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오스틴의 언어와 서술이 살아 움직이는 공간...연극 '오만과 편견'
[앨리스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오스틴의 언어와 서술이 살아 움직이는 공간...연극 '오만과 편견'
  • 주하영
  • 승인 202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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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소설가 제인 오스틴 원작, 조안나 틴시 각색
연극 '오만과 편견' 공연장면./사진=달컴퍼니, ㈜파크컴퍼니
연극 '오만과 편견' 공연장면. 원작 소설의 작가 제인 오스틴은 당대의 다른 소설들의 경우처럼 화려한 저택에 대한 묘사나 인물의 외양, 드레스에 관한 묘사에 치중하는 대신 '인물들의 심리묘사'에 집중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관객들의 상상력을 필요로하는 무대는 오스틴의 글쓰기를 그대로 반영하며 관객들이 인물들에 보다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준다. 왼쪽부터 다아시(이동하)와 엘리자베스(백은혜)./사진=달컴퍼니, ㈜파크컴퍼니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결혼이라는 제도는 언제부터 생겨났을까? 기록에 따르면, 현재 찾아볼 수 있는 결혼의 증거는 약 4350년 전이다.

문화인류학자들은 훨씬 이전부터 여러 명의 남성 지도자와 다수의 여성들이 아이들을 낳고 서로를 공유하는 느슨한 형태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왔음을 지적하지만 인간이 보다 안정적인 가족 단위의 구성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은 농경문화의 정착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여자와 한 남자가 가족을 이루게 된 첫 번째 결혼식에 대한 기록은 기원전 2350년 메소포타미아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결혼의 주요 목적은 가족 내 아이들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단 한 사람임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고, 결혼을 통해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이 되는 기본구조는 아주 오랫동안 이어졌다.

결혼에 ‘사랑’이라는 개념이 들어서게 된 것은 중세 시대에 이르러서였다. 학자들은 낭만적인 사랑에 대한 생각은 중세의 기사들이 여인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구애를 하던 데에서 출발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랑의 개념은 “실용적인 거래”로만 여겨지던 여성들의 위치를 크게 변화시켰다. 더 이상 아내들은 남편에게 봉사하는 존재로만 여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은 결혼과 동시에 남편의 성을 따름으로서 정체성이 남편에게 흡수되는 ‘상징적’ 규율을 벗어날 수 없었고, 사유 재산을 가질 수 없다는 법에 따라 남편에게 모든 권한을 일임한 채 의존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20세기를 향하며 여성들이 투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 때에야 비로소 결혼이라는 제도는 극적인 변혁을 맞이하게 되었다. 더 이상 기울어진 운동장과 같은 불평등한 관계가 아닌 온전한 두 시민권자의 평등한 결합이라는 공식이 마침내 가능해진 것이었다.

연극 '오만과 편견' 공연장면./사진=달컴퍼니, ㈜파크컴퍼니
연극 '오만과 편견' 공연장면. 단 2명의 배우가 21명의 인물을 연기하는 '다중역할(multi-role)' 공연은 여배우가 드레스 앞자락을 젖혀 바지를 드러내보임으로써 자연스럽게 코트와 승마복 차림의 남자 인물을 연기할 수 있게 된다./사진=달컴퍼니, ㈜파크컴퍼니

2017년 BBC는 영국의 로맨스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 제인 오스틴의 서거 200주년을 기념하면서 19세기 지주 신사계급의 결혼과 연애를 다룬 그녀의 소설들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주목했다.

“지난 40년 동안 결혼은 5000년에 걸친 역사 속에서 변화해 온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변화했다”고 평가되는 가운데 현재의 독자들이 “상당한 재산을 소유한 남자”와 결혼해 안정된 삶을 이루려는 여주인공의 러브 스토리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2009년 펭귄북스에서 출간된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의 서문을 쓴 비비엔 존스는 “오스틴의 소설과 할리퀸 로맨스 사이에는 기본적인 구조적 유사성이 존재”할 뿐 아니라 19세기 초 오스틴의 소설로 구축된 로맨스의 양식이 “20세기 후반 독자들에게도 여전히 강력한 문화적 신화”가 되고 있음에 주목했다.

여전히 우리는 “성적, 감정적 끌림을 연 소득 1만 파운드와 펨벌리 저택의 안주인을 향한 전망과 결합시키는 해피엔딩, 즉 낭만적 사랑이 경제적·사회적 성공의 보증이나 구실이 되는 신데렐라 스토리에 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연극 '오만과 편견' 공연장면./사진=달컴퍼니, ㈜파크컴퍼니
연극 '오만과 편견' 포스터./사진=달컴퍼니, ㈜파크컴퍼니

오스틴이 남긴 6편의 소설 가운데 가장 사랑받는 작품 ‘오만과 편견’이 낳은 “할 말은 하는, 독립적인” 성격의 재기발랄한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베넷’이 현대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으로 여겨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대부분의 로맨스 소설이 오스틴의 인물 유형들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스틴의 소설에 빠져드는 21세기의 독자들은 여전히 경제적으로는 열등하지만 능동적이고 솔직한 여주인공이 부유한 남자 주인공과의 결혼에 이르게 된다는 신데렐라 러브 스토리에 열광하는 것일까?

BBC에 따르면, 오스틴의 지속적인 인기 요인은 다른 곳에 있다. 오스틴의 소설은 19세기 영국 사회의 실질적 삶에 대한 아이러니가 가득하고, 당대의 관습과 예절, 가치 뿐 아니라 결혼을 중심으로 구축된 사회의 불평등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담고 있다.

무엇보다 현재의 삶 속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사실적으로 묘사된 인물들이 독자들의 관심을 끌어당기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잘난 체 하면서 남을 무시하는 속물근성, 재정적인 문제를 도외시할 수 없는 슬픈 현실, 겉으로 강조되지는 않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듯 보이는 계급의 문제,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고 결론내리는 성급함과 자부심이 오만함으로 변질되는 부주의, 화려한 외모에 눈멀어 실재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 부모나 형제자매, 가족의 억압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개인의 결정, 이 모든 것들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작동하는 굴레이자 속박이다.

연극 '오만과 편견' 공연장면./사진=달컴퍼니, ㈜파크컴퍼니
연극 '오만과 편견' 공연장면. 장남이 아닌 아들이나 딸에게 토지 상속을 할 수 없었던 제도로 인해 베넷 가문의 토지를 물려받게 된 미스터 콜린스(이형훈)는 베넷 가의 둘째 딸인 엘리자베스(백은혜)에게 청혼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거절한다./사진=달컴퍼니, ㈜파크컴퍼니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영문학 교수 존 뮬란은 지속성을 유지하는 오스틴의 가장 큰 매력은 ‘글쓰기 방식’에 있다고 말한다.

19세기 사회적 인습에 갇혀 있음에도 현재의 독자들에게 완벽하게 이해되도록 묘사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인물들과 매번 읽을 때마다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끊임없이 발견하도록 만드는 오스틴만의 서술방식이 인기를 지속시키는 비결이라는 것이다.

뮬란은 당시 다른 여성 작가들에 의해 쓰여진 같은 소재와 주제의 소설들이 많았음에도 오스틴만이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은 유튜브 채널과 트위터, 인스타그램 혹은 온라인 데이트 앱에 등장할법한 인물들이 그녀의 소설 속에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임을 강조한다.

2014년 영국 솔즈베리 극장에서는 오스틴의 1813년에 출간된 소설 ‘오만과 편견’의 200주년을 기념해 조안나 틴시와 닉 언더우드 부부의 2인극으로 각색된 연극 ‘오만과 편견’이 무대에 올랐다.

‘옥스포드 타임스’로부터 “독특한 연극적 경험”이라는 호평을 받은 이 작품은 2016년 영국 전역 투어에서도 성공을 거두며 오스틴을 사랑하는 팬들에게도, 오스틴의 소설을 전혀 접해본 적 없는 관객들에게도 “꼭 봐야만 하는 작품”으로 손꼽히며 주목을 받았다. 국내에서도 2019년 하반기에 초연된 연극 ‘오만과 편견’은 현재 대학로에 위치한 예스24스테이지 3관에서 재공연 무대를 이어가고 있다.

연극 '오만과 편견' 공연장면./사진=달컴퍼니, ㈜파크컴퍼니
연극 '오만과 편견' 공연장면.남녀 배우는 2인으로 구성된 여러 장면을 연달아 연기하기 때문에 각 배우는 최소한 4번 이상의 다른 성역할을 연기한다. 엘리자베스(김지현)와 제인(홍우진)의 대화 장면. /사진=달컴퍼니, ㈜파크컴퍼니

틴시 각색의 연극 ‘오만과 편견’의 가장 큰 특징은 단 2명의 배우가 소설 속에 등장하는 21명의 인물들을 모두 자유자재로 연기한다는 점이다.

틴시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성별과 나이가 다른 여러 인물들을 소품 몇 개와 옷자락을 젖히거나 덮는 의상의 변화만으로 차별적으로 표현하는 공연을 선보이게 된 계기에 대해 ‘다중역할(multi-role)’을 하는 공연들에 참여했던 경험과 깨달음이 출발점이 되었다고 밝혔다.

그녀는 “배우가 하나 이상의 인물들을 연기하고 관객 앞에서 즉각적으로 변화를 생산해야 할 때 오히려 등장인물들의 특징을 더 명확하게 전달하게 되고, 언어 역시 관객들이 수용하기 쉽도록 텍스트를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만들게 됨”을 강조했다.

틴시는 무엇보다 오스틴의 소설 속 인물들의 ‘대화(dialogue)’가 주로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고 기본적으로 ‘연극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인물들을 연극 무대에 살아있도록 만들기 위해 아주 많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녀가 각색을 위해 한 일은 오스틴의 전체 플롯을 머릿속에 담은 채로 두 사람이 짝을 이루는 장면들을 분류해내고 마치 퍼즐을 맞추듯 구성해 재배열하는 작업이었다. 그녀는 다른 각색들의 경우처럼 새로운 장면을 더하거나 대사를 첨가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았다.

연극 '오만과 편견' 공연장면./사진=달컴퍼니, ㈜파크컴퍼니
연극 '오만과 편견' 공연장면. 기본적으로 오스틴의 소설 구성방식이 두 사람의 '대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고, '연극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원작 텍스트의 '언어'를 살린 공연은 오스틴의 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왼쪽부터 배우 정운선, 신성민./사진=달컴퍼니, ㈜파크컴퍼니

실제로 영국에서 틴시 각색의 ‘오만과 편견’이 오스틴의 독자들을 사로잡은 이유는 소설 속 오스틴의 ‘언어’가 그대로 연극 속에 살아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틴시는 연극으로 공연되기에 합리적인 길이의 대본을 만들기 위해 오스틴의 플롯 일부와 특정 인물들을 삭제하는 선택을 했지만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 선에서 이루어졌으며, 인물 간에 이루어지는 ‘대화’에 오스틴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또, 오스틴의 글쓰기의 가장 큰 특징인 신랄한 위트와 풍자, 아이러니를 살리기 위해 오스틴의 ‘3인칭 서술’을 보존하는 방식을 택했다. 작가가 독자들에게만 전달하고자 하는 생각이 여러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의 ‘입’을 통해 여러 목소리로 관객들에게 릴레이를 하듯 전달된다는 점이 다를 뿐 인물들의 속내며 비밀스러운 생각, 떠오르는 질문, 관계와 사회를 향한 비판적인 시선들은 관객들이 “여러 관점의 층위를 확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틴시는 이러한 독특한 연극 방식이 관객들에게 선사하는 경험이 “오스틴 소설의 독자와 작가의 관계를 모방”한 것과 같음에 주목한다.

연극 '오만과 편견' 공연장면./사진=달컴퍼니, ㈜파크컴퍼니
연극 '오만과 편견' 공연장면. 오스틴의 소설을 각색한 조안나 틴시는 "배우가 하나 이상의 인물을 연기하고 관객 앞에서 즉각적인 변화를 생산해야 할 때 오히려 등장인물의 특징을 더 명확하게 전달하게 된다"고 말한다. 왼쪽부터 배우 신성민, 정운선./사진=달컴퍼니, ㈜파크컴퍼니

국내 공연의 아쉬운 점이 있다면 원어가 아닌 번역이라는 한계로 인해 오스틴의 원문 텍스트의 활자가 어떻게 배우들의 입을 통해 생명을 얻게 되고 오스틴만의 독특한 글쓰기가 어떻게 “연극적인 맥락으로 살아있게 전달되는지”를 정확히 느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배우들의 열연을 통해 강렬하게 다가오는 21명의 개성이 뚜렷한 인물들과 관객과 배우가 함께 호흡하며 ‘상상력’으로 채워나가는 소설 ‘오만과 편견’의 경험은 그대로 존재한다.

부서지고 무너져 내린 듯 틀만 남은 비틀린 저택과 작은 소파, 테이블, 서랍장, 소품 박스, 천장 높이 달려 있는 샹들리에 하나로 구현되는 무대는 관객들의 ‘적극적인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19세기 빅토리아풍의 저택과 의상, 화려한 무도회 등을 강조하지 않는 무대는 현대의 관객들이 시대를 초월한 오스틴의 강렬한 인물들을 현재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장점을 부여한다. 동시에 당대의 다른 소설들처럼 저택이나 드레스, 인물의 외양을 묘사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기 보다는 인물 심리 묘사에 치중했던 오스틴의 글쓰기를 반영한 무대라 할 수 있다.

연극 '오만과 편견' 공연장면./사진=달컴퍼니, ㈜파크컴퍼니
연극 '오만과 편견' 공연장면. 틀만 남은 비틀린 저택과 작은 소파, 테이블, 서랍장, 소품 박스, 천장 높이 달린 샹들리에 하나로 구현되는 무대는 관객들의 '적극적인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왼쪽부터 배우 홍우진, 김지현./사진=달컴퍼니, ㈜파크컴퍼니

또, 제인과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와 다아시, 다아시와 빙리, 제인과 빙리, 리디아와 키티, 베넷 부부 등 2인으로 구성되며 맞물리는 장면들은 각 배우가 다른 성역할을 최소한 4번 이상 하도록 만든다. 성역할의 경계가 흐려지고 끊임없이 전복되는 모습은 관객들에게 연극적 즐거움과 유쾌한 웃음을 선사할 뿐 아니라 결혼을 통해 경제적 안정을 추구해야 했던 당대의 여성들의 한계를 드러내기 보다는 젠더와 상관없이 인물이 가진 성격적 특성을 강조하게 되는 효과를 낳는다.

물론 ‘오만과 편견’이 다루는 주제라 할 수 있는 ‘허영과 교만’에 관해 의미 있는 말들을 쏟아내는 베넷가의 딸 ‘메리’가 플루트 소리와 ‘악보대(music stand)’로 축소되어 버린 점은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오스틴이 소설을 통해 강조하려 했던 인간 본성에 관한 통찰력 있는 메시지가 약화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연극 '오만과 편견' 공연장면./사진=달컴퍼니, ㈜파크컴퍼니
연극 '오만과 편견' 공연장면. 캐서린 남작부인(이형훈)은 엘리자베스(백은혜)에게 분수에 넘치는 결혼을 하지 말 것을 강조하며 다아시의 청혼을 거절할 것을 요구하지만 솔직하고 당찬 엘리자베스는 부인의 요구를 거절한다./사진=달컴퍼니, ㈜파크컴퍼니

‘오만과 편견’의 제목에 포함된 영어 단어 ‘pride’는 자부심과 긍지, 자존심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오만함과 거만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스틴은 주요인물로 등장하지 않는 메리의 입을 통해 응축된 생각들을 쏟아내는데, 메리는 인간이 본성상 얼마나 교만해지기 쉽고 자기만족에 빠지기 쉬운 존재인지를 언급하면서 ‘허영(vanity)’과 ‘자만(pride)’을 구분한다. “자만이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문제라면, 허영은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해주기를 바라느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은 허영심이 없이도 얼마든지 오만해질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는 엘리자베스와 그녀에게 오만하다는 첫인상을 남긴 다아시가 서로의 잘못과 실수를 깨닫고 사랑과 결혼에 이르게 되는 과정의 핵심에 놓여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아시의 오만한 실수는 허영심과 상관없이 지나친 자기만족에 빠져 엘리자베스와 같이 경제적으로 자신보다 열등한 여성이 자신의 청혼을 거절할리 없다고 믿었던 데에서 기인한다.

또 사교성이 부족한 다아시의 태도와 위선적인 위컴의 말만 믿고 성급한 결론에 도달한 엘리자베스의 ‘편견(prejudice)’은 자신의 판단력에 대한 과신과 자만의 결과라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자신의 실수와 결점을 인식하고 서로를 향해 움직이는 용기를 통해 사랑을 기반으로 한 결혼에 이르는 길을 되찾는다.

틴시는 ‘오만과 편견’ 속에서 엘리자베스라는 여주인공이 겪어나가는 일들은 사실상 “자신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이자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려는 노력”의 일환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현재의 관객들과의 연결점을 쉽게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연극 '오만과 편견' 공연장면./사진=달컴퍼니, ㈜파크컴퍼니
연극 '오만과 편견' 공연장면. 엘리자베스(정운선)에게 오만하다는 첫인상을 남긴 다아시(신성민)와 성급한 판단으로 편견에 빠졌던 엘리자베스는 서로의 잘못과 실수를 깨닫고 사랑을 기반으로 한 결혼에 이르게 된다. /사진=달컴퍼니, ㈜파크컴퍼니

내가 옳다고 믿는 것과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 충동적인 감정으로 성급한 판단을 내렸음을 인식할 때의 당혹감과 부끄러움은 엘리자베스라는 인물을 통해 드러난다. 반면 지나친 자부심으로 인해 다른 사람의 삶에 섣불리 개입해 관계를 틀어지게 만들고 상대방의 감정을 배려하지 않는 무례를 저질렀음을 인식할 때의 창피스러움과 실망감은 다아시를 통해 보편성을 획득한다.

모든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허영과 오만, 편견과 위선, 이기심과 탐욕과 같은 본성적 결함은 오스틴이 빚어낸 다채로운 인물들과 건조한 유머와 아이러니가 담긴 서술을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드는 배우들의 재능을 통해 2시간 동안 소설을 입체적으로 경험하는 듯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작품의 주인공인 엘리자베스와 다아시를 중심으로 언니 제인과 커플을 이루는 미스터 빙리, 부유한 신사계급과 딸들을 결혼시키기 위해 열을 올리는 미시즈 베넷과 아들이 없는 탓에 사촌에게 토지를 물려줘야 함에도 태평하기만 한 미스터 베넷, 미시즈 베넷의 동생 부부이자 엘리자베스와 다아시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미시즈 가드너와 미스터 가드너 등은 남녀배우가 짝을 이루어 반복적으로 선보이는 인물들이다.

연극 '오만과 편견' 공연장면./사진=달컴퍼니, ㈜파크컴퍼니
연극 '오만과 편견' 공연장면. 제인(이형훈)에게 청혼을 하고 있는 미스터 빙리(백은혜). 다아시의 섣부른 간섭으로 제인의 마음을 오해했던 미스터 빙리는 다시 찾아온 베넷가에서 제인에게 결혼해 줄 것을 청한다./사진=달컴퍼니, ㈜파크컴퍼니

흥미로운 점은 엘리자베스와 미시스 베넷을 연기하는 여배우가 의상 앞쪽의 단추를 풀어 헤치고 바지를 드러내는 순간 제인에게 청혼하는 미스터 빙리로 변신하고, 다아시와 미스터 베넷을 연기하는 남배우가 의상 앞쪽 단추를 가지런히 채우고 드레스처럼 들어 올리는 순간 빙리를 사랑하는 언니 제인으로 변신하게 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책 없이 발랄하기만 한 여동생 리디아와 키티, 베넷 가문의 토지를 상속받기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상류층의 눈에 들기 위해 아첨과 순종의 태도를 보이는 우스꽝스러운 미스터 콜린스, 파렴치한 짓을 하고도 사교성 좋은 매너와 장교라는 허울 뒤에 숨어 다아시를 험담하고 리디아를 데리고 도망치는 바람에 베넷 가문의 명예를 위태롭게 하는 위컴, 다아시의 눈에 들기 위해 자신을 뽐내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허영심 가득한 캐롤라인과 조카인 다아시와 자신의 딸을 결혼시켜 상류층의 위신과 경제적 결합을 이루려는 속물적인 캐서린 부인 등 모든 인물들은 두 배우에 의해 분명하게 구분된다.

연극 '오만과 편견' 공연장면./사진=달컴퍼니, ㈜파크컴퍼니
연극 '오만과 편견' 공연장면. 소품은 다른 인물을 표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작은 부채를 든 캐롤라인 빙리(백은혜)는 다아시(이동하)의 눈에 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지만 다아시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사진=달컴퍼니, ㈜파크컴퍼니

손수건이나 부채, 모자, 지팡이, 안경, 숄과 같은 작은 소품으로 강조되는 캐릭터는 배우의 목소리 톤과 태도, 대사를 전달하는 방식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인물로 탈바꿈한다.

틴시의 ‘오만과 편견’은 사회 속에서 안정된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 분투하는 오스틴의 인물들을 “완전히 육체가 있는 사람들”로 무대 위에 구현할 뿐 아니라 관객들이 그 속에서 자신의 측면을 발견하고 보편적인 인간의 단점과 장점을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든다. 어쩌면 그것이 영국 일간지로부터 “감히 원작보다 더 재미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게 만든 점이고 “코미디와 에너지로 진동하는 작은 보석과 같은 연극”이라는 설명이 덧붙여진 이유일 것이다. 11월 29일까지 예스24스테이지 3관.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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