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배우 차유경, 온 몸 던져 위안부 악몽을 연기하다
[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배우 차유경, 온 몸 던져 위안부 악몽을 연기하다
  •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승인 2021.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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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숨 원작, 손정우 연출 '한 명'에서 역사의 실상 절절하게 증언
연극 '한 명'/사진=유목민
연극 '한 명'/사진=유목민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극단 유목민이 중장기 창작지원 세 번째 작품으로 대학로 알과핵 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한 명’(9월 19일까지)에서 배우 차유경이 연기 생활 30여 년을 쏟아붓듯 열연을 펼쳤다.

김숨 작가의 소설을 국민성 각색, 손정우 연출로 무대에 올린 이 연극은 ‘차유경의 모노드라마’라고 할만큼 배역의 비중이 컸고, 회갑을 맞은 그는 90분간 1인 2역의 대장정의 연기를 펼쳐냈다.

김숨 작가는 “피해를 증언할 수 있는 위안부 할머니가 한 명밖에 남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신고하지 않고, 등록도 하지 않은 채 침묵 속에 살아온 ‘그녀’를 내세워 가해자의 잔혹성과 피해자의 내상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재구성하여 여러 문학상을 받았다.

필자는 소설을 읽지 못했으나 문학과 연극은 표현 방식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문학으로는 디테일을 형상화할 수 있으나, 연극은 구체적 상황을 움직임과 상황으로 입체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여러 면에서 손정우 연출이 고심한 흔적이 배어있다. 철제 세트를 중앙에 배치한 전작과 달리, 목재로 얼기설기 엮은 세트(무대 민병구)로 3면을 에워싸 위안부 수용소의 이미지를 극대화하면서 전면의 너른 공간을 배우들의 동선으로 활용해 관객의 시야를 넓혔다.

연극 '한 명'/사진=유목민
연극 '한 명'/사진=유목민

무대는 흡사 희미한 불빛만이 흐르는 끝없는 터널을 연상케 했다. 지옥 같은 동굴에서 시작해 터널로 이어지는 시공간들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기억과 아물지 않은 상흔으로 얼룩져 있다.

위안부의 고통을 다룬 연극이다 보니 출구가 보이지 않는 그 긴 터널의 상황을 지켜보는 관객들 또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기억의 진실이, 고통의 무게가 관객에게 진정성 있게 다가오면 암흑 그 이상도 관객은 기꺼이 수용할 수 있다.

차유경 배우는 이 버거운 책무를 그동안 다져온 무대 경륜과 특기인 정확한 발성, 그리고 마임을 보는 듯 한 디테일한 몸 연기와 강약의 유연성으로 그의 배우 인생 통틀어 빛나는 결정체를 이뤄냈다.

필자는 1970년대 후반 극단 실험극장 무대에 샛별처럼 등장한 차유경의 신선한 매력과 함께 가능성을 예견했다. 그는 2000년 대 이후 ‘에쿠우스’, ‘궁전의 여인들’, ‘유리동물원’을 거쳐 ‘늙은부부 이야기’로 전성기를 건너뛰나 했더니 이번에 ‘최후의 위안부’라는 큰 역을 맡아 “기억의 고통 속으로 휘몰아치는 혼신의 열연”으로 자신의 연기 인생에 기념비를 세웠다.

연극 속 ‘그녀’는 위안부 피해자 임에도 불구하고 수치스러워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평생 잠 한 번 제대로 자지 못하고’ 어둠 속에 살아왔다. 신문에서 위안부 피해자가 단 한 명 남았다는 기사를 접한 그녀는 아직 한 명이 더 남아있다는 것을 알려야 할까 말까로 갈등한다. 그 갈등은 73년을 쥐죽은 듯 살아온 그녀를 기억의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다.

연극 '한 명'/사진=유목민
연극 '한 명'/사진=유목민

차유경은 조카에게 조차 내몰리는 현실 속의 ‘그녀’와 만주 위안부 수용소에서 겪은 고통 속의 기억을 반추하는 과거 속의 ‘그녀’를 연기해야 했다. 노련한 배우도 어려운 이 역할을 차 배우는 말투와 행동으로 그 차이를 보여주고자 노력했지만 객석에서 볼 때 그 경계가 선명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차유경 배우는 이 연극의 하이라이트인 소녀 시절 위안부의 고통을 연기하는 대목에서 활화산처럼 연기가 폭발했고, 기억의 고비마다 온 몸으로 그 고통의 기억들을 형상화해내 관객의 숨을 멈추게 할 정도였다.

특히 열 명의 일본군이 차례로 위안소로 들어와 만신창이가 된 자신을 육체적 정신적으로 짓밟는 위안부의 아린 고통을 각기 다른 몸짓과 절규로 차별화하며 극한으로 치닫는 연기는 연극 ‘한 명‘의 백미였다.

과거의 생생한 고통과 현실에서 그를 기억하는 고통의 차이와 강도를 달리 표현한다는 것은 지극히 힘든 일이다. 나이 60의 차유경 배우가 절정기의 에너지로 그 수많은 고통의 무게를 정확한 화술과 몸의 다양한 움직임으로 차별화해낸 점은 칭찬할 만하다.

물론 그의 선연한 연기가 그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뤄지지 않았다고 본다. 각색(국민성)과 드라마터그(한윤섭)가 소설에서의 캐릭터를 연극에서 개성화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특히 손정우 연출은 반복되고 지루할 수 있는 연기의 패턴을 객관적 시각에서 분석, 섬세하면서도 다각적인 변화로 이끌어 낸 점이 주효했다고 본다.

연극 '한 명'/사진=유목민
연극 '한 명'/사진=유목민

또한 ‘그녀’라는 주인공을 위해 이일섭(오토상), 정슬기(조카)등 연기파 배우들이 드라마 부분을 받쳐주었고, 젊은 배우들이 위안소의 실상을 재연 연기로 풀어준 점도 큰 힘이 됐다. 위안부 포주 하하 역을 맡은 박새롬은 매몰찬 연기를 잘 구현했고, 남편 역 이일섭은 춤까지 선보이며 악역을 멋지게 해냈다.

위안부 역을 맡은 홍은정(춘희), 이수정(풍길), 진영진(석순) 트리오는 연기 호흡도 잘 맞았지만 위안부의 실상을 리얼하게 연기해 ‘그녀’(창경)의 고통 속 기억들을 더욱 실감 나게 표출시켰다.

해방 이후 일본군의 만행을 다룬 위안부 연극은 몇 편 있었지만 김숨이라는 작가가 시대적 소명의식을 가지고 생존한 위안부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문학으로 승화시킨 소설 ‘한 명‘을 공연예술화 했다는 점에서 연극 ‘한 명‘의 의의는 크다고 본다. 더욱이 7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위안부 문제는 한일간의 뜨거운 감자일뿐 아니라 아직도 치유되지 않고 해결되지 않은 사회 문제라는 점에서 연극 ‘한 명‘의 초연은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다.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을 지냈다. 현재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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