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하영 365칼럼] ‘기다림’이라는 선택의 무게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주하영 365칼럼] ‘기다림’이라는 선택의 무게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 주하영
  • 승인 2024.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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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문화로 보는 세상풍경]
-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사무엘 베케트의 대표작
- 신구x박근형x박정자x김학철 등 도합 228년 연기 내공 대배우들의 향연
- 여자 배우가 연기하는 ‘럭키’로 시도된 새로운 프로덕션
2023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사진. 1막에서 끝없이 생각을 쏟아내던 짐꾼 '럭키(박정자, 가운데)'는 모자를 벗겨내자 마자 쓰러지고, '포조(김학철)'는 '에스트라공(신구)'과 '블라디미르(박근형)'의 도움을 받아 럭키를 일으켜세운다.
2023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장면. '에스트라공(신구, 왼쪽)'과 '블라디미르(박근형)'는 지루함과 피로함, 외로움을 이겨내며 '고도(Godot)'라는 존재를 끊임없이 기다린다./사진=파크컴퍼니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로 ‘증언’을 통해 현대 인간의 ‘위기’를 인식시키고자 했던 프리모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의 부록에서 “인간처럼 책에도 운명이 있다”고 말했다. 인간의 운명처럼 책의 운명도 앞날을 예측하기 어렵고,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결말에 이를 수 있음을 언급한 이 말은 ‘이것이 인간인가’가 다시 새 생명을 얻게 된 데 대한 놀라움의 표현이었다.

레비는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을 기록했던 1947년의 초판 2,500부를 끝으로 망각 속으로 사라지던 책이 1958년에 이르러 다시 독자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받으며, 8개 국어로 번역되고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현상을 바라보면서, 모든 것에는 나름의 ‘운명’이 있음을 인지했다.

1953년 1월 5일, 파리에 위치한 바빌론 극장에서는 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가 프랑스어로 쓴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En attendant Godot)’가 초연되었다.

2023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사진. 베케트에 따르면, 작품의 핵심은 "웃음과 눈물"에 있다. '에스트라공(신구, 왼쪽)'과 '블라디미르(박근형)'는 침묵 속에 웃음과 재미를 찾아 고도가 올 때까지 시간을 보내는 일에 골몰한다.
2023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장면. 베케트에 따르면, 작품의 핵심은 "웃음과 눈물"에 있다. '에스트라공(신구, 왼쪽)'과 '블라디미르(박근형)'는 침묵 속에 웃음과 재미를 찾아 고도가 올 때까지 시간을 보내는 일에 골몰한다./사진=파크컴퍼니 

1949년 베케트의 나이 43세에 완성된 희곡은 그가 3부작 소설을 집필하며 분투하던 가운데 잠시 기분 전환을 위해 4개월 만에 완성된, 비교적 쉽게 창작된 작품이었다.

하지만 전통을 벗어난 파격적인 희곡을 무대에 올려줄 제작자를 찾기란 쉽지 않았고, 베케트의 친구이자 미래의 아내가 될 수잔은 끊임없이 극장의 문을 두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배우이자 연출가인 로저 블린에 의해 초연된 ‘고도를 기다리며’에 대한 첫 반응은 논란 그 자체였다. 개막 공연을 본 많은 평론가들은 곤혹스러워했고, 지루해했으며, 냉소적이었다. 하지만 일부 평론가들은 새로움에 흥분하고 열광하기도 했다.

2023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사진. '블라디미르(박근형, 오른쪽)'와 '에스트라공(신구)'의 사소한 대화의 반복과 몸짓, 행동들은 '지루함'의 요소가 되기도 하지만 '일상'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2023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장면. '블라디미르(박근형, 오른쪽)'와 '에스트라공(신구)'의 사소한 대화의 반복과 몸짓, 행동들은 '지루함'의 요소가 되기도 하지만 '일상'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사진=파크컴퍼니 

각기 다른 반응과 논란은 파리 지식인들의 관심을 촉발했고, 갈등을 중심으로 액션과 캐릭터가 드러나고 플롯이 중시되는 전통적인 연극과는 전혀 다른,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는” 베케트의 작품이 품은 의미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관객들의 야유와 조롱 속에 첫 공연의 막을 내려야 했던 ‘고도를 기다리며’는 프랑스 일간지 ‘피가로(Le Figaro)’에 의해 “광대들에 의해 공연된 파스칼의 명상록”이라는 호평을 기점으로 입소문을 타면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영국의 비평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마틴 에슬린은 1961년 “인간 조건에 대한 매우 동시대적인 진술”을 특징으로 하는 베케트의 작품들을 ‘부조리극’이라는 범주로 규정했고, 1969년 베케트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고도를 기다리며’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연극 중 하나”로 손꼽히며 전 세계에서 공연되고 있다.

2023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메인 포스터 컷. 새로운 프로덕션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연극계를 대표하는 고령의 대배우들의 원캐스트와 럭키 역과 소년 역에 여자 배우를 캐스팅한 변화를 보인다.
2023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메인 포스터 컷. 새로운 프로덕션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연극계를 대표하는 고령의 대배우들의 원캐스트와 럭키 역과 소년 역에 여자 배우를 캐스팅한 변화를 보인다./사진=파크컴퍼니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는 한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연기 경력 60년 이상의 대배우들이 선보이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가 관객들의 찬사 속에 공연을 이어가고 있다.

국내에서 ‘고도를 기다리며’가 첫 선을 보인 것은 베케트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해인 1969년 12월이었다. 임영웅 연출에 의해 극단 산울림의 창단 공연으로 무대에 오른 작품은 전석매진이라는 기록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2019년 산울림 50주년 기념공연까지 임영웅 연출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약 1,500회 공연, 22만 명 관객이라는 역사를 만들어냈다.

2023년 12월, 새로운 프로덕션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연극계를 대표하는 고령의 대배우들의 원캐스트와 럭키 역과 소년 역에 여자 배우를 캐스팅한 변화와 함께 ‘고통’이라는 삶의 본질 속에서 우리의 ‘선택’은 무엇이 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연출을 맡은 오경택은 프로그램북 인터뷰에서 “삶의 본질은 고통”이지만 “습관이라는 위대한 마취제”에 의해 무뎌지고 “일상이 지루해”지는 속에서, 우리는 고통과 지루함 중 무엇을 견딜지 결정해야 할 “거대한 갈림길”에 서 있음을 강조했다.

2023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사진. 1막에서 끝없이 생각을 쏟아내던 짐꾼 '럭키(박정자, 가운데)'는 모자를 벗겨내자 마자 쓰러지고, '포조(김학철)'는 '에스트라공(신구)'과 '블라디미르(박근형)'의 도움을 받아 럭키를 일으켜세운다.
2023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장면. 1막에서 끝없이 생각을 쏟아내던 짐꾼 '럭키(박정자, 가운데)'는 모자를 벗겨내자 마자 쓰러지고, '포조(김학철)'는 '에스트라공(신구)'과 '블라디미르(박근형)'의 도움을 받아 럭키를 일으켜세운다./사진=파크컴퍼니 

‘에스트라공(고고)’ 역에 신구(87세), ‘블라디미르(디디)’ 역에 박근형(83세), ‘럭키’ 역에 박정자(81세), ‘포조’ 역에 김학철(63세), ‘소년’ 역에 김리안(26세)으로 구성된 “도합 228년의 연기 내공”을 강조한 새로운 ‘고도를 기다리며’는 연륜에서 묻어나는 깊이와 무게감, 압도적인 존재감과 신선함으로 보다 관객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공연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또, ‘5명의 남자배우들에 의해서 공연될 것’을 상당히 엄격하게 규제해왔던 베케트 자산관리기구와 세계 여러 극단들의 소송의 역사와 시대의 변화를 염두에 둔 듯, 배우의 ‘젠더’에 자유를 준 부분은 현재의 흐름을 반영한 선택으로 보인다.

“해석자의 자유와 저작권자의 권리의 오래된 싸움”이라고 일컬어지는 소송의 시작은 베케트가 사망하기 1년 전인 1988년에 촉발되었다.

여배우들로만 캐스팅된 네덜란드 극단의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을 허락할 수 없었던 베케트는 극 중 디디(블라디미르)가 전립선 문제로 소변을 보기 위해 자주 무대를 벗어나는 설정을 예로 들며, “여성은 전립선이 없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2023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사진. 베케트의 1막과 2막에 등장하는 '소년(김리안)'은 고도 아저씨가 오지 못한다는 소식을 '블라미디르(박근형, 왼쪽)'와 '에스트라공(신구)'에게 전한다.
2023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장면. 베케트의 1막과 2막에 등장하는 '소년(김리안)'은 고도 아저씨가 오지 못한다는 소식을 '블라미디르(박근형, 왼쪽)'와 '에스트라공(신구)'에게 전한다./사진=파크컴퍼니 

베케트가 세상을 떠난 후 저작권을 상속받은 조카 에드워드는 삼촌의 유언에 따라 희곡의 정확한 지시에 어긋나는 작품들을 엄격하게 관리했다.

이후 30년이 넘도록 여러 차례의 법정 소송이 이어졌지만, 베케트 자산관리기구의 ‘경직성’은 완화된 측면을 보이면서도 등장하는 인물들이 반드시 ‘남성’으로 연기되어야 한다는 원칙에 예외를 두지 않았다. “여자 배우가 극에 출연할 수는 있으나 반드시 남성으로 역할 연기를 해야 한다”는 기준에 대한 반발은 최근 몇 년간 보다 자주 이어져왔다.

2019년 미국 오하이오주의 오벌린 대학 연극학과는 리허설을 앞둔 여배우들만 출연하는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을 취소했다. “여성 출연진으로 인해 연극이 변형될 것”을 우려한 베케트 자산관리기구와의 법적 분쟁이 촉발될 경우, 학교가 감당해야 할 부담과 위험을 염두에 둔 결정이었다.

2020년 영국 언론 ‘가디언’은 저작권자의 사망 후 70년이 지나야 소멸되는 법적 조치에 따르면, “여성과 논바이너리(non-binary) 배우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을 연기하려면 2059년 말까지 기다려야 함”을 지적했다.

비평가 케이트 와이버(Kate Wyver)는 베케트 자산관리기구의 젠더 규제에 도전하는 사일런트 페이스 극단의 신작 ‘고도는 여자다’를 소개하면서, 블라디미르의 대사 “내일은 모든 게 더 나아질 거야”를 인용했다.

2023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사진. 짐꾼인 '럭키(박정자)'는 생각을 하라는 포조의 명령에 8분 동안 해체된 언어와 같은
2023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장면. 짐꾼인 '럭키(박정자)'는 생각을 하라는 포조의 명령에 8분 동안 해체된 언어와 같은 "미완성"의 생각들을 끊임없이 쏟아낸다./사진=파크컴퍼니 

베케트가 자신의 작품들에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이유에는, 그의 “희곡들이 조각된 이미지와 같아서 작가가 정한 방향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사실상 본질에서 벗어난다”는 지적과 관련이 있었다.

하지만 ‘고도를 기다리며’의 경우,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질문과 장소와 시대에 국한되지 않는 영구성을 특징으로 하는 ‘보편적인’ 작품이라는 점에서, 보다 유연할 필요가 있다.

1957년 미국 캘리포니아의 산 퀜틴 주립 교도소에서 수감자들의 마음을 움직인 공연부터, 1976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비판을 담은 공연, 1993년 사라예보의 포위전 한가운데에서 수전 손택이 무대에 올린 공연, 2006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덮쳤던 미국 뉴올리언스에서의 회복의 열망을 담은 공연에 이르기까지, ‘고도를 기다리며’는 사회적, 정치적 위기 혹은 재난의 시기에 독특한 울림을 주는 작품으로 여겨져 왔다.

전 세계인이 고립된 격리기간을 거치며 공포에 떨어야 했던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고도를 기다리며’에 대한 언급이 잦아진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2020년 봄, ‘워싱턴포스트’의 편집자인 스티븐 리빙스턴은 팬데믹 속에서 우리가 기다리는 ‘고도’는 “자가격리의 종료, 비정상이 정상으로 돌아가는 삶, 치료제와 백신, 모든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라고 말했다.

2023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사진. '에스트라공(신구)'은 신발을 벗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분투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2023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장면. '에스트라공(신구)'은 신발을 벗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분투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면서 한숨을 내쉰다./사진=파크컴퍼니 
2023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사진. '블라디미르(박근형)'은 신발을 벗겨달라는 에스트라공을 향해
2023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장면. '블라디미르(박근형)'은 신발을 벗겨달라는 에스트라공을 향해 "고통 속에 있는 것은 너 혼자 뿐인 줄 아느냐"면서 다른 말을 한다. /사진=파크컴퍼니 

초연 이후 70년에 이르는 오랜 세월 동안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변함없이 세계인의 사랑을 받으며, 특히 어려운 시기에 관객과 소통하는 작품으로 자리매김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일랜드의 문학비평가 비비안 메르시에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연극, 그것도 두 번씩이나”라고 평가한 ‘고도를 기다리며’는 사실상 관객의 양분된 반응을 낳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관객은 두 명의 광대가 주고받는 단편적인 말장난과 기계적인 반복, 비연속적인 정체와 기다림으로 일관된, 플롯이 아닌 ‘상황’에 집중한 연극이 지루하고 어렵다고 말한다.

하지만 또 다른 관객은 유머와 몸짓, 침묵의 병치 속에 묘한 슬픔을 낳고, 실존과 부조리, 삶과 죽음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을 모호한 암시로 제시하는 연극을 ‘도전’으로 느끼며 적극적으로 반응한다.

2023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사진. 2막에서 '에스트라공(신구, 왼쪽)'과 '블라디미르(박근형)'는 조금 더 깊이 외로움과 지루함을 느끼며 '견딜 수 없음'을 토로한다.
2023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장면. 2막에서 '에스트라공(신구, 왼쪽)'과 '블라디미르(박근형)'는 조금 더 깊이 외로움과 지루함을 느끼며 '견딜 수 없음'을 토로한다./사진=파크컴퍼니 

물론 ‘고도를 기다리며’의 인기는 사실주의 연극에서 강조하던 인물에 대한 인식을 지워버리고, 보편적이고 전형적인 유형을 제시하며, “연극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던 모든 것을 거의 깎아내 버린” 베케트의 스타일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반영되어 있었다.

하지만 존 오스본의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가 주도한 키친 싱크 리얼리즘(kitchen-sink realism)과 유진 오닐의 사실주의의 걸작 ‘밤으로의 긴 여로’가 주도하던 1950~60년대 연극계의 흐름을, 매우 실험적이고 낯선 미니멀리즘의 세계가 접목된 “은유적 연극”으로 바꿔버린 베케트의 연극사적 의미까지, 모든 관객이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관객들이 ‘고도를 기다리며’를 통해 공감한 가장 큰 부분은 작품이 품은 “웃음과 눈물” 사이에 맴도는 삶의 불안과 절망, 미래의 불확실함, 습관적 일상의 반복과 막연한 구원, 두려움과 고독, 그리고 ‘기다림’이라는 ‘인내’에 있었다.

2023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사진. 부유하고 오만한 주인 '포조(김학철)'는 같은 종족인 '인간'을 만났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잠시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곁에 머물다 가겠다고 말한다.
2023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장면. 부유하고 오만한 주인 '포조(김학철)'는 같은 종족인 '인간'을 만났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잠시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 곁에 머물다 가겠다고 말한다./사진=파크컴퍼니 

“기다림으로 시작해서 기다림으로 끝나는 연극”인 ‘고도를 기다리며’는 말라버린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황량한 시골길에서 ‘고도(Godot)’를 기다리는 부랑자와 다름없는 에스트라공(고고)과 블라디미르(디디)를 마주하면서 시작된다.

신발을 벗으려고 안간힘을 쓰거나 별 의미 없는 사소한 대화를 나누며 티격태격 시간을 보내던 두 사람 앞으로 채찍을 휘두르는 부유하고 오만한 주인 ‘포조’와 목에 밧줄이 묶인 채 무거운 짐을 들고 힘겹게 걸어가는 하인 ‘럭키’가 지나간다.

2023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사진. 1막에서 '포조(김학철, 오른쪽)'는 목에 줄을 맨 채로 힘겹게 짐을 들고 걷는 짐꾼 '럭키(박정자, 가운데)'를 채찍과 호통으로 끌어 당기며 '블라디미르(박근형)'와 '에스트라공(신구)' 앞에 나타난다.
2023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장면. 1막에서 '포조(김학철, 오른쪽)'는 목에 줄을 맨 채로 힘겹게 짐을 들고 걷는 짐꾼 '럭키(박정자, 가운데)'를 채찍과 호통으로 끌어 당기며 '블라디미르(박근형)'와 '에스트라공(신구)' 앞에 나타난다./사진=파크컴퍼니 

“6시간 동안 사람 그림자 하나 못 봤다”는 포조는 고고와 디디 곁에 잠시 머무르면서, 혼자 식사를 하고, 럭키를 괴롭히며, 이런저런 얘기들을 쏟아낸다.

럭키가 왜 짐을 내려놓지 않고 계속 들고 서 있는지를 궁금해하는 두 사람에게 제대로 된 답은 전달되지 않고, “황혼”과 “세상의 이치”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던 포조는 고고와 디디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럭키에게 “춤을 출 것”과 “생각할 것”을 명령한다.

023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사진.  '에스트라공(신구, 오른쪽)'과 '블라디미르(박근형)'는 포조의 짐꾼인 '럭키(박정자, 가운데)'가 왜 무거운 짐과 바구니를 든 채로 바닥에 내려놓지 않는지를 궁금해한다.
2023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장면.  '에스트라공(신구, 오른쪽)'과 '블라디미르(박근형)'는 포조의 짐꾼인 '럭키(박정자, 가운데)'가 왜 무거운 짐과 바구니를 든 채로 바닥에 내려놓지 않는지를 궁금해한다./사진=파크컴퍼니 

모자를 씌워주면 생각을 한다는 럭키는 8분 동안 3페이지 분량의 의미를 알 수 없는, 해체된 언어들로 가득한 “미완성”의 사유들을 쏟아내고, 억지로 모자를 벗겨 생각을 멈추는 순간, 바닥에 쓰러져 버린다.

고고와 디디의 도움으로 럭키를 일으켜 세운 포조는 다시 채찍을 손에 쥔 채 길을 떠나고, 남겨진 두 사람은 또다시 고도를 기다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메시지를 전하러 온 소년은 “고도 아저씨가 오늘 저녁에는 못 오지만 내일은 꼭 오겠다”고 했다는 말만 남긴 채 가버린다.

고고(에스트라공)와 디디(블라디미르)는 내일이면 모든 게 잘 될 거란 생각으로 또 한 번의 기다림을 예고한다. “갈까”라는 말에 “그래, 가자”로 응대하는 고고와 디디는 움직이지 않은 채 1막의 끝을 알린다.

2023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사진. 황혼에서 밤으로 이어지는 시간을 암시하는 무대는 1막과 2막의 마지막에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르는 장면을 구현한다.
2023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장면. 황혼에서 밤으로 이어지는 시간을 암시하는 무대는 1막과 2막의 마지막에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르는 장면을 구현한다./사진=파크컴퍼니 

2막 역시 1막과 다름없이 허공을 맴도는 대화와 어이없는 행동, 해답으로 연결되지 않는 질문, 침묵과 제스처, 교착 상태의 기다림이 반복되는 가운데, 무대 위 앙상하던 나무에 푸른 ‘잎’이 더해진 만큼의 ‘변화’가 생긴다.

다른 신발을 신거나 다른 모자를 쓰고, 좀 더 많은 질문을 던지고, 좀 더 깊이 외로움과 지루함을 느끼는 고고와 디디는 1막에서와 똑같이 포조와 럭키를 만난다.

하지만 포조는 눈이 먼 상태로 럭키가 이끄는 줄을 잡고 등장하고, 어제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며, 럭키는 아예 말을 하지 못한다.

2023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사진. 2막에서 '블라디미르(박근형, 오른쪽)'와 '에스트라공(신구)'은 포조와 럭키를 다시 만나지만, '포조(김학철)'는 눈이 먼 상태로 짐꾼인 '럭키(박정자)'의 목에 맨 줄에 이끌려 움직인다.
2023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장면. 2막에서 '블라디미르(박근형, 오른쪽)'와 '에스트라공(신구)'은 포조와 럭키를 다시 만나지만, '포조(김학철)'는 눈이 먼 상태로 짐꾼인 '럭키(박정자)'의 목에 맨 줄에 이끌려 움직인다./사진=파크컴퍼니 

모든 것이 조금씩 다르게 변형된 2막이지만 고도는 여전히 오지 않고, 소년은 또다시 “고도 아저씨가 내일은 틀림없이 올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더는 이 짓을 못하겠다”고 외치면서 나무에 목을 매려던 두 사람은 끈이 끊어져 시도조차 할 수 없게 되자 또다시 내일을 기약한다. 2막 역시 “갈까”라는 물음에 “그래, 가자”로 응대하는 두 사람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은 채 막이 내린다.

다른 점이 있다면, 1막에서는 고고의 제안에 디디가 ‘가자’라고 답했지만, 2막에서는 디디의 제안에 고고가 ‘가자’라고 답한다는 것뿐이다.

2023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사진. '에스트라공(신구, 왼쪽)'과 '블라디미르(박근형)'는 나무에 목을 매 자살할 결심을 하지만 에스트라공의 바지 허리 끈이 끊어지면서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된다.
2023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장면. '에스트라공(신구, 왼쪽)'과 '블라디미르(박근형)'는 나무에 목을 매 자살할 결심을 하지만 에스트라공의 바지 허리 끈이 끊어지면서 시도조차 하지 못하게 된다./사진=파크컴퍼니 

균형과 반복, 회화적인 이미지, 희극과 비극의 교차, 기다림과 유예, 모호함은 베케트가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가장 강조하고자 했던 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베케트의 친구이자 전기문을 쓴 작가인 제임스 놀슨은 ‘고도를 기다리며’의 가장 큰 매력을 “명시적으로 말하기보다는 많은 것을 암시하는 모호함 때문”으로 평가한다.

자신이 읽고 싶은 대로, 해석하고 싶은 대로 해석할 수 있는 “개방성”이 난해하다는 생각을 넘어 나름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각자에게 ‘자유’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고도’가 어떤 존재인지, 사람인지, 사물인지, 신인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베케트는 “만약 알았다면 극에서 말했을 것”이라고 답했다.

또, 작품이 제기하는 상징과 의미에 대한 모든 추측과 해석을 무력화하며, 설명을 덧붙여주기를 바라는 질문에 베케트는 “왜 사람들은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만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2023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사진. 극작가인 사무엘 베케트는 '블라디미르(박근형, 왼쪽)'와 '에스트라공(신구)'은 '오랫동안 함께 해 온 결혼한 부부와 같이 함께 늙어가는 관계'임을 언급했다.
2023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장면. 극작가인 사무엘 베케트는 '블라디미르(박근형, 왼쪽)'와 '에스트라공(신구)'은 '오랫동안 함께 해 온 결혼한 부부와 같이 함께 늙어가는 관계'임을 언급했다./사진=파크컴퍼니 

1955년 베케트가 영어로 다시 쓴 ‘고도를 기다리며’를 영국에서 초연한 연출가 피터 홀은 당시를 회상하며, 베케트는 특정한 방향성을 갖고 작업하지 않았으며,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너무 오래 함께해 온 결혼한 부부처럼 하루하루 늙어간다”고 언급했음을 지적했다.

실제로 작품 속에서 대사를 통해 50년간 함께 해 온 것으로 드러나는 두 사람은 “서로 헤어지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를 질문하고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야”라는 대답을 하곤 한다.

어떤 측면에서는 “시간의 흐름, 시간을 보내는 것”에 관한 아주 “긴 시”와 같다고 평가되는 ‘고도를 기다리며’는 영국 극작가 톰 스토파드의 지적처럼, “특정한 것을 은유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니”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보편적인 은유가 된다“고 할 수 있다.

2023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사진. '에스트라공(신구, 왼쪽)'과 '블라디미르(박근형)'의
2023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장면. '에스트라공(신구, 왼쪽)'과 '블라디미르(박근형)'의 "갈까"라는 물음과 "그래, 가자"라는 응답은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사진=파크컴퍼니 

1964년에 베케트와 함께 작업했던 앤서니 페이지 연출에 따르면, 베케트는 ‘고도를 기다리며’와 관련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 채 희곡을 썼다”고 한다.

그저 마음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따라 그 ‘톤’과 등장인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지를 전달하고 싶었다는 베케트는 “웃음과 눈물이 중요한 전부”임을 강조했다. 삶을 채우고 있는 두 가지 요소라고 할 수 있는 희극과 비극, 즉 웃음과 눈물이 ‘고도를 기다리며’의 핵심이었던 셈이다.

삶의 재정비가 필요한 순간, 외부의 세상이 가진 불안에 내면이 영향을 받는 위기 한가운데에서, “되는 게 하나도 없네”라고 외치게 되는 절망 속에서, ‘고도를 기다리며’가 빛을 발해 온 것은 바로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계 밖으로 넘어서면 붕괴와 허무뿐인 세계” 속에서 모든 것을 소진하면서도 웃음으로 지루함을 견디고, 눈물 속에서도 ‘기다림’을 선택하는 두 부랑자의 모습이 우리 자신과 겹쳐지는 ‘공감’ 말이다.

프랑스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부조리의 감수성”을 탐구한 책 ‘시지프의 신화’에서 부조리에 맞서 대결할 수 있는 믿음은 동지애와 우정과 같은 넓은 의미의 ‘인간관계’임을 강조한다.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세계 안에서 인간적인, 오직 인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광범위한 의미의 ‘사랑’, 에스트라공(고고)과 블라디미르(디디)가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걷는 ‘기다림’의 길, 그 선택의 무게를 우리가 인지하는 것은 아닐까? 2월 18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상지대 겸임교수, 대림대 겸임교수, 한국외국어대 객원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공학대학교 지식융합학부(교양교육센터)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 《한국연극》 편집위원과 한국연극평론가협회 편집위원 및 이사, 세계문화예술경영연구소 초빙연구원, 외국문학연구소 초빙연구원을 역임했다.

주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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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y02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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