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김아라 연출이 야외극으로 펼쳐낸 피터 한트케의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
[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김아라 연출이 야외극으로 펼쳐낸 피터 한트케의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
  • 정중헌
  • 승인 2021.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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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로 지친 우리가 다시 만나고 보듬자는 주제의 화합과 위로의 무언극
김아라 연출의 무언극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 장면./사진=극단무천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페터 한트케의 희곡을 김아라가 연출한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은 2시간 동안 19명의 배우들이 걷기만 하는 무언극이다. 인간의 소통 수단인 말은커녕 의성어조차 내지 않고 광장으로 설정된 무대에서 걷고, 뛰고, 넘어지고, 춤추고, 일하고, 삶과 죽음을 보여주며 또 걷고...

엄청 화가 치밀었을 때 두 시간을 걷다 보면 마음이 풀리는 체험은 했지만, 김아라 연출의 이 무언극은 2시간 동안 걷기를 반복하며 무엇을 보여주려는지 그 핵심을 짚어내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2019년데 이어 두 번째 보면서 작품에 대한 이해는 반경이 넓어졌다.

2019년 서강대 메리홀 공연은 실내였는데 이번엔 마포의 석유비축기지를 재생한 문화비축기지 T2 야외극장에서 공연(8월 14~22일)했다.

처음 접한 문화비축기지는 서울에 이런 좋은 공간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방대했고, 숲으로 둘러싸인 야외무대는 넓고 기능적이어서 이 작품의 배경인 광장을 재현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그것도 석양이 잦아드는 7시 30분 개막은 한여름 밤의 꿈처럼 절묘하고 환상적이었다.

여기에 도나정(무대미술, 이미지 오브제), 신나라(음악감독, 작곡), 김태은(영상), 김영빈(조명) 등 쟁쟁한 스탭들이 참여해 야외무대다운 무대술과 볼거리, 특히 밤안개 같은 아우라까지 체감케 했다. 숲을 배경으로 떠오른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와 인물 영상은 심야공연의 묘미를 한 것 느끼게 해주었다. 박호빈의 안무는 여전히 돋보였고, 의상의 최원과 일상 오브제를 담당한 이강래는 복잡한 작업을 원활하게 해냈다.

무언극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 장면./사진=극단무천

이보다 더 신선한 것은 출연진을 강화한 김아라 연출의 용병술이다. 광장의 노숙자이자 관찰자인 주인공 거지 역은 확고부동환 정동환이고 국립극단 출신의 원로배우 권성덕도 고정이었다.

여기에 노역의 재주꾼 정재진, 대학로 연기파 배우들인 정혜승, 김선화, 곽수정을 비롯해 이영숙, 이유정, 장재승, 임소영, 권로, 박진영, 문혜주, 이동준, 김태완, 홍준기, 서보성, 김재형 등 젊은 배우들을 포진시켜 실내 때보다 스케일이 한결 크고 에피소드도 풍부한 앙상블을 이뤄냈다. 초연 때보다 다양한 연령대의 배우 조합으로 무대에 활력을 주었고 작품의 퀄리티도 한차원 끌어올렸다.

80을 넘긴 노배우 권성덕이 때로는 무거운 짐을 지고, 때로는 젊은이 등에 업혀 광장을 지나는 것만으로도 공기가 달랐다고 하면 과장일까. 숱한 인간 군상이 오가는 광장에서 구부정한 노인의 실루엣이 보여준 기시감은 뭐라 표현하기 어려웠다.

페터 한트케의 광장을 김아라 연출이 문화비축기지 야외무대로 옮긴 이 작품에서 정동환의 존재감은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공연 처음부터 끝까지 광장을 배회하거나 한편에 쪼그려 앉아 연인원 450여명이 오가는 행인들을 지켜본다는 것은 열정 연기를 펼치기 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0대 배우 정동환은 관객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관극에 거슬리지도 않으면서 행인들과 눈을 마주치고 관찰하며 사색했다.

클라이맥스에서 ‘베를린 천사의 시’에 나오는 천사의 날개를 달고 나와 광장을 떠도는 고독하고 상처받은 영혼들을 보듬는 그의 모습은 성자를 방불케했다. 김아라 연출이 강조한 의식의 흐름까지는 읽어내지 못했지만 관조하는 연기는 경지에 도달한 듯 보였다. 최근 몇 년간 정동환 배우의 출연작을 섭렵하며 이 배우야말로 구도자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번 무대에서 그 진가를 다시 확인한 것이다.

무언극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 장면./사진=극단무천

이 연극에서 정재진 배우는 특히 부지런하고 활동 폭이 넓어 보였다. 청소부로 세상의 쓰레기들을 쓸어내고 메마른 광장에 물을 뿌리는가 하면 틈을 비집고 행인으로 걷는 그의 모습에 연민이 느껴졌다. 일일이 기술할 순 없지만 정혜승, 김선화, 곽수정 등 출연 배우들은 저마다의 미션과 개성 연출로 존재감을 과시했다.

두 번을 보고 나서야 이 작품의 윤곽과 주제가 어렴풋이 잡혔다.

이 무언극은 길 위에서 펼쳐지는 어느 하루의 찰나를 보여준다. 한트케의 작품을 서구에서는 어떻게 연출했는지 알 수 없지만, 김아라 연출은 올여름 죽산의 야외에서 연습 또 연습으로 폭염을 견다며 120분의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처음 접한 관객들은 쉴새없이 광장을 오가는 행인들을 보며 이게 무슨 연극인가 할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연인원 450여명 인물들의 직업과 복장은 물론 행동의 특성과 이미지까지 세밀히 미션을 주고 이를 일사불란하게 돌아가도록 숙달시키는 지난한 작업을 뚝심으로 해낸 것이다.

2019년 공연에서는 그 많은 등장인물 중 성서 속 모세와 아브라함, 영화 천재 찰리 채플린과 벌거벗은 남자 정도를 발견했는데, 이번에는 성폭력 피해자 같기도 한 소녀, 발레리나, 묶인 죄수, 스튜어디스, 노동자, 식당 종업원, 군인, 청소부 등 다양한 캐릭터를 찾아냈다. 이처럼 광장을 오가는 행인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아라 연출의 무언극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 장면./사진=극단무천

김아라 연출은 소통이 힘든 장벽을 광장의 블록으로 제어하고, 미로와 같은 수많은 길 속에 등장인물 마다의 에피소드들을 펼쳐냈다. 전반부는 답답하리만큼 전개가 느리지만 후반부로 가면서 장벽이 무너지고 서로 마음을 나누는 장면들을 무언극으로 연출해 관객들은 마임을 보듯 줄거리를 읽어낼 수 있었다.

이 작품의 주제는 화합과 화해라고 했다. 우리는 오늘도 광장에서 또는 길 위에서 수 많은 사람들과 스치면서도 방관한 채 습관적으로 걷기만 한다. 작가는 서로 스쳐 지난 시간을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으로 설정하고, 그 무의미함을 ‘알 수 있었던 시간’으로 변환시켜 서로 알고 보듬어 주는 시간을 함께 만들어가자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극의 말미에 사람들은 광장으로 모여들어 서로 발견하고 바라보고 만지고 만난다.

야외에서 커튼콜 하는 배우들.
무언극 ‘우리가 서로 알 수 없었던 시간’ 공연이 끝난 후 야외에서 커튼콜 하는 배우들./사진=정중헌

페터 한트케가 지향한 ‘인간에 대한 경이와 위로’가 다 표현되고 전달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김아라 연출이 야외무대에서 펼친 이 무언의 걷는 연극은 우리를 다시 돌아보고 인간 본성을 찾자는 울림은 전했다고 생각한다.

코로나 팬데믹은 거리두기가 시사하듯 세상을 비대면으로 바꿔버려 사람들은 정서적 고갈을 뛰어넘어 심리적 불안을 겪고 있다. 이런 점에서 다시 본 페터 한트케 작, 김아라 연출의 ‘우리가 알 수 없었던 시간’의 공연은 시의에 적절했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인간성 회복이란 진한 메시지를 상기시켰다고 할 수 있다.

사족 같지만 관객들이 딱딱한 의자에 앉아 말을 안하고 걷기만 하는 배우들을 보며 견디는 심리적 한계는 계산했어야 한다고 본다. 클라이맥스를 넘어 10여 분 지속되는 무대는 몸이 뒤틀릴만큼 갑갑하게 느껴졌다. 다행히 이런 불만은 커튼콜 대신 극장 밖에 늘어선 배우들의 전송으로 해소되긴 했지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원을 받아 공들여 제작하고 문화비축기지 야외에서 펼친 퀄리티 높은 공연에 관객을 70명으로 제한한 현실은 안타깝기만 했다.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현재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정중헌
정중헌
joonghunchu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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