑’을 송미숙 연출로 서울 창조소극장에서 낭독공연 하기도 했다.

낭독극 ‘고도의 투두 리스트’ 포스터

이번 낭독극 ‘고도의 투두 리스트’는 2025년 7월 영국 런던의 로열 코트에서 개최된 제1회 ‘젊은 극작가상’ 공모에서 선정된 6편 중 한 편으로, 작가는 18세의 레오 심페-아산테다.

이 작품의 낭독공연을 관람한 정재은 프로듀서가 “희곡의 발상이 너무 기발하고 신선해” 작가를 직접 만나고 여러 차례 협의 끝에 한국 공연의 판권을 확보했다.

하지만 국내 공연은 여의치 않아 몇 차례 우여곡절을 겪었다.

다행히 네버엔딩플레이가 제작을 맡아 대학로 아르코극장 뒤편에 새로 개관한 링크 더 스페이스 2관에서 ‘NEP 낭독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3월 1일과 2일 3회 공연을 갖게 되었다.

연출 및 출연진도 젊은 실력파들로 짰다.

최근 명동예술극장에서 국립극단의 ‘이상한 어린이 연극 오감도’를 공연한 강훈구 연출에 ‘렛미인’, ‘에쿠우스’ 등에 출연했던 안승균, ‘튀바스 가문의 자살가게’의 변서율 배우가 호흡을 맞췄다.

이 작품이 왜 기발하고 신선한가?

18세 작가가 노벨상 수상 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명작 ‘고도를 기다리며’를 요즘 현대인 버전으로 패러디했기 때문이다. 베케트는 ‘고도...’에서 막연히 누군가를 기다리지만, 이 작가는 오늘 해야 할 일들(TODO LIST)을 붙잡고 사는 현대인의 모습에서 막연한 기대와 불안, 기술의 발달로 삶의 여유를 가지기는 커녕 쫓기고 구속당하는 행동들을 유머러스하게 풀어내고 있다.

영국 런던에서는 어떤 형식으로 공연되었는지 궁금하다.

서울 공연에서 30대 젊은 감각의 강훈구 연출은 넓은 공간에 나무 의자 하나와 화분 한 개만 있는 심플한 무대를 선보였다.

공연이 시작되면 대본을 들고나온 남자(안승균 배우)가 마임을 하다가 삐익~ 하는 음향에 놀라 대사가 프린트된 용지를 흩뿌린다. 무언가를 하려고 하거나 약속 장소에 가려 해도 기계(극장에서는 무대에 설치된 스피커, 핸드폰이 될 수도 있고...)에서 끊임없이 해야 할 일들을 (보이지 않는 장막 뒤에서) 여자가 지시하고 확인했다. 남자가 뿌려진 종이를 집어 들고 1인극처럼 40여 분간 연기하는 공연은 간혹 날카로운 경적과 강렬한 조명으로 충격을 주면서 해야 할 일 속에서 허덕이는 남자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주었다.

베케트의 ‘고도...’가 부조리극이라면 레오의 ‘고도의 투두 리스트’ 역시 부조리극 계열이지만 희극 또는 코미디 성향이 더 강한 점이 특색이다.

그런데 임영웅 연출의 ‘고도를 기다리며’ 초연이 다소 심각했다는 것처럼 안승균 배우의 ‘고도의 투두 리스트’ 초연도 웃음이 자주 터지지는 않았다. 관객 입장에서도 사전 이해가 없어 웃어야 할지 어떨지 솔직히 판단이 서지 않았다.

‘고도를 기다리며’처럼 회를 거듭하며 연출과 배우들의 연기가 익숙해지고 관객과 호흡을 맞춰나가면 웃음이 터지리라고 본다.

그럼에도 관객들의 반응은 예민했다. 시니어인 필자는 즉각 반응을 못해 별 재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젊은 관객들은 “낭독공연이 아니라 어드벤처 스릴러 같았다”, “AI시대에 자율성이 박탈되는 느낌을 받았다”는 등 다양한 소감을 피력했다.

함께 본 아내는 공연 전문가가 아닌데도 “세상사 뜻한 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뭔가에 구속당하고 뭔가에 쫓기는 우리네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고 했다.

낭독극 ‘고도의 투두 리스트’의 무대.

임영웅 연출의 대표작이기도 한 ‘고도...’는 2차 대전 후 삭막해진 대중들에게 어떤 구원, 탈출구 같은 것을 기대하게 했다.

그런데 이 18세 작가의 ‘고도의...’는 끊임없이 할 일을 목록(리스트)으로 만들어 제시하고 있다.

“운동 시작하기” “오늘은 꼭 연락하기”

막연한 기다림보다 해야 할 일 리스트를 쉼 없이 나열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을 더 피곤하게 만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할 일만 정리하고 있다가 인생을 허비하는 것은 아닐까? 목록만 늘어가고 실천은 미뤄지기만 하는 것은 아닐까.

18세 작가를 등단시킨 것도 신기한데 이런 통찰까지 하며 관객을 웃기고 인생을 풍자한 작품을 올리는 런던의 공연 시스템이 부러울 따름이다.

이 작가를 선정한 런던의 로열코트는 이 작품을 올해 낭독이 아닌 본공연으로 올린다고 밝혔다.

새 공연장에서 낭독 페스티벌을 여는 것도 참신한 기획이고, 해외 신작을 국내 작가 작품과 함께 공연하는 것도 관객에게는 바람직한 일이다.

이제 공연장도 개성을 살려 30~40분 단막도 고품질로 공연하면 젊은 관객의 호응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그 가능성을 보여준 강훈구 연출의 무대는 기존과 달랐다. 말장난, 상황 반복, 엇박자 대사 등은 베케트의 ‘고도...’와 유사하지만 리듬이나 표현 방식은 빠르고 상황극에 가까웠다. 그것을 안승균 변서율 배우가 해낸 것이다.

새로 개관한 링크 더 스페이스 2관(객석은 다소 불편했다)은 공연 막바지에 무대 뒤쪽 벽의 커튼을 열어 창문으로 바깥세상을 보여주었다. 막혔던 가슴이 펑 뚫리는 상쾌함을 맛보았다.

‘고도의 투두 리스트’는 뭔가 새로운 것을 원하는 관객들의 욕구에 접근했을 뿐 아니라 새로운 공연 형태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컸다.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극단생활 대표.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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