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호가 만난 人] 연극인 박팔영 = 배우, 연극연출, 분장, 희곡작가, 화가
[김두호가 만난 人] 연극인 박팔영 = 배우, 연극연출, 분장, 희곡작가, 화가
  • 김두호 인터뷰어
  • 승인 202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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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365] 박팔영 배우의 특별한 인생이야기
- 40여년 간 영화·연극·드라마·미술·분장 등 다방면서 예술인 재기(才氣) 발휘
- "좋아서 시작한 취미가 직업 되고 전문가로 발전했죠"
배우이자 희곡작가, 분장사, 연출가, 화가로 활동 하고 있는 박팔영. 영화 연극 미술 관련 많은 상을 수상하며 40년 넘도록 다양한 직종에서 뛰어난 활동 실적을 올린 그는 예술 분야 전문가다. /사진=인터뷰365
배우이자 희곡작가, 분장사, 연출가, 화가로 활동 하고 있는 박팔영. 영화 연극 미술 관련 많은 상을 수상하며 40년 넘도록 다양한 직종에서 뛰어난 활동 실적을 올린 그는 예술 분야 전문가다. /사진=인터뷰365

인터뷰365 김두호 인터뷰어 = 영화 연극배우며 TV 탤런트이기도 한 ‘박팔영’(1954∼)배우의 이름 복판에 아마도 우연이겠지만 ‘팔’(八)자가 들어 있다. ‘팔방미인’(八方美人)과 ‘사통팔달’(四通八達)이라는 사자성어(四字成語)를 합치면 여러 재주가 사방으로 통한다는 뜻이 될 수 있는데 박팔영 배우의 직업적 활동 분야는 연기인에 희곡작가, 분장사, 연출가, 그리고 본래의 전공인 동양화가(수묵화)까지 5분야가 망라된다.

구체적으로 40년 넘는 활동 기록을 보면 출연 영화 36편, 출연 연극 130여 편, TV 장단편 출연 드라마 1천여 회 이상, 연극 연출 3,40여 편, 희곡 10여 편, 영화 연극 출연진 분장 작품 연간 30여 편으로 모두 약 1000여 편이 족히 넘는다. 기네스북에 등재될 수 있는 기록일 수 있다. 미술 작가로는 각종 미술대전에서 수상작품을 내면서 화가로 적을 두고 개인전과 그룹 단체전에 작품 발표도 꾸준히 해왔으나 전업 작가로 매달려 살지는 않는다. 

취미와 직업의 차이처럼 아마추어와 프로의 세계는 다르다. 박팔영 배우는 영화 연극 미술 관련 많은 상을 받기도 했다. 40년 넘도록 다양한 직종에서 뛰어난 활동 실적을 올리며 예술인의 재기(才氣)를 발휘해온 박팔영 배우의 다채롭고 남다른 직업 세계 이면에는 그의 인생 이야기도 특별하고 예사롭지 않은 일화들이 쌓여있을 것으로 궁금증을 불러 모은다.

2022년 늦은 가을, 가로수 은행잎이 노랗게 물든 충무로 명보아트홀에서 그를 만났다. 하루 전 조동관 감독의 영화 <무적의 2인조> 제주도 촬영장을 다녀왔다고 해서 배역을 물었더니 그 작품은 ‘분장’ 담당이라고 말했다.

소문난 인삼밭 집 아들..."금산 인삼 먹고 자랐죠"

- 머리는 은발이신데 불그레한 얼굴 피부색이 곱다.

“내가 충청남도 금산군 부리면의 소문난 인삼밭 집 아들이다. 아무나 인삼 경작을 못 하던 시절 사냥총을 들고 다니며 인삼 농가를 이끈 부농집안의 4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자랐다. 아버지가 1960년대 초에 금산 읍내에 친구분 셋이서 함께 중앙극장도 건립했다.”

- 일찍 영화에 빠질 수밖에 없는 극장 집 아들의 성장 배경이 쉽게 떠오른다. 아버지가 사냥총을 들고 다니셨다니 멋쟁이로 사신 모양이다.

“나의 어린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 한학자의 아들로 태어나 남보다 먼저 인삼 경작으로 성공해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시는 등 멋을 아는 분이셨다. 그런데 아버지의 사냥놀이는 풍류가 아니고 생업의 연장선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인삼 밭일을 힘들게 하는 많은 일꾼에게 부식 거리로 아버지는 강으로 산으로 부지런히 사냥하신 것이다. 멧돼지라도 잡아 오는 날은 동네잔치가 벌어졌다.”

배우 박팔영/사진=인터뷰365
배우 박팔영/사진=인터뷰365

- 영화 <시네마천국>같은 어린 시절의 영화 이야기로 돌려보자.

“초등학생 시절부터 영화를 보기 시작했으니 머릿속에 들어앉기 시작한 세상의 지식이 엘리자베스 테일러, 마론 브란드며 김진규 최은희 같은 배우들의 멋진 연기였다. 명배우들이 보여준 스크린 드라마의 환상 속에서 성장해 어른이 되었으니 가는 길이 영화 쪽으로 자꾸 쏠릴 수밖에 없었다.”

- 배우 직업을 결국 피할 수 없이 자연스레 맞이한 운명적인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배우가 되려면 타고난 끼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자식들의 교육을 생각한 아버지의 결정으로 서울로 이사를 왔다. 그런데 시골에서 1등을 하던 나는 서울로 오면서 성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원인은 처음 듣는 담임선생의 억센 지방 사투리를 알아듣지 못해 수업시간에 딴전을 피운 데 있었다. 중학교 입시시험이 있던 시절에 간신히 서울 금호동에 있던 대경중에 입학하고 이어서 계열 고교인 대경상고에 진학했다.

중학교 졸업 무렵은 1등급의 최상위 성적으로 복귀해 다른 명문 고교를 지망했으나 아버지가 우수한 학생들 교장의 간곡한 본교 진학 권유에 설득을 받고 포기시켰다. 상고는 당시 주산 교육이 중요했는데 나는 그 시간이 가장 싫었다. 다른 친구들이 주산에 매달려 과외수업까지 할 때 나는 내 소질에 맞고 좋아하는 미술에 빠졌다. 틈나면 그림을 그렸다.”

군대시절, 2군사령부서 초상화 담당...제대 후엔 美 분장학교 차석 조기 졸업

화가로 활동 중인 배우 박팔영. 인물크로키전, 드로우잉전 등 다수의 미술 전시회를 개최해온 그는 대한민국정수미술대전과 대한민국현대조형미술대전에서 수상한 실력있는 화가이기도 하다./사진=박팔영 제공
화가로 활동 중인 배우 박팔영. 인물크로키전, 드로우잉전 등 다수의 미술 전시회를 개최해온 그는 대한민국정수미술대전과 대한민국현대조형미술대전에서 수상한 실력있는 화가이기도 하다./사진=박팔영 제공

- 배우보다 화가의 꿈이 먼저 피어난 건가?

“아니다. 화가로 살 생각은 안 했고 감독이든 배우든 영화 쪽에서 일하고 싶었다. 중, 고 시절 동네 주변 극장들을 돌아다니며 영화는 안 빠지고 다 볼 정도였다. 대학 진학 무렵이 되어 자식이 판검사 되기를 소망했던 아버지에게 배우 되겠다는 말을 끄집어낼 수 없어서 고민하던 어느 날 중국집 고량주를 한 병을 마시고 기절한 적도 있었다.”

- 가난했던 시절의 부모들은 자식이 공부 잘해 고시 합격생이 되는 것을 최고로 생각했으니 금방 이해가 간다.

“그러다가 홍익대에서 제대로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유신반대 운동권에 휩쓸려 다니다가 블랙리스트에 올라 같은 처지의 학생들과 집단으로 입영 영장을 받고 논산훈련소로 갔다. 나는 그곳에서 미술 전공이니 박노식 배우의 얼굴을 그려보라고 요청해온 교관의 눈에 띄어 미술 주특기의 행정병으로 2군사령부에 차출된 특별한 군 생활을 하게 됐다.”

- 훈련병 그림이 군사령부까지 알려졌다면 당시 인기배우 박노식의 초상화가 대단한 걸작이었다는 얘기다.

“그것도 그림을 좋아하는 당시 군사령관이 나를 불러들인 것이다. 아마도 사령관이 예하 부대장들에게 미술 주특기의 장병을 찾던 중 나의 그림이 전달된 것으로 보였다. 훈련이 끝난 병사는 전방 근무부대를 배치받게 되는데 나는 자대 부대가 아닌 보충대 명령서를 가지고 동대구역으로 이동했을 때 사령부 소속 육군 소령이 지프차를 대기해 두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초상화를 그려보라는 과제와 함께 그림 도구를 챙겨 오라는 명분으로 10일간 특별 휴가를 주었다. 훈련 마치고 곧장 휴가를 나온 아들을 보고 아버지가 탈영한 줄 착각, 기절초풍하신 광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붓과 먹으로 완성한 배우 박팔영의 작품들. /사진=박팔영 제공
붓과 먹으로 완성한 배우 박팔영의 작품들. /사진=박팔영 제공

- 박팔영 청년의 드라마틱한 과거사다.

“나는 타임지 표지 인물로 나온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얼굴 땀구멍 하나까지 정교하게 그린 초상화를 그려 보였다. 마침내 내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란 담당관이 이번에는 직접 역대 사령관 초상화를 그려보라는 일종의 부탁 명령을 내렸다. 2군 복무 시절의 박정희 대통령 얼굴도 포함되어 있었다.”

- 2군 사령관 전속 화가로 군대 생활을 아주 특별하게 보낸 일화가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졸병이 화실을 두고 군 생활을 했으니 아주 특별한 군인으로 복무한 것이다. 그때 복무 기간이 34개월 15일이었다. 군 제대 후에 연극에 입문하고 할리우드에 있는 분장학교 명문 조. 브레스코(Joe Blasco) 인스티튜드에서 제대로 분장기술을 공부하는 시기도 있었다. 12개 과목별 수석을 가장 많이 차지했으나 총점에서 일본인 학생에게 수석이 밀려 차석으로 조기 졸업했다. 졸업작품이 영화 <작은 거인>의 더스틴 호프만 100살 얼굴 분장술인 노인 특수분장이었다. 귀국한 후 마흔에 결혼했다.”

신성일의 후배로 연기 수업

곽재용 감독의 영화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2004)에서 박팔영./사진=장면 캡처. 박팔영
곽재용 감독의 영화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2004)에서 강력계 반장 역을 맡아 전지현과 호흡을 맞춘 배우 박팔영./사진=영화 캡처. 

- 그럼 언제쯤 배우의 꿈을 실현하게 된 것인가?

“1979년 초 동아일보에 한국배우전문학원 수강생 모집 광고를 보고 입학했다. 신성일 배우가 다닌 유명한 연기학원이다. 김인걸 원장이 설립해 대학 영화연극학과의 원조 교육기관으로 길을 열었으나 그 무렵 대학에 전공학과가 사회적으로 인식을 달리하고 발전해 가면서 내가 문 닫기 전 마지막 수업을 받은 학생이다. 이곳에서 유명 감독과 배우들에게 제대로 된 실기 교육을 받았다.”

- 첫 연기 작품은?

“무대 공연 첫 경험은 졸업작품 <귀향>(차범석 작. 김완수 연출) 연극이었다. 이어서 1979년 추석 인천시민회관에서 연극 <맹진사댁 경사>에서 한인수 최길호 마흥식 김성찬 배우들과 공연했다. 곧 극단 ‘대하’소속 배우로 적을 두고 활동했지만, 연극배우로 먹고살기가 힘들어 부업으로 미술학원을 겸한 화실을 운영했다. 수입으로 보면 부업이 본업이었다.”

- 화실 운영으로 성공했던 시기에 연극인들에게 밥 잘사는 배우로 소문났다는 얘기도 따른다.

“그 소문 맞다. 기업체 과장 월급이 4, 5만 원, 부장급이 8, 9만 원 정도였다고 기억하는데 나는 월 100만 원 가까이 벌었다. 몇 달 수입이면 면목동에 기와집 한 채를 살 돈이었다. 연극 지인들과 어울려 비어홀에 가서 종업원들에게 팁 2, 3천 원씩 주면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무렵 연극도 활기를 보여주기 시작해 20여 개 극단이 등장, 여기저기 캐스팅되어 소속 극단도 떠나고 화실도 문을 닫았다. 서울연극제에서 두각을 드러냈고 주역 배우로 올라서서 3년간 <아가씨와 건달들>에 출연하고 뮤지컬의 <캬바레> 등에 출연한 것이 내 배우 인생 전반기의 분수령과 같았다.”

연극 '롤로 코스터'에서 배우 박팔영(사진 왼쪽에서 두번째)/사진=박팔영 제공<br>
연극 '롤로코스터'에서 공연 중인 배우 박팔영(사진 왼쪽에서 두번째)/사진=박팔영 제공
연극 '명품인생 백만근' 무대에서 배우 박팔영/사진=박팔영 제공

- 극단을 창단해 제작에도 성공한 때가 있지 않았는가?

“미국서 구상하고 준비해온 작품을 직접 제작하기 위해 1994년 ‘공연예술창작실험실’을 창단했다. 희곡이지만 영화로 만들어졌던 쥴리아 로버츠의 <귀여운 여인>을 연극 <부킹>으로 무대에 올려 당시 1억 2천만 원을 벌기도 했다. 강북에서 중급 아파트가 7, 8천만 원 할 때이니 대단한 수입이지만 IMF 때 공연장도 서리를 맞아 망했다.

연극으로 돈을 번다는 생각은 허망한 꿈이다. 어쩌다 성공하지만, 후속 작품을 이어가지 못하면 다시 빈손으로 도전해야 한다. 그러다가 1997년 8월 경북 구미로 이사를 가게 됐다.”

- 금산과 서울에서만 살아온 분이 구미라니.

“처가가 구미에 있다. 그곳에 매물로 나와 있는 제법 큰 주택이 있었다. 서울서 살러 온 노부부가 1여 년 만에 동시에 세상을 떠난 뒤 흉가로 소문나 장기간 비어 있던 그 집을 인수해 예쁜 전원주택으로 리모델링해서 살았다. 5살짜리 아이를 키우며 아주 평화롭고 조용하게 살면서 구미를 비롯해 대구 포항 등지를 무대로 공연작품을 기획하고 연출했다.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오이디푸스 그것은 인간> <문제적 인간 연산> 등이 당시 연출작업을 한 화제작들이고 연기상과 연출상을 비롯 국제연극제에서 대상을 거머쥔 성과도 있었다.

주크박스 뮤지컬 '잣골 노래방 콩쿠르' 연출가로 활약한 박팔영(사진 앞줄 맨 오른쪽)/사진=박팔영 제공
주크박스 뮤지컬 '잣골 노래방 콩쿠르' 연출가로 활약한 박팔영(사진 앞줄 맨 오른쪽)/사진=박팔영 제공

- 연극 제작이나 연출, 연기 활동을 통해 보고 느낀 자신만의 독창적인 공연철학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나는 연극이든 뮤지컬이든 무대에 올리는 공연예술을 ‘빛과 소리와 오브제(objet)’의 3요소를 기반으로 기획하고 연출한다. 엄청난 물량의 세트며 출연 배우의 양적 공연에 치중하면 극단을 유지할 수 없다. 리얼리즘의 극대화와 표현주의를 통한 공연무대의 설치미술은 소품, 소도구의 활용인 오브제에 비중을 둔다. 물량적인 무대 장치는 관객의 상상력을 오히려 차단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내가 희곡에서부터 연출, 제작한 <명동부루스> 금산 역사 뮤지컬<칠백의 용> 등이 모두 그런 나의 공연철학을 반영해 성공한 작품들이다.”

뮤지컬 스타 김무열, 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 발굴

- <명동부루스>에 등장한 신인 배우 김무열은 지금 뮤지컬 무대의 대표적인 주역 중의 한 사람이다. 2009년 제15회 한국뮤지컬대상 남우주연상을 받아 정점의 뮤지컬 배우로 성장했다.

“당시 그는 안양예고를 나와 대학에 진학하기 전이었다. 뮤지컬 분야의 음악감독으로 역량을 보여주고 있는 박칼린도 부산 지역 연극 단역배우로 활동할 때 셰익스피어 비극 <맥베스>에서 만나게 되어 1992년 뮤지컬 전문극단으로 창단하여 <명성황후><영웅>으로 이름을 떨친 극단 <에이콤> 대표 윤호진 연출가에게 그녀를 추천했다. <아가씨와 건달들> <겨울나그네> <맘마미아>로 이어지면서 그의 인기도 수직 상승했다. 나는 자칭 타칭 전국구라고 한다. 지역 불문 오라는 곳이 많아 신인급 배우를 차출해서 중앙 무대에 세웠다. 그들은 오늘날 성공한 배우로 잘살고 있다.”

분장실 현장. 배우 분장 중인 박팔영/사진=박팔영 제공
분장실 현장. 배우 분장 중인 박팔영/사진=박팔영 제공
분장을 마치고 배우들과 함께한 박팔영 
배우들과 함께한 박팔영/사진=박팔영 제공

- 이제 또 다른 전문 분야인 분장 쪽의 활동 얘기를 듣고 싶다.

“배우의 분장은 작품 속 인물의 성격 나이 신분과 주어진 배역에 따라 천의 얼굴로 변신시키는 일종의 기술과 이미지 창조가 필요한 미술 작업이다. 캐릭터를 제대로 파악하고 배우의 얼굴 구조를 변형시키는 설계가 아주 미세한 숨구멍 부문까지 분장사가 파악을 해야 하는 작업이다. 단순한 메이크업 분야하고는 다르다. 창의성과 예술성이 필요한 직업이지만 이 직업이 돈벌이가 안 되는 직종이라 제대로 교육을 받은 후배들이 드물어 지금도 바쁘게 산다.

박팔영은
인터뷰 하루 전 분장사로 참여한 영화 '무적의 2인조'의 작업을 위해 제주도 촬영장을 다녀왔다는 그는 여전히 다방면의 예술인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박팔영은 "배우로 2모작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지가 지금의 과제"라고 말했다. 인터뷰가 끝난 후 그는 다시 어깨에 배낭을 맸다. 돌아가는 그의 발걸음이 힘차보였다./사진=인터뷰365

- 40년 넘는 다양한 직종의 예술인으로 산 스스로의 인생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

“모두 대가나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한 일은 없다. 내가 좋아서 찾아다니고 뛰어다니며 일을 했으니 내 인생의 프로그램은 소풍 길 위에서 이루어져 즐거운 놀이 시간이었다.

전공 분야인 그림도 나의 작업 가운데 빼 놓을 수 없는 소중한 일이다. 나는 살아오면서 만나게 된 연극인과 지인들을 먹으로 그린 얼굴 크로키 작품이 얼마나 되는지 셀 수가 없다. 그러나 현재 가지고 있는 자료는 2000명 가까이 된다. 이것을 활용하여 콜라주(collage)와 드로잉의 작품을 만든다. 요즘도 나만 보면 얼굴 그려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틈만 나면 고향 집이 있는 금산에 가는 것도 나의 인생에 중요한 흔적이 될 것이다. 그 공간은 나의 창작 산실로 그림을 그리고 내 연극에 희곡을 쓰게 된다. 연극 불모지인 고향 금산에 연극의 토양을 가꾸어 가는 것도 여러 가지로 여건은 힘들지만 즐거운 일이다.

내가 하는 여러 가지가 욕심이 많아서도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도 아니다. 정말 돈을 많이 벌겠다고 나섰다면 아마 벌었을 것이다. 그러나 난 내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일을 노력하고 꾸준히 자연스레 하고 있을 뿐 별 욕심 없다. 배우로는 이제 아무 역이나 하는 시기는 지나갔다. 사랑을 할 수 있는 님을 막연히 동경하며 살듯이 내 몸에 맞는 역할을 만나고 싶은 기다림은 변하지 않고 있다.

결국, 나는 많은 직종 중 배우가 주종의 직업이다. 배우로 2모작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지가 지금의 과제다.”

 

◆ 박팔영 활동 경력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동양화과 석사 

- 한국문예진흥예술원 해외연수자 선정(1992), 미국 Joe Blasco make-up school 졸업(1994), 중국 사회보장부(人力資源和 社會保障部 ) 침구전문학교 졸업(2008)

- (2022년 말 현재) (사)한국생활연극협회 종로지부장, 한국연극협회원, 서울연극협회원, 한국연극배우협회원, 예총문인협회원, 홍익K아트회원. 홍이랑회장

- 수상 경력

제19회 대한민국연극제 특수부분 분장상(1990), 연극영화의해 사랑의 연극잔치 최우수분장상(1991), 자랑스런 금산인상(1997), 한국연극배우협회 공로상(2002), 한국연극배우협회 배우상(2013), 대한민국연극대상 연기상(2013), 대한민국환경문화대상 연극연출상(2014), 한국생활연극 분장상(2018), 대한민국정수미술대전 장려상(2019), 대한민국현대조형미술대전 특선(2019), 한국연출가협회 공로상(2019), 한국생활연극대상 희곡상(2021)

-  출연 작품

<연극>

'맹진사댁경사'로 연극입문(1979), '미궁'(1981), '착한사람'(1982),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1985), 뮤지컬 '카바레'(1986), '맥배드'(1988), '1월16일 밤에 생긴일'(1990), '뉴욕에사는 챠이나맨의 하루'(1991), '어떤사람도 사라지지 않는다.'(1994), '베니스의 상인'(1995), '갈매기'(2000), '레미제라블'(2011), '그것은 목탁구멍속의 작은어둠이었습니다'(2014), '명품인생 백만근'(2018), '고향마을'(2020), '롤러코스터'(2020), '악극 꿈에 본 내고향'(2022), '피고지고 피고지고'(2022) 외

<영화>

'이중간첩', '잘살아보세', '광식이 동생 광태', '분홍신', '한반도', '내 여자 친구를 소개합니다', '감기', '연가시화장', '판도라', '더 킹', '헬로 시스터즈', '쫑마리', '가을 벚꽃 산책' 외

<TV 드라마>

'인생화보', '백만송이 장미', '노란 손수건', '굳세어라 금순아', '하얀 거짓말', '사랑하기 좋은날', '인형왕후의 남자', '상어', '화려한 유혹', '용팔이', ' 태양의 후예', 'the k2', '빅 이슈(sbs)' 외

- 연극 연출 작품

'상계동173번지'(1986), '여덟명의 여자들'(1989), '희한한 커플'(1990), '1월16일 밤에 생긴일'(1991), '해마'(1992), '부킹'(1994), '폰킹'(1995), '연인과 타인'(1995), '맹진사댁 경사'(1996),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1997), '문제적 인간 연산'(1998), '동승'(1998), '세일즈맨의 죽음'(1999), '해가지면 달이뜨고'(1999), '옥수동에 서면 압구정동이 보인다'(2000), '오이디프스 그것은 인간'(2000), '산.씻.김.'(2001), '가요 뮤지컬 명동블루스'(2004), '가라'(2006), '어머니가 가르쳐 준 노래'(2014), '종로구 이화동'(2015), '가요극 잣골노래방 콩쿠르'(2016), '창작 뮤지컬 700의 용'(2017), '무수리 남편'(2019), '할매들의 수다'(2021), '청춘 꽃 할매'(2021), '잣골 노래방 콩쿠르'(2022) 외

- 희곡 작품

'명동블루스'(2004), '가라'(2006), '결혼하는거야'(2014), '종로구 이화동'(2015), '잣골노래방 콩쿠르'(2016), '700의 용'(2017), '비단골 노래방 콩쿠르'(2018), '중도리 사람들'(2019), '무수리 남편'(2020), '할매들의 수다'(2021), '강처사 의 꿈'(2021), '청춘 꽃 할매'(2021), '꽃 당신'(2022) 외

- 분장 작품

'맥베드', '로미오와 쥬리엣', '오셀로', '햄릿', '갈매기', '벚꽃동산', '동지섣달 꽃 본 듯이', '산불', '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 '혈맥', '맹진사댁 경사', '출세기', '두 영웅', '반민특위', '로믈러스 대제', '노부인의 방문', '오이디푸스', '함흥 차사', '꿈에 본 내고향', 뮤지컬 '경로당 폰팅사건' 외

- 미술 전시회

'인물크로키전'(2013), '인물크로키전'(2014), '제16회 대전 드로우잉전'(2015), '박팔영 크로키초대전'(2016), '제17회 대전 드로우잉전'(2016), '제18회 대전 드로우잉전'(2017), '박팔영 인물크로키전'(2017), '제19회 대전 드로우잉전'(2018), '제20회 대전드로잉전'(2019), '박팔영展 · illusion'(2019), '대한민국현대조형미술대전'(2019), '대한민국정수미술대전'(2019), '제20회 대전드로우잉전'(2020), '제6회 대한민국연극제'(2020), '홍익대학원 석사학위 청구전'(2021), '어울림전 초대작가'(2021), '제21회 대전드로우잉전'(2021), '제22회 대전드로우잉전'(2022), 'SAF! 22 서해 아트 페어'(2022), '홍익K아트 창립 전시회'(2022)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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