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하영 365칼럼] ‘음악’을 통해 꿈꾸는 ‘더 나은 세상’...뮤지컬 ‘레미제라블’
[주하영 365칼럼] ‘음악’을 통해 꿈꾸는 ‘더 나은 세상’...뮤지컬 ‘레미제라블’
  • 주하영
  • 승인 2024.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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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문화로 보는 세상풍경]
- 37년간 53개국에서 1억 3천만 명 관람
- 세계에서 가장 오래 공연되고 있는 뮤지컬
- 한국 라이선스 10주년 기념 공연
뮤지컬 '레미제라블' 공연 장면. 영국의 역사가 로버트 톰즈에 따르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만큼 "바리케이드에 주도적인 역할을 부여해 현실을 신화로 대체"한 문학작품은 없다./사진= 레미제라블코리아
뮤지컬 '레미제라블' 공연 장면. 영국의 역사가 로버트 톰즈에 따르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만큼 "바리케이드에 주도적인 역할을 부여해 현실을 신화로 대체"한 문학작품은 없다./사진= 레미제라블코리아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위대한 모든 것들이 훌륭함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니다. 기대와 희망, 호기심으로 시작된 여행이 반드시 장관의 감동을 가져다주지는 않는 것처럼, 예술 작품 또한 나름 출발의 이유가 있지만 모두 사랑받는 성공의 결과를 낳지는 못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지속적으로 찾는 작품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게 마련이고, 그 매력이 오랫동안 지속될수록 우리는 그 예술 작품이 가진 위로와 안식, 인류를 하나로 만드는 통합의 ‘힘’을 인식하게 된다.

1985년 런던의 바비칸 센터에서 개막한 영국 제작자 카메론 매킨토시의 대표적인 뮤지컬 ‘레미제라블’ 역시 처음부터 성공을 확신한 것은 아니었다.

매킨토시는 1987년 ‘플레이 빌’과의 인터뷰에서, 초연 당시 “8주 공연을 진행하는데 30만 파운드(약 45만 달러) 가량의 재정적 손실을 감수”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불안과 초조에도 불구하고 모험을 감행했음을 회고한다.

뮤지컬 '레미제라블' 공연 장면. 굶주리는 조카를 위해 빵을 훔친 죄로 감옥에 갇히고, 탈옥 시도로 인해 형이 늘어나 19년이라는 세월을 보낸 장발장은 세상을 원망한다./사진= 레미제라블코리아
뮤지컬 '레미제라블' 공연 장면. 굶주리는 조카를 위해 빵을 훔친 죄로 감옥에 갇히고, 탈옥 시도로 인해 형이 늘어나 19년이라는 세월을 보낸 장발장은 세상을 원망한다./사진= 레미제라블코리아

10월 8일, 첫 선을 보인 뮤지컬 ‘레미제라블’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고, 혹평은 가혹했다. ‘옵저버’의 마이클 래트클리프는 “무분별하게 합성된 엔터테인먼트”라고 평가했고, ‘선데이 텔레그래프’의 프랜시스 킹은 “기구한 삶을 그린 빅토리아 시대 멜로드라마”라고 분석했다.

‘데일리 메일’의 잭 팅커는 “음악의 장대함과 작품 제작의 용감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시트콤으로 전락”해 버린 데 대한 안타까움을 표명했고, 평론가 린 가드너 역시 “감상적인 낡은 쓰레기”가 되었음을 지적하며, “미국 TV 미니시리즈를 만드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지만 비평가들의 부정적인 평가와는 달리 티켓은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고, 개막 열흘 만에 매진 열풍이 시작된 ‘레미제라블’은 바비칸 센터에서 12월까지 예정된 2개월간의 공연을 모두 전석 매진시켰다.

2010년 런던 O2 아레나에서 선보인 ‘레미제라블’ 25주년 콘서트를 연출한 로렌스 코너는 인터뷰에서, 처음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초연했을 때는 5년을 버티기도 힘들 것이라고 예측했다는 매킨토시의 말을 전했다.

그러나 관객들의 사랑은 끊임없이 지속되었고, 2022년을 기준으로 37년간 53개국에서 22개의 언어로 공연되며, 1억 3천만 명이 관람한 것으로 집계된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공연되고 있는 뮤지컬”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지금도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다.

뮤지컬 '레미제라블' 한국 라이선스 10주년 기념 공연 포스터 컷. 37년간 53개국 22개 언어로 공연되며, 1억 3천만 명이 관람한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한국에서 2013 초연, 2015 재연을 거쳐 8년 만에 삼연을 선보이고 있다./사진= 레미제라블코리아

현재 대구 계명아트센터에서는 2013년 한국 라이선스 초연 이후 10주년을 기념하는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대구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2015년 재공연에 이어 8년 만에 삼연으로 찾아온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한국 10주년 기념 공연은 2023년 10월부터 부산, 서울, 대구의 3개 도시에서 순차적으로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매킨토시는 프로그램북에서, 2024년으로 런던에서 39년째를 맞이하는 뮤지컬 ‘레미제라블’이 9월부터 ‘레미제라블: 아레나 스펙타큘러(The Arena Spectacular)’의 첫 번째 월드 투어를 시작하게 되었음을 밝혔다.

그는 뮤지컬 ‘레미제라블’이 오늘날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위고의 원작 속 인물들이 가진 보편성 때문임을 강조하며, “세상 어디에서나 억압에 맞서 일어서고, 자신들의 신념을 위해 기꺼이 싸우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음”을 덧붙였다.

그는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곡들이 “혁명을 위한 실제 우리 삶의 노래”로서 세계 곳곳에서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불꽃을 일으키고 있음을 지적하며, ‘레미제라블’이 담고 있는 꺼지지 않는 영혼의 불씨가 모두에게 반향을 일으켜 함께 지속되기를 희망했다.

뮤지컬 '레미제라블' 공연 장면. 카메론 매킨토시는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곡들이 "혁명을 위한 실제 우리 삶의 노래"로 세계 곳곳에서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고 말한다./사진= 레미제라블코리아
뮤지컬 '레미제라블' 공연 장면. 카메론 매킨토시는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곡들이 "혁명을 위한 실제 우리 삶의 노래"로 세계 곳곳에서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고 말한다./사진= 레미제라블코리아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음악’이 품고 있는 감동과 웅장함, 반복되는 선율로 각인되고 끝없이 흥얼거리게 만드는 곡(넘버)들의 놀라운 ‘매력’이 성공의 출발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80년 프랑스 파리에서 초연되기 전, 콘셉트 앨범으로 미리 발매되어 26만 장이 판매된 알랭 부블리 작사, 클로드 미셸 숀버그 작곡의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9월에 개막해 3개월간 공연됐다.

3년 후, 연출가 피터 파라고는 T. S. 엘리엇의 시집을 뮤지컬 ‘캣츠(Cats)’로 탄생시켜 흥행에 성공한 사람이라면 분명히 도전하고 싶을 것이라면서, 매킨토시에게 콘셉트 앨범을 들어볼 것을 제안했다. 프랑스어로 된 가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한순간에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음악은 영어로 된 버전을 계획하도록 만들었다.

매킨토시는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뮤지컬이 파리에서 제작됐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지만,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 뮤지컬이 “불가능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뮤지컬 '레미제라블' 공연 장면. 1막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One Day More'는 "뮤지컬 역사상 가장 장엄한 엔딩을 장식하는 곡"으로 불린다./사진= 레미제라블코리아
뮤지컬 '레미제라블' 공연 장면. 1막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원 데이 모어(One Day More)'는 "뮤지컬 역사상 가장 장엄한 엔딩을 장식하는 곡"으로 불린다./사진= 레미제라블코리아

오페라로 프랑스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19세기 작곡가 자크 오펜바흐와, 1956년에 프랑스 뮤지컬을 창작하려는 의지를 담아 초연한 ‘당신에게 오늘 밤을(Irma La Douce)’ 외에는, 눈에 띄는 작품이 없다고 여겼던 매킨토시는, 일주일이 지난 후에야 파라고가 소개한 앨범을 들었다.

음악을 듣기 시작한 매킨토시는 마지막 곡이 끝나자마자 뮤지컬 '마이 페어 레이디'를 작업한 대본가이자 작사가인 앨런 제이 레너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날 저녁 레너는 매킨토시에게 “주목할 만한 놀라운 작품”이라는 찬사를 전달했다.

매킨토시는 ‘캣츠’의 넘버 ‘메모리(Memory)’의 작사가이자 연출가인 트레버 넌이 연출로 적합할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당시 넌은 디킨스의 1839년 소설을 원작으로 한 데이비드 에드거 각색의 연극 '니콜라스 니클비'로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부블리와 숀버그의 프랑스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시작은 197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런던에서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 ‘올리버!’를 관람하게 된 부블리는 곧바로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떠올렸다.

1,500페이지에 달하는 위고의 고전을 ‘과연 뮤지컬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은 숀버그에게 전달되었고, 작곡과 대본 작업이 시작되었다.

뮤지컬 '레미제라블' 공연 장면. 1832년 파리 ABC 카페에서는 앙졸라와 마리우스를 비롯한 청년들이 혁명을 준비하기 위해 모여있다./사진= 레미제라블코리아
뮤지컬 '레미제라블' 공연 장면. 1832년 파리 ABC 카페에서는 앙졸라와 마리우스를 비롯한 청년들이 혁명을 준비하기 위해 모여있다./사진= 레미제라블코리아

부블리가 뮤지컬 ‘올리버!’에 등장한 소매치기 소년 ‘도저(Dodger)’를 보면서 1832년 6월 항쟁에서 죽음에 이른 ‘레미제라블’ 속 길거리 소년 ‘가브로쉬(Gavroche)’를 떠올렸고, 장발장과 자베르, 판틴, 코제트, 마리우스 등 모든 인물이 무대 위에 오른 듯 상상했다는 점은 매킨토시에게 운명으로 느껴졌다. 1977년 매킨토시가 런던에서 재공연을 올린 뮤지컬 ‘올리버!’가 영감의 시작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점은 위고와 디킨스는 자주 비교되는 프랑스와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이라는 사실이다. 영국의 역사가 로버트 톰즈는 “눈물의 제왕”이라는 점에서 위고와 디킨스는 동시대의 작가로서 “동등한 감성의 소유자”임을 지적하는데, 위고를 영국의 소설가 디킨스와 시인 테니슨, 역사가 칼라일을 합쳐놓은 인물로 비유한다.

영문판 ‘레미제라블’의 편집자인 프레데릭 미논 쿠퍼 또한 위고가 독자들의 “동정과 연민을 발휘시키기를 원한다”는 측면에서 디킨스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으며, “가난한 사람들이 사회에 의해 잔혹하게 다뤄지고 있음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를 연상케 함을 지적한다.

뮤지컬 '레미제라블' 공연 장면. 1823년, 몽트레이유-쉬르-메르에는 여전히 굶주림과 비참함에 시달리며, 타락과 범죄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불행을 토로한다./사진= 레미제라블코리아
뮤지컬 '레미제라블' 공연 장면. 1823년, 몽트레이유-쉬르-메르에는 여전히 굶주림과 비참함에 시달리며, 타락과 범죄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불행을 토로한다./사진= 레미제라블코리아

1862년에 발표된 소설 ‘레미제라블’은 이미 성공한 시인이자 극작가, 소설가였던 위고가 1839년부터 집필할 생각을 품었던 작품이다.

원래 ‘장발장’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던 소설은 1848년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로 변경되는데, “하층민, 비참하게 가난한 사람들,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들”을 모두 지칭하는 단어가 소설의 중심 주제와 프랑스의 정치적, 사회적 이슈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난과 범죄, 도덕적 타락이 한데 묶여 ‘비참함’ 속에 갇히게 되는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그런 운명에 빠져드는 것이며, 누구의 잘못인가에 대한 질문은 몰락과 구원, 사랑과 재생, 희생과 정의, 법과 체제를 탐구하는 이야기로 구현된다.

위고의 ‘레미제라블’에는 1829년 빵 한 덩어리를 훔친 죄로 경찰관에게 끌려가는 한 남자를 본 일부터 시작해 당대의 사회 안에서 일어났던 일들과, 그가 삶에서 실제로 행한 일들, 민중 해방과 공화국에 대한 그의 정치적 생각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뮤지컬 '레미제라블' 공연 장면. '자베르(카이)'는 법적 정의를 실행하는 자로서의 신념과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장발장(민우혁)'을 향한 도덕적 행위 사이에서 갈등한다./사진= 레미제라블코리아
뮤지컬 '레미제라블' 공연 장면. '자베르(카이)'는 법적 정의를 실행하는 자로서의 신념과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장발장(민우혁)'을 향한 도덕적 행위 사이에서 갈등한다./사진= 레미제라블코리아

위고는 1860년에 13년 전에 이미 다 써놓았던 소설 원고를 꺼내 읽고, 60퍼센트가량 내용을 더 확장해 완성하는데, 새로운 시각을 덧붙여 통일성을 이루는 데 7개월이 걸렸음을 토로한다.

이토록 오랜 시간에 걸친 사회와 인간, 역사, 운명에 대한 관찰과 정치적 태도의 변화, 철학적 사색과 통찰이 담긴 위고의 ‘레미제라블’ 역시 출간 후 비평가들의 혹평에 시달렸으나, 프랑스에서만 1년 동안 15만 권이 팔렸을 정도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위고의 원작이 품고 있는 장발장과 미리엘 주교, 판틴, 코제트를 통해 구현되는 ‘구원과 사랑, 희생’의 맥락과 경찰관 자베르로 인해 제기되는 ‘법과 정의, 자비’에 대한 질문, 그리고 앙졸라를 주축으로 하는 항쟁하는 청년들을 통해 강조되는 ‘진보를 향한 희망과 투쟁’의 주제를 채택한다.

뮤지컬 '레미제라블' 공연 장면. 몽페르뫼이유의 여관 주인 '떼나르디에(육현욱)'는 거짓과 약탈을 일삼는 이기적이고 부도덕한 인물로 무자비함과 사악함을 갖췄지만, 뮤지컬에서는 '코믹 릴리프'의 역할을 한다./사진= 레미제라블코리아
뮤지컬 '레미제라블' 공연 장면. 몽페르뫼이유의 여관 주인 '떼나르디에(육현욱)'는 거짓과 약탈을 일삼는 이기적이고 부도덕한 인물로 무자비함과 사악함을 갖췄지만, 뮤지컬에서는 '코믹 릴리프'의 역할을 한다./사진= 레미제라블코리아

무자비와 이기심, 부도덕과 사악함의 대변격인 여관 주인 떼나르디에를 관객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진지하고 심각한 주제에서 잠시 ‘웃음’으로 도피할 수 있는 ‘코믹 릴리프(comic relief)’로 완화시킨 점은 상업적 선택이라고 할 수 있지만, 웃음 뒤에 씁쓸함이 남겨지는 것도 사실이다. 현실 속에 떼나르디에 부부와 같이 이기적인 사람들이 존재하며, 양심과는 거리가 먼 그들이 생존에는 더 능숙함을 관객들이 인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부블리와 숀버그의 뮤지컬은 위고의 원작을 잘 알지 못하는 관객을 위해 “스토리텔링의 명확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상당한 수정과 추가, 변화를 거치게 된다.

매킨토시는 위고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주세페 베르디의 1851년 오페라 ‘리골레토’를 뉴욕의 마피아 세상으로 옮겨 재구성한, 1982년 조나단 밀러 연출의 동명 오페라의 대본(리브레토) 작가 제임스 펜턴에게 작업을 의뢰한다.

뮤지컬 '레미제라블' 공연 장면. 마리우스는 바리케이드에서 혼자만 살아남은 슬픔과 죄의식을 토로하며, 죽음과 함께 사라진 친구들을 그리워한다./사진= 레미제라블코리아
뮤지컬 '레미제라블' 공연 장면. 마리우스는 바리케이드에서 혼자만 살아남은 슬픔과 죄의식을 토로하며, 죽음과 함께 사라진 친구들을 그리워한다./사진= 레미제라블코리아

보르네오로 여행을 떠난 펜턴이 소설의 한 챕터를 끝낼 때마다 카누를 둘러싼 악어들에게 던져주었다는 일화를 남긴 뮤지컬 대본은 현재 서사의 ‘구조’로만 남아있다. 가령, 마리우스가 바리케이드에서 죽은 친구들을 떠올리며 텅 빈 의자와 테이블을 바라보며 죄책감을 느끼는 장면은 펜턴의 흔적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가사 작업은 당시 '데일리 메일'의 저널리스트이자 여러 뮤지컬의 가사를 썼던 하버트 크레츠머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는데, 펜턴의 ‘시’에 가까운 언어를 캐릭터를 좀 더 드러낼 수 있는 언어로 전환할 필요가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개막까지 5개월 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크레츠머는 가사를 다듬고, 수정, 교체, 추가하는 작업을 더했다. 그는 가장 힘들었던 곡으로 2막에서 장발장이 바리케이드에서 잠든 마리우스를 바라보며 부르는 넘버 ‘브링 힘 홈(Bring Him Home)’을 언급하는데, 위고의 원작과 가장 거리가 있는 가사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뮤지컬 '레미제라블' 공연 장면. 타인의 돈을 갈취하고 사기를 치며 끊임없이 이기적인 욕심만을 채우는 '떼나르디에 부부(박준면(왼쪽), 임기홍)'는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결혼식에 나타난다./사진= 레미제라블코리아
뮤지컬 '레미제라블' 공연 장면. 타인의 돈을 갈취하고 사기를 치며 끊임없이 이기적인 욕심만을 채우는 '떼나르디에 부부(박준면(왼쪽), 임기홍)'는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결혼식에 나타난다./사진= 레미제라블코리아

원작에서 장발장은 코제트와 사랑에 빠진 마리우스를 향해 원망과 분노, 질투를 느낀다. 자신의 유일한 행복이자 전부인 코제트를 빼앗은 존재인 마리우스를 바라보면서, 젊은 청년이 죽음에 이르도록 방치할 것인가, 아니면 구원할 것인가의 ‘선택’을 놓고 소유욕과 양심, 이기심과 이타심이 투쟁을 벌이는 장발장 내면의 소용돌이는 숀버그의 장엄하고 찬송가와 같은 음악과 완전히 상충되는 것이었다.

결국 넌과 함께 공동연출을 맡은 존 케어드가 “기도문처럼 들린다”고 말한 것이 영감이 되어 사랑에 빠진 젊은 청년의 목숨을 구원하는 대신 나이 든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갈 것을 신께 기도하는 희생적이고 감동적인 넘버가 완성되었다.

그 외에도 떼나르디에 부부에게 학대당하는 판틴의 딸 어린 코제트가 부르는 ‘캐슬 온 어 클라우드(Castle on a Cloud)’는 왕자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내용으로 변경되었고, 경찰관 자베르가 반드시 장발장을 잡겠다고 맹세하면서 부르는 넘버 ‘스타(Stars)’는 초연 당시 자베르 역을 맡았던 배우 로저 알람의 요청으로 인해 새롭게 추가되었다.

또, 원래는 판틴의 넘버였던 곡에 가사를 교체해 마리우스를 짝사랑하는 떼나르디에의 딸 에포닌의 유명한 넘버 ‘온 마이 오운(On My Own)’이 탄생했다.

크레츠머는 자베르가 장발장과 같은 범죄자들을 경멸하고, 신을 외면한 타락한 인간으로 여기면서, 질서 유지와 정의 구현을 위해 법을 집행할 숙명을 지닌 존재로 자신을 규정하는 ‘스타(Stars)’ 만이 유일하게 가사가 먼저 쓰인 곡이라고 설명한다.

뮤지컬 '레미제라블' 공연 장면. 법적 정의를 외치는 '자베르(김우형)'와 자비와 용서, 사랑을 실천하며 '양심'과 투쟁을 벌이는 '장발장(최재림)'은 대결 구도를 갖는다./사진= 레미제라블코리아
뮤지컬 '레미제라블' 공연 장면. 법적 정의를 외치는 '자베르(김우형)'와 자비와 용서, 사랑을 실천하며 '양심'과 투쟁을 벌이는 '장발장(최재림)'은 대결 구도를 갖는다./사진= 레미제라블코리아

법적 정의를 외치는 자베르와 미리엘 주교의 뜻대로 신의 자비와 용서, 사랑을 실천하며 ‘양심’과 투쟁을 벌이는 장발장은 대결 구도를 갖는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긴 여정은 바리케이드에서 장발장이 스파이로 잠입한 자베르의 목숨을 살려주면서, 자베르가 굳게 믿어왔던 신념과 믿음에 금이 가고, 결국 그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만다.

자베르와 장발장의 대립과 갈등은 음악에 그대로 반영되며, 두 사람의 다른 입장이나 생각, 모순되는 가치와 양심의 투쟁은 선율과 화음 속에 그대로 표현된다.

대사 없이 노래로만 이루어진 ‘성스루(sung-through)’를 적용하는 뮤지컬에서 40여 개의 노래(넘버) 만으로 “벽돌”이라는 별명이 붙은 위고의 원작을 담아내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 때문에 원작을 읽은 독자들에게는 생략된 많은 부분들과 변경된 요소들이 아쉽게 느껴지거나, 장발장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이 겪는 내적 갈등을 단편화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음악을 중요한 요소로 여기는 뮤지컬의 특성에 맞게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오페라에 가까운 웅장함과 아름다움, 대위법과 앙상블을 잘 살린 화음과 영혼을 울리는 선율로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고양된 의미심장함”을 부여하고, “가장 내적인 핵심과 심장”을 드러낸다.

“감정과 열정의 언어”인 음악은 관객의 마음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보편적인 하나의 언어”로서 위고의 원작의 “본질과 지혜”를 이해할 수 있도록 반영한다.

뮤지컬 '레미제라블' 공연 장면. 1832년 바리케이드 장면은 위고의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프랑스 대혁명과 워털루 전투, 1848년 혁명과의 연결고리를 품고 있다. 위고는 바리케이드를 "공화국의 혁명에 대한 예언적 징조"로 여겼다./사진= 레미제라블코리아
뮤지컬 '레미제라블' 공연 장면. 1832년 바리케이드 장면은 위고의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프랑스 대혁명과 워털루 전투, 1848년 혁명과의 연결고리를 품고 있다. 위고는 바리케이드를 "공화국의 혁명에 대한 예언적 징조"로 여겼다./사진= 레미제라블코리아

감옥에서 19년을 보내고 가석방된 장발장의 20년에 가까운 세월을 다루는 뮤지컬이 1막의 끝과 2막의 대부분을 파리 거리에 세워진 ‘바리케이드’에 집중시킨 것은 위고가 원작을 통해 “진보의 행진이 일시적으로 길을 잃을 수 있으나 새로운 방향으로 다시 시작된다”는 메시지를 강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위고의 메시지를 1막의 엔딩곡 넘버 ‘원 데이 모어(One Day More)’와 2막의 ‘두 유 히어 더 피플 싱(Do You Hear the People Sing)?’에 담아낸다.

내일을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각자의 입장에서 미래를 꿈꾸며, 새로운 역사가 쓰이기를, 더 나은 삶이 펼쳐지기를, 모두가 함께 다시 일어서는 날이 오기를 바라는 다양한 사람들의 마음은 위고의 낙관적인 믿음과 함께 객석에 와 닿는다.

톰즈는 영문판 ‘레미제라블’의 서문에서 위고의 ‘레미제라블’만큼 “바리케이드에 중요한 위치를 부여하고 주도적인 역할을 부여해 현실을 신화로 대체하는 문학은 없음”을 강조한다.

뮤지컬 '레미제라블' 공연 사진. 임종 직전에 장발장은 사랑하는 코제트와 재회하고, 안식 속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판틴의 환영을 보게 된다./사진= 레미제라블코리아
뮤지컬 '레미제라블' 공연 사진. 임종 직전에 장발장은 사랑하는 코제트와 재회하고, 안식 속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판틴의 환영을 보게 된다./사진= 레미제라블코리아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음악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은 다른 예술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신속하며, 필연적이고 확실하다”고 말했다.

그는 “선율은 의지의 가장 비밀스러운 역사를 이야기하며, 의지의 모든 감동과 노력, 운동”을 통합해 추상적인 것들을 누구나 즉각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든다고 주장했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음악은 위고의 원작이 품은 변화를 향한 희망과 선한 영향력의 필요성, 사랑과 자비, 연대와 희생, 연민이 함께하는 세상을 갈망한다.

위고의 말처럼, 고통은 사라질 수 없을지 모르지만 불행은 사라져야 하고, 불행한 자들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비참한 자들을 구원할 수는 있어야 한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한 희망과 꿈, 선의의 필요성과 연민, 그것이 뮤지컬 ‘레미제라블’이 끊임없이 사랑을 받는 이유가 아닐까? 4월 7일까지 대구 계명아트센터.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하영
주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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