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호가 만난 人] '트롯 원조' 하춘화, 60년 멈추지 않은 활동 비화
[김두호가 만난 人] '트롯 원조' 하춘화, 60년 멈추지 않은 활동 비화
  • 김두호 인터뷰어
  • 승인 2022.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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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 어느 때든 무대에 오를 준비 된 가수로 살다"
- 6살 천재가수로 이름을 알린 후 60여 년간 톱 가수로 살아온 ‘트롯의 대모’
- 61년 간 공백기 없이 바쁘게 활동해온 열혈 가수
6살에 천재적인 가수로 주목 받은 후 60여 년간 2500곡을 발표한 '트롯 대모' 하춘화. 61년째 한 번도 공백기 없이 활동해온 트롯의 슈퍼스타다. 평생 기부를 이어온 '선행 가수'로도 잘 알려진 그는 지난 10월 ‘아름다운예술인상’ 굿피플예술인 부문 대상을 받기도 했다./사진=하춘화 제공  

인터뷰365 김두호 인터뷰어 = ‘귀하(하춘화)는 6살에 천재적인 가창력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해 1961년 <효녀심청 되오리다>를 발표하고 이어서 <잘했군 잘했어> <영암아리랑> <항구의 여자>, 2018년에 발표한 <마산항엔 비가 내린다>까지 60여 년간 2,500곡을 발표하며 활동해온 한편, 일생을 두고 실천해온 기부활동은 대표적인 선행 예술인의 모범과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귀하가 일생동안 보여주신 기부정신의 선행을 자랑스러운 예술인으로서의 덕목으로 기리며 아름다운 예술인상을 드립니다.‘

지난 10월 20일 신영균예술문화재단에서 개최한 제12회 ‘아름다운예술인상’시상 행사에서 굿피플예술인 부문 대상을 받은 하춘화 가수의 대리석 상패에 새겨진 내용 전문이다.

2022년으로 61년째 한 번도 공백기 없이 활동해온 트롯의 슈퍼스타 하춘화(1955 ∼ ) 가수는 여전히 현역이다. 그의 활동 발자취에는 ‘콘서트’의 원조인 극장 쇼 공연시대의 화려한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놀랍게도 큰 눈동자에 주름 없는 얼굴, 맑은 목소리와 날씬한 신체도 세월이 비켜간 듯 ‘젊은 하춘화’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국민가수의 호칭이 따른 지도 오래된다. 무대 공연기록이 세계 신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때가 1991년이다.

필자가 기자로 그녀를 만나 기사를 쓰기 시작한 지도 40년이 지나갔다. 그럼에도 예나 지금이나 지치지도, 변하지도 않고 젊은 기운과 열정을 유지하며 현역으로 활동할 수 있는 비결은 도대체 무엇일까? 거리마다 은행나무 단풍이 춤추며 하염없이 떨어지는 날에 올해의 아름다운예술인상 굿피플상을 받고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핀 인연 깊은 ‘트롯의 대모’ 하춘화 가수를 만났다.

하춘화 가수./사진=인터뷰365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그는 적어도 열 번 쯤 2019년에 사별한 아버지 (하종오 씨)에 대한 애틋한 ‘사부곡(思父曲)’의 심경을 드러냈다. 단 하루도 잊지 못하고 아버지와 나눈 추억 속에서 산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평생을 두고 딸에게 매니저를 겸해 따뜻한 마음의 둥지가 되어 준 분이다. 그래서 아버지가 생전에 알던 기자의 인터뷰도 특별하게 받아들였다.

나는 평생 일 중독자다

가수 하춘화. 그는 언제든지 바로 공연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일상생활을 한다고 말했다./사진=하춘화 제공  

- 참으로 오랜만에 만났는데 변하지 않았다. 20여 년 전 모습 그대로다.

"나이를 잊어버리고 산다. 공연 활동이 과거 같지는 않지만 초청하는 곳 많고 참석하고 만나야할 사람 많아 하루가 늘 분주하다. 늙을 틈이 없이 시간가는 줄,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바쁘게 열심히 살아서 그렇다. 이제 체력 유지를 위한 운동도 열심히 하며 일과를 마치면 보통 밤 12시에 잠자리에 들고 새벽 6시에 꼭 일어난다."

- 바쁘면 심신이 지칠 수 있고 스트레스도 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몸도 마음도 즐겁게 젊게 사는 비결이 바쁘게 사는 덕분인가?

"지난 해 연초에 세종문화회관에서 데뷔 60주년 기념공연을 좀 거창하게 준비했다가 코로나 사태로 취소했다. 올 연말에는 서울 부산 대구 남해에서 디너쇼를 준비하고 있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활동하면서 자타가 인정하는 일 중독자로 살아왔다.

군인들이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을 염두에 두고 상시 출전준비를 하고 있듯이 나도 언제든지 바로 공연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일상생활을 해 스스로 ‘준비된 가수’라고 생각 할 때가 많다. 모든 직종의 직업인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가로 다른 사람보다 더 인정을 받으려면 최선의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인데 가수라고 다를 게 없다."

‘리사이틀의 여왕’으로 군림해온 가수 하춘화/사진=하춘화 제공 

- 평생 ‘준비된 가수’로 살게 되면 공연 스케쥴이 없어도 편안한 휴식감을 못 느끼고 긴장 속에서 살아야 한다. 또 스스로를 ‘일 중독자’로 단정할 만큼 오르지 일에 몰두하며 살았다면 오히려 일찍 남보다 더 늙을 수도 있는데 그 반대 현상을 보여주니 그런 점에서 남다르다.

"나는 6살에 무대에 올라 7살에 보통 가수들도 채우지 못하는 독집 음반을 발표하고 ‘리사이틀의 여왕’소리를 들어가며 공연활동을 해왔다. 아버지가 나에게 일찍부터 일깨워 준 인생관이 노력하는 삶이다. 노력한 만큼 결실을 거두고 빛을 낼 수 있으니 요행을 바라고 일을 하면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6살 천재가수 시절의 하춘화
6살 천재가수 시절의 가수 하춘화/사진=하춘화 제공  
6살 천재가수 시절의 하춘화
6살 천재가수 시절의 가수 하춘화/사진=하춘화 제공 

- 공백기나 은퇴란 말이 나온 적 없이 가수활동 60년을 지탱해준 에너지는 결국 노력을 실천해온 데서 비롯되었다는 말인 데 지극히 뻔한 동서고금의 교훈적인 말이지만 역시 노력만이 성공의 길잡이라는 성취 인물의 한마디가 실감나게 느껴진다. 언젠가 고향인 전남 영암에 한국트롯가요센터가 건립되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영원한 디바 가수 하춘화의 고향’이라는 제목이 달린 기사도 있었다.

"2층에 나의 가요 60년을 소개한 기념관도 마련해주었다. 물론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수들을 고루 소개한 기념관이다. 마음 아픈 건 아버지가 개관하기 직전인 2019년 7월 8일 별세하셨다.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생각만 해도 마음 아프다. 석 달을 기다리지 못하시고."

- 아버지가 살아계신다면 연세가 얼마신지?

"104세. 올해 101살 되신 어머님(김채임)은 살아 계신다. 요양병원에서 건강관리를 해드리고 있다. 내가 모실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아버지 하종오와 젊은 시절의 부녀. 하춘화는 2019년에 사별한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사부곡(思父曲)’의 심경을 드러냈다. 아버지는 평생을 두고 딸에게 매니저를 겸해 따뜻한 마음의 둥지가 되어 준 분이다./사진=하춘화 제공  

-61년 동안 가수로 살아오는 동안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을 떠 올린다면?

(그는 여기서 머뭇거리지 않고 금방 말문을 열었다.)

"1974년 하이 틴 시절 서울 아세아극장에서 지금은 콘서트로 일컫는 첫 ‘하춘화 쇼’를 개최했을 때 줄 서 있는 관객들을 보고 깜짝 놀랐던 순간이다. 나의 노래를 듣기 위해 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열광하는 광경이 신기하게 보이기도 하고 두려웠다. 가까이에 있던 상가 연결 다리가 무너진다고 난리를 치던 목소리도 잊을 수가 없다."

구름관객이 모여든 하춘화의 극장 콘서트. 관객동원의 유례드문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974년 관객이 구름처럼 모여든 가수 하춘화의 극장 콘서트. 공연 5일간 3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유례 드문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사진=하춘화 제공 

-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아마도 신문에서 공연 5일간 3만 명이 운집했다고 보도한 것 같다."

- 기자생활을 하는 동안 ‘가수 하춘화’하면 함께 떠오르는 사건이 있다. 1977년 이리(익산)역 열차 폭발사고 때 가까운 극장에서 공연 중에 고(故) 이주일 코미디언이 하춘화 가수를 등에 업고 탈출했다는 뉴스가 화제에 올랐었다. 그때 무명의 이주일이 중년기에 슈퍼스타로 떠오른 데는 하춘화 가수가 배경이 되었다는 얘기도 따라 다녔다.

"40대 늦은 나이에 크게 성공했던 이주일 코미디언은 무엇보다 그 자신의 타고난 재능 덕분이었다. 다만 길잡이가 된 것은 내가 소속된 회사가 무명에서 스타로 빛을 보도록 방송 출연의 기회를 만들어준 배경은 있었다.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 마음 아프다."

고 이주일 희극인과 쇼공연 무대에서
고(故) 이주일 희극인과 쇼공연 무대에서/사진=하춘화 제공  

- 오래도록 공연활동을 하는 동안 주변에는 일과 삶에서 변함없이 오래도록 정을 나누며 산 인연들도 많을 것이다.

"된장과 사람의 관계는 오래될수록 맛이 깊고 향기롭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정든 분들이 한분 두분 떠나신다. 송해 선생님은 그야말로 아버지 같은 분이다. 무선 마이크가 없던 시절 어린 내가 공연을 할 때면 스탠드 마이크를 들고 입 가까이 맞춰주던 분이었다. 서초동 인근에 사셨는데 내가 생신 때 대접을 하면 너무 행복해 하셨다. 아버지처럼 생각하며 지낸 사이였다."

- 가요계 나이든 분들은 대다수 아버지 하종오 씨와 친분을 나눈 기억을 갖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하종오 부친을 생각하며 생전에 가깝게 지낸 가요기자 출신 KBS ‘가요무대’의 원형걸 원로작가와 전화로 안부를 나누기도 했다)

"1960년대부터 활동한 가요기자들은 모두 아버지의 친구 분들이다. 또 아버지는 생전에 <울고 넘는 박달재> <단장의 미아리고개> 등 수많은 히트곡을 만든 반야월 작곡, 작사가와 가장 가깝게 지냈다. 내가 고봉산 가수와 부른 <잘했군 잘했어>도 그분이 만든 노래였다."

필자와 가수 하춘화. 필자가 그녀를 만나 기사를 쓰기 시작한 지도 40년이 지나갔다. 필자는 그녀의 부친인 고(故)하종오 씨와도 친분이 있었으니, 2대에 이어 인연을 맺어온 셈이다./사진=인터뷰365

- 오래전부터 가수 중에 골프 실력이 프로급이라는 소문도 따랐다.

"29살에 시작해 싱글까지 점수를 유지할 때가 있었지만 오래전에 운동 횟수도 줄이고 또 코로나 사태와 함께 이제는 가끔 즐기는 운동이 되었다. 오히려 여행을 즐기는 것이 취미생활이 되고 있다."

- 6살 소녀시절부터 오르지 한길로 ‘가수의 일생’을 보낸 삶에 대해 스스로는 어떻게 평가하는 지, 성취감과 함께 아쉬움이나 후회는 없는 지 ‘하춘화의 인생’을 함축해서 정리해 달라.

"나이가 들면서 공연 횟수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나의 공연활동은 언제나 내 스스로에게 성취감의 기쁨을 안겨주었다. 객석의 박수소리와 환호소리를 들으면서 혼자 2시간 공연을 이끌어 갈 때는 언제나 내가 한 마리의 새가 되어 팬들의 뜨거운 시선에 실려 날아다니는 희열감을 느끼며 살았다.

나는 왕년에 누구였다, 과거 내가 누구인데 하고 지난 세월에 매달려 사는 사람들을 가장 우습게 생각한다. 내 스스로 과거의 하춘화가 어떤 인기를 누렸는지를 과시한 적이 없다. 그저 지금의 하춘화로 최선을 다해 노래를 하며 지금관객들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 준비된 가수로 살고 있다. 아쉬움? 후회? 내 인생에서 그런 생각을 깊이 해 본적이 없다. 그저 불만 없이 살아왔다. 현재도 앞으로도 무리하지 않게 주어진 여건의 분수를 지키며 열심히 사는 것이 지금의 내 인생의 목표이다."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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