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연극사에 남을 88세 이순재 대배우의 '리어왕'

- 기네스북에 올릴 숱한 기록도 남긴 기념비적인 공연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세계 공연사에 선례가 있었을까? 88세의 이순재 대배우가 12월 5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역사적인 '리어왕' 공연의 막을 내렸다. 노배우는 무대 위에서 당당했고 눈빛이 반짝였다. 필자가 관람한 이순재의 '리어왕'과 그가 이룩한 다양한 기록들을 정리해 보았다.

기립 박수를 못한 게 아쉽다. 커튼콜 분위기 때문에 일어서진 못했지만 이순재 대배우는 기립 박수 그 이상의 전설을 남겼고, 최고의 찬사를 받을만 한 기념비적 무대와 기록을 만들었다.

셰익스피어 '리어왕'은 워낙 유명한 고전이고, 세계의 명배우들이 리어를 맡았겠지만, 한국의 배우 이순재는 400년 역사 위에 그만의 신기록을 수립했다.

이순재. 1934년생. 데뷔 65년차.

우리 나이 88세. 국내 최고령 리어이고 세계 연극사에도 유례를 찾기 힘든 무대 위의 현역이다. 영국의 명배우 이언 매켈렌이 80세에 출연한 NT LIVE보다 훨씬 많다.

'킹 리어'를 꼭 해보고 싶었다는 그는 예술감독까지 맡아 원전 그대로의 풀버전을 택해 하루 10시간의 연습을 감내했다. 공연 시간 200분(3시간 20분, 인터미션 15분), 원 캐스팅으로 23일간 공연, 전회 매진. 일주일 연장 앵콜도 만석.

필자는 한국 연극사에 남을 이순재 '리어왕'을 누구보다 보고 싶었지만 기회를 잡지 못했다. 포기의 순간에 앙코르 소식이 들렸고, 이순재 배우가 70세 이상 원로연극인 친목 모임인 '대학로 연극인 광장' 회원 6명을 특별 초대했다. 그 일원으로 4일 관람을 했다. 일행 중에 대연장 회장인 노경식 극작가는 84세로, 아마도 '최고령 관객?'일지도 모른다.

서울대 출신의 관악극회가 주관한 '리어왕'은 번역 연출을 이현우가 했고, 관악극회 출신들과 게스트 등 배우 20여명이 등장하는 대작이다.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은 무대가 깊어 대작에 적합하지만 형상화 하기가 쉽지 않다. '리어왕' 스탭들은 1막에서 궁중 문양의 커튼을 내려 객석 가까이서 배우들의 연기를 보게 하고 무선마이크를 써 대사를 들리게 했다. 그럼에도 정적인 스탠딩 연기로 많은 양의 대사를 소화하다 보니 지루한 장면이 있었지만 관객들의 몰입도는 대단했다.

여러 버전의 '리어왕'을 접한 필자도 88세 리어왕 이순재의 연기가 궁금했다. 첫 등장부터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노배우는 한치의 머뭇거림이나 빈틈이 없이 원전 버전의 긴 대사들을 정확한 화술로 구현해냈고, 연기 또한 물흐르듯 자연스럽게 해냈다. 3시간을 무대에 서면 젊은 배우들도 지치는데 88세 노배우는 시종 눈빛이 살아 반짝였고, 대사의 톤 또한 낭랑했다.

평소 건강관리를 잘해 체력이 유지 되어도 80을 넘으면 대사 외기가 힘들고, 젊은 배우들과 연기 호흡을 맞추는 것 자체가 무리인데 이순재 대배우는 대역 없이 35일 동안 무대를 석권했으니 이는 노익장이란 수사로도 부족한 놀라운 일이며, 그가 세운 기록들 또한 기네스감이다.

이순재 대배우가 원전 그대로 못한 연기가 한군데 있었다. 라스트에서 막내딸 코딜리아를 안고 나오는 장면인데 시종이 대신 안고 나왔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필자는 이번 '리어왕' 공연은 배우와 스탭들이 이순재 대배우에게 헌정한 무대이자, 또한 이순재 대배우가 연극 관객들에게 헌정하는 의미있는 무대였다고 생각한다. 전체 공연에 대한 평가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이 공연이 남긴 성과는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는 이순재 대배우의 연극 정신과 대기록들이다.

5년전 데뷔 60주년 기념으로 '세일즈맨의 죽음'을 원전 버전으로 공연했을 때도 놀라웠지만 이번 '리어왕'은 이순재 배우의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첫 도전인데다 국내에선 드문 풀버전 이었다는 점에서 대단한 시도가 아닐 수 없다. 그는 혼자서 한달 여 공연을 완주했고, 여러 기록으로 한국 연극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일생동안 셰익스피어 작품과 인연이 없었어요. 햄릿도 못해봤으니까요. 데뷔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도전해 보고 싶은 작품이 '리어왕'이었고, 필생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각오로 임했어요"라고 그는 인터뷰에서 밝혔다. 나이를 초월하여 고전의 높은 경지에 도전한 그의 연극 정신은 젊은 예술가들에게 귀감이 될 만하다.

그와 한 무대에 선 배우들도 멋졌다. 많은 배우들이 열연을 펼쳤지만 리어 이순재를 받쳐준 글로스터 최종률, 명징한 대사전달로 캐릭터의 존재감을 살려낸 켄트 백작 역 박용수, 광대 역까지 겸한 코딜리아 역 박보현, 튀는 연기를 보인 오스왈드 역의 임대일 배우 등이 돋보였다.

전회 전석 매진 기록을 세운 관객의 호응도도 특기할 만하다. 코로나 등 여러 악재로 대학로 연극이 침체된 상황에서도 이순재 대배우가 혼신을 다한 기념비적인 공연에 관객이 몰린 것은 단순한 이벤트 적 현상은 아니라고 본다. 좋은 공연에 관객이 몰린다는 평범한 진리를 입증한 것이다.

연극 동네 대학로에 나붙은 '리어왕' 포스터도 한국 연극사에 표상으로 남을만한 디자인이었다.

공연의 타이밍도 요즘 시국과 잘 맞았다고 본다. 한 정권이 지고 새 지도자를 뽑는 시점에서 리더십의 중요성을 '리어왕'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리어왕'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에서도 ‘삶의 비극과 인생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시적으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리어왕은 세 딸에게 효심의 크기에 따라 왕국을 나눠주기로 하나 셋째 딸의 진정성을 이해하지 못해 비극에 처한다는 내용이다.

오만함 때문에 눈이 가려 진실과 거짓을 분별하지 못하다가 두 딸에게 버림받고 미치광이 노인 취급을 받고 황야로 내몰린다. 최상에서 최악으로 떨어지는 비극성이 '리어왕'이 주는 교훈이다. 모든 것을 잃고 난 리어가 "아 가난하고 헐벗은 자들이여. 이 모진 폭풍을 어떻게 견뎌왔는가. 내가 그들을 너무 몰랐구나"하는 대사가 이 연극의 백미다.

리더는 군림하는 게 아니고 밑바닥을 이해하고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상징적 메시지가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의미가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