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희생과 선택을 강요받는 현대인의 삶...발레 '레드 슈즈'
[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희생과 선택을 강요받는 현대인의 삶...발레 '레드 슈즈'
  • 주하영
  • 승인 2021.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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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안무가 겸 연출가 매튜 본의 2016년 신작, 2019년 1월 런던 새들러스 웰스 공연 실황
'빅토리아 페이지(애슐리 쇼)'는 전설의 발레단장 '보리스 레르몬토르(아담 쿠퍼)'의 눈에 들기 위해 열정적인 오디션 무대를 펼쳐 보인다./사진=LG아트센터
발레 '레드 슈즈' 공연 장면. '빅토리아 페이지(애슐리 쇼)'는 전설의 발레단장 '보리스 레르몬토르(아담 쿠퍼)'의 눈에 들기 위해 열정적인 오디션 무대를 펼쳐 보인다./사진=LG아트센터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20세기 초 안무가 미하일 포킨의 발레 ‘빈사의 백조’로 전 세계 관객들을 사로잡았던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는 “위대한 예술은 커다란 희생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발레리나는 예술에 자신을 헌신해야 하며, 그 대가로 관객들이 삶의 슬픔과 단조로움을 잊을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평범한 일상과 안정된 가정, 사랑의 성취는 예술을 위해 헌신되고 희생되어야 할 것임을 강조했던 그녀의 발언은 수년 뒤 러시아의 발레리노 루돌프 누레예프에 의해 반복된다. 그는 “춤을 추는 일은 직업이 될 수 없다. 춤은 삶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피력했다.

1948년 마이클 포웰과 에머릭 프레스버거의 영화 ‘레드 슈즈’ 속 발레리나 빅토리아 페이지 역시 발레단장 보리스 레르몬토프의 ‘왜 춤을 추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당신은 왜 사나요?”

살아가는 이유와 춤을 추는 이유가 같다는 것은 춤을 출 수 없게 되면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의미가 된다. 빅토리아의 대답은 레르몬토프의 마음을 움직이고 열정과 혼신을 다하는 그녀의 춤은 그를 매료시킨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빅토리아는 예술을 향한 열정과 사랑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사랑은 예술에 방해만 된다’고 생각하는 레르몬토프는 빅토리아가 개인적 삶을 희생해야 할 필요를 강조한다. 결국 예술적 성취와 개인의 삶 사이의 갈등은 그녀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불러온다.

수필가 아나이스 닌은 “위대한 예술이란 공포, 외로움, 억압, 동요, 불안으로부터 탄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술적 성취에는 ‘고통과 상실’이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 삶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예술만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을 수 있는 것일까?

발레단의 시즌 종료를 축하하기 위해 항구도시 빌프랑슈-쉬르-메르에 모인 단원들은 잠시 자신들만의 여가를 즐긴다. 발목 부상을 회복한 프리마 발레리나 '이리나 보론스카야(미켈라 메아차)'는 '레르몬토프(아담 쿠퍼)'와 탱고(tango)를 춘다./사진=LG아트센터
발레 '레드 슈즈' 공연 장면. 발레단의 시즌 종료를 축하하기 위해 항구도시 빌프랑슈-쉬르-메르에 모인 단원들은 잠시 자신들만의 여가를 즐긴다. 발목 부상을 회복한 프리마 발레리나 '이리나 보론스카야(미켈라 메아차)'는 '레르몬토프(아담 쿠퍼)'와 탱고(tango)를 춘다./사진=LG아트센터

2016년 “영국에서 가장 성공한 안무가이자 연출가”라 불리는 매튜 본은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중요한 댄스 영화”로 인식되어 온 1948년 고전 영화 ‘레드 슈즈’에 기반한 동명의 발레 작품을 선보였다.

초연 공연부터 전석 매진을 기록한 매튜 본의 ‘레드 슈즈’는 2017년 ‘올리비에상’ 두 개 부분을 수상했을 뿐 아니라 2018년 ‘LA 드라마 크리틱 어워드’에서 안무상, 의상상, 조명 디자인상을 수상했다. 또 여주인공을 맡은 애슐리 쇼는 2018년 ‘영국국립무용상’을 수상했다.

1995년 상반신을 탈의한 맨발의 남성 백조들이 등장하는 발레 ‘백조의 호수’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매튜 본은 꾸준한 성장을 이어온 자신의 무용단 ‘뉴 어드벤처스(New Adventures)’의 2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레드 슈즈’에 대해 “극장과 춤이 전부인 삶에 대한 개인적인 연애편지와 같다”고 말했다.

매튜본의 '레드 슈즈' 공식 시네마 트레일러 오프닝 장면에서 '빅토리아 페이지' 역을 맡은 애슐리 쇼(Ashley Shaw)는 레드 슈즈를 신은 채 푸앵트 기법을 선보이며 어둠 속 조명 아래 놓여있다./사진=트레일러 캡처.
매튜본의 '레드 슈즈' 공식 시네마 트레일러 오프닝 장면에서 '빅토리아 페이지' 역을 맡은 애슐리 쇼(Ashley Shaw)는 레드 슈즈를 신은 채 푸앵트 기법을 선보이며 어둠 속 조명 아래 놓여있다./사진=트레일러 캡처.

포웰과 프레스버거의 1948년 영화 ‘레드 슈즈’는 1845년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동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안데르센의 이야기가 주는 섬뜩함과 기괴함, 마법의 댄스 슈즈라는 서사만 영화 속에 등장하는 17분 정도의 발레 공연에 차용되고 있을 뿐이다.

영화의 플롯은 오히려 20세기 초 발레계에 혁신을 가져온 것으로 유명한 ‘발레 뤼스’의 단장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와 ‘무용의 신(神)’이라 불렸던 발레리노 바슬라프 니진스키의 이야기에서 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성애를 다룰 수 없었던 당대의 분위기는 주인공의 성별을 바꿔 ‘예술을 향한 열정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발레리나의 비극’이라는 서사를 만들어냈고, 집착과 소유욕, 그리고 예술과 삶의 대립관계에 대한 고찰을 가능하게 했다.

매튜본 '레드 슈즈' 공식 시네마 트레일러 장면. 안데르센 동화의 섬뜩함, 기괴함, 마법의 댄스 슈즈라는 서사만 차용하고 있는 17분 가량의 발레 공연은 1948년 영화 '레드 슈즈'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따른다. '제화공'은 레드 슈즈를 보여주며 '소녀(Girl)'를 유혹한다./사진= 트레일러 캡처
매튜본 '레드 슈즈' 공식 시네마 트레일러 장면. 안데르센 동화의 섬뜩함, 기괴함, 마법의 댄스 슈즈라는 서사만 차용하고 있는 17분 가량의 발레 공연은 1948년 영화 '레드 슈즈'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따른다. '제화공'은 레드 슈즈를 보여주며 '소녀(Girl)'를 유혹한다./사진= 트레일러 캡처

2020년 12월 ‘레드 슈즈’의 BBC 방영을 위해 제작된 ‘디지털 프로그램북’에서 매튜 본은 “안데르센의 이야기가 갖고 있는 허영심이라는 죄와 종교적 구원이라는 주제는 현재와 관련짓기에 어려움이 있지만 춤추는 것을 멈출 수 없었던 소녀의 이야기는 충분히 창작정신을 자극할 만한 것”이기 때문에 파웰과 프레스버거 뿐 아니라 케이트 부시와 ‘니하이 극단(Kneehigh)’의 엠마 라이스에 이르기까지 ‘레드 슈즈’ 이야기가 끊임없이 재창작되고 있는 것임을 지적했다.

그는 1948년 영화에는 다소 과장된 듯 보이는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이 품은 창작의 열정과 야심, 사랑과 성공을 향한 욕구는 예술적 성취와 개인적인 성취 사이에서 고민하는 현대인의 삶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현재의 관객들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임을 강조했다.

그는 영국 언론 ‘익스프레스 앤 스타’와의 인터뷰에서 일을 향한 열정과 사랑이 부딪치는 갈등은 동시대의 삶에도 유효한 일이며, 어떤 사람에게는 일이 삶의 다른 것보다 중요할 수 있고, 성공을 향한 열망과 가족 혹은 친구, 연인과의 관계가 갈등을 빚는 일은 흔한 일임을 언급했다.

작품을 창작할 때 ‘스토리텔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매튜 본이 ‘레드 슈즈’의 안무를 위해 가장 어렵게 느낀 부분은 ‘전체 이야기를 오직 춤으로만 말해야한다’는 점이었다.

특히 인물 간의 갈등을 언어가 아닌 춤으로만 표현하는 일은 매체가 달라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감정’에 집중했다. 인물들이 품고 있는 열정과 집착, 희망과 절망, 고통과 슬픔과 같은 감정들은 춤으로 표현하기에 보다 적합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매튜본 '레드 슈즈'공식 시네마 트레일러의 한 장면. 레드 토슈즈를 신은 '소녀(Girl)'는 춤추는 일을 멈출 수가 없다. 밤낮없이 바람이 불거나 폭풍이 닥쳐도 끊임없이 춤을 계속해야 하는 '소녀(Girl)'는 점점 지쳐간다./사진=트레일러 캡처
매튜본 '레드 슈즈'공식 시네마 트레일러의 한 장면. 레드 토슈즈를 신은 '소녀(Girl)'는 춤추는 일을 멈출 수가 없다. 밤낮없이 바람이 불거나 폭풍이 닥쳐도 끊임없이 춤을 계속해야 하는 '소녀(Girl)'는 점점 지쳐간다./사진=트레일러 캡처

또, 매튜 본이 ‘레드 슈즈’를 위해 선택한 버나드 허먼의 1940년대~60년대 영화 음악은 작품에 다른 측면의 서사와 주제, 분위기를 전달할 수 있었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1958년 영화 ‘현기증’ 뿐 아니라 1941년 영화 ‘시민 케인’, 1947년 영화 ‘유령과 뮤어 부인’, 1959년 영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1966년 영화 ‘화씨 451’에 이르기까지 여러 편의 영화 삽입곡들을 모아 100분에 달하는 댄스 공연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엮어낸 음악은 “또 하나의 성취”가 된다.

스릴러와 로맨스, 판타지, 디스토피아, 죽음과 광기 등을 담고 있는 영화의 이야기들은 안데르센 동화가 품고 있는 기괴함과 섬뜩함, 초현실주의적 세상과 1948년 영화가 품고 있던 집착과 소유욕, 사랑과 선택, 죽음과 같은 주제들을 추가적인 방식으로 표현한다.

매튜본 '레드 슈즈' 공식 시네마 트레일러의 한 장면. 안데르센 동화의 섬뜩함, 기괴함, 마법의 댄스 슈즈라는 서사만 차용하고 있는 17분 가량의 발레 공연은 1948년 영화 '레드 슈즈'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따른다. '제화공'은 '소녀(Girl)'와 '소년(Boy)'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한다./사진=트레일러 캡처.
매튜본 '레드 슈즈' 공식 시네마 트레일러의 한 장면. 안데르센 동화의 섬뜩함, 기괴함, 마법의 댄스 슈즈라는 서사만 차용하고 있는 17분 가량의 발레 공연은 1948년 영화 '레드 슈즈'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따른다. '제화공'은 '소녀(Girl)'와 '소년(Boy)'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한다./사진=트레일러 캡처.

매튜 본에 따르면, ‘레드 슈즈’에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세 가지 영역이 존재한다.

첫 번째로는 레르몬토프 무용단이 공연하는 발레 작품들이 있고, 두 번째로는 무대를 통해 표현되는 무용단의 실질적인 삶이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무용수가 되기를 원하는 소녀와 그녀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젊은 작곡가, 그리고 예술을 위해서만 오롯이 삶을 헌신하기를 바라는 발레단장의 갈등이 있다.

이러한 다층적인 방식의 스토리텔링을 위해 무대 디자인을 맡은 레즈 브라더스톤은 무대 위에 ‘프로시니엄 아치’를 세웠다. 무대와 객석을 구분하는 대형극장의 프로시니엄 아치는 자유자재로 회전할 뿐 아니라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오기도 하고 뒤로 물러나기도 하면서 마치 춤을 추는 무용수처럼 움직인다.

극장 투어를 하며 삶을 영위하는 무용단의 무대 뒤의 삶과 리허설 과정, 작품을 제작하기 위한 숱한 회의와 고민의 시간들, 투어 과정에서 머물게 된 아름다운 도시들에서의 짧은 여가와 후견인들과의 애프터 파티 장면까지 360도로 회전하며 등장과 퇴장을 반복하는 ‘프로시니엄 아치’는 등장인물들에게도, 관객들에게도 예술적 삶과 현실의 삶을 가르는 경계가 된다.

매튜본 '레드 슈즈' 공식 시네마 트레일러의 한 장면. 현실적 삶과 꿈의 성취 사이에서 분투하던 '빅토리아(애슐리 쇼)'는 점점 더 환각을 겪으며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고, 결국 무대를 뛰쳐나가 줄리안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무대 위의 '프로시니엄 아치(procenuum arch)'는 등장과 퇴장을 반복하며 예술적 삶과 현실의 삶을 가르는 경계가 된다./사진=트레일러 캡처
매튜본 '레드 슈즈' 공식 시네마 트레일러의 한 장면. 현실적 삶과 꿈의 성취 사이에서 분투하던 '빅토리아(애슐리 쇼)'는 점점 더 환각을 겪으며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고, 결국 무대를 뛰쳐나가 줄리안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무대 위의 '프로시니엄 아치(procenuum arch)'는 등장과 퇴장을 반복하며 예술적 삶과 현실의 삶을 가르는 경계가 된다./사진=트레일러 캡처

매튜 본은 예술 분야의 업적을 통해 ‘역사의 일부’가 되는 것이 삶의 목적이었던 디아길레프를 모델로 한 발레단장 레르몬토프의 모습을 1948년 영화와 똑같이 가져오는 대신 그의 무용단에는 ‘로열 발레단(The Royal Ballet)’의 역사를 반영하는 변형을 더한다.

당시에는 ‘새들러스 웰스 발레단(Sadler’s Wells Ballet)’으로 알려져 있던 로열 발레단은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에서 막 벗어난 시기에 대중들과 군인들을 위한 공연을 선보일 필요가 있었고, 이 때문에 레퍼토리들은 고전적인 발레 공연들보다는 즉흥적이고 혼합적인 형태의 댄스 공연들이 주를 이루었다. 따라서 ‘레드 슈즈’에 등장하는 레르몬토프 발레단의 공연 4편 중 1948년 영화의 발레 공연 내용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는 ‘레드 슈즈’를 제외한 나머지 3편은 20세기 중반 새들러스 웰스 발레단의 작품들을 모방한다.

매튜본 '레드 슈즈' 공식 시네마 트레일러의 한 장면. 레르몬토프 발레단이 몬테 카를로에서 선보인 공연 '해변의 발레'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에서 막 벗어난 시기에 대중들과 군인들을 위한 공연을 선보일 필요가 있었던 '로열 발레단(The Royal Ballet)'의 역사를 반영한다./사진=트레일러 캡처
매튜본 '레드 슈즈' 공식 시네마 트레일러의 한 장면. 레르몬토프 발레단이 몬테 카를로에서 선보인 공연 '해변의 발레'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에서 막 벗어난 시기에 대중들과 군인들을 위한 공연을 선보일 필요가 있었던 '로열 발레단(The Royal Ballet)'의 역사를 반영한다./사진=트레일러 캡처

매튜 본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1940년 프레더릭 애슈턴이 안무를 맡았던 ‘단테 소나타’부터 해변가의 발레와 왈츠 풍의 고전적인 발레에 이르기까지 선별된 작품들을 통해 겨냥했던 것은 발레 역사의 “시대적 진정성”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그 속에 한 여자를 두고 두 남자가 줄다리기를 하는 삼각관계와 무용수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려는 발레단장의 집착과 광기, 죽음과 같은 서사를 여전히 유지한다.

무엇보다 ‘레드 슈즈’를 위해 매튜 본이 기존의 작품들과 안무적으로 다른 시도를 한 것은 발끝으로 서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푸앵트 기법’을 적용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현존하는 낭만 발레 중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알려진 ‘라 실피드’에서 공기 요정 실피드를 연기하기 위해 ‘마리 탈리오니’가 처음 선보인 푸앵트 기법은 “발레 기법의 대혁명”으로 일컬어진다.

중력을 거스르는 듯 가볍게 날아다니는 모습과 잦은 도약, 하늘하늘한 순백색의 종 모양으로 된 발레복 로맨틱 튀튀, 그리고 토슈즈가 발명되기 전 긴 끈을 발목에 묶어 춤을 출 때 벗겨지지 않도록 했던 발레 슈즈에 이르기까지 ‘라 실피드’는 레르몬토프 발레단이 공연을 위해 리허설을 하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빅토리아가 추는 발레의 특징을 담은 작품이기도 하다.

매튜본 '레드 슈즈' 공식 시네마 트레일러의 한 장면. 레드 슈즈를 신은 '소녀(Girl)'는 춤추는 일을 멈출 수가 없다. 밤낮없이 바람이 불거나 폭풍이 닥쳐도 끊임없이 춤을 계속해야 하는 '소녀(Girl)'는 점점 지쳐간다./사진=트레일러 캡처.
매튜본 '레드 슈즈' 공식 시네마 트레일러의 한 장면. 레드 슈즈를 신은 '소녀(Girl)'는 춤추는 일을 멈출 수가 없다. 밤낮없이 바람이 불거나 폭풍이 닥쳐도 끊임없이 춤을 계속해야 하는 '소녀(Girl)'는 점점 지쳐간다./사진=트레일러 캡처.

1948년 영화에서 빅토리아 역을 맡았던 발레리나 모이라 시어러의 ‘레드 슈즈’ 공연에는 긴 끈이 달린 레드 컬러의 발레 슈즈와 로맨틱 튀튀, 푸앵트 기법이 모두 사용된다. 따라서 매튜 본은 애슐리 쇼가 선보이는 ‘빅토리아의 발레 안무’에 잦은 도약과 푸앵트 기법을 적극 반영한다. 이는 전통적인 발레 기법에 저항해 온 그에게는 새로운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매튜 본 작품 속 빅토리아가 1948년 영화 속 인물과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상류층 귀족이라는 배경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기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노력하는 “강인한 인물”을 표현하기를 원했고, 오늘날의 여성들이 삶에서 일과 사랑 사이에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들을 직면하듯 그 어려움에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랐다. 이 때문에 영화에서 오디션을 보지 못한 빅토리아는 전설적인 발레단장 앞에서 모든 열정을 다해 풍부한 감정과 영혼을 담은 발레를 선보이는 능동적인 모습으로 변경된다.

또, 재능 있는 작곡가 줄리안 크래스터와의 만남도 오디션을 보게 된 애프터 파티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그와 발레 음악에 대해 신경전을 벌이는 것으로 시작해 두 사람이 함께 호흡을 맞추어 나가는 것으로 설정된다. 레르몬토프는 빅토리아의 발레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면서도 무심한 척 외면하고 오히려 줄리안에게 명함을 건넨다. 하지만 다음 장면에서 다른 무용수와 함께 레르몬토프 발레단에 신입 단원으로 들어오게 된 빅토리아의 모습이 펼쳐진다.

매튜본 '레드 슈즈' 공식 시네마 트레일러의 한 장면. '보리스 레르몬토프(아담쿠퍼)'는 20세기 초 발레계에 혁신을 가져온 것으로 유명한 '발레 뤼스'의 단장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를 모델로 하고 있다./사진=트레일러 캡처.
매튜본 '레드 슈즈' 공식 시네마 트레일러의 한 장면. '보리스 레르몬토프(아담쿠퍼)'는 20세기 초 발레계에 혁신을 가져온 것으로 유명한 '발레 뤼스'의 단장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를 모델로 하고 있다./사진=트레일러 캡처.

빅토리아가 프리마 발레리나인 이리나 보로스카야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과정 역시 영화와는 다르게 설정된다. 예상치 못한 이리나의 발목 부상은 빅토리아가 스타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레르몬토프는 새로운 발레 ‘레드 슈즈’의 창작을 위해 줄리안에게는 음악을, 빅토리아에게는 주연 발레리나 역할을 맡긴다. 새로운 발레 공연의 성공은 예술적 성취를 이룬 두 사람의 열정적인 키스 장면을 목격한 레르몬토프의 분노에 찬 표정으로 비극을 예고한다.

영화와 비교했을 때 성격적인 측면에서 보다 성취를 거둔 것으로 보이는 인물은 다름 아닌 ‘레르몬토프’이다. 20년 전 ‘백조의 호수’에서 백조와 낯선 남자 역할의 안무를 맡았던 아담 쿠퍼는 ‘레드 슈즈’에서는 레르몬토프의 안무를 창작했다.

그는 인터뷰 동영상에서 레르몬토프의 장면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묻는 질문에 “관객들이 레르몬토프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동요를 볼 수 있도록 고안된 침실 장면”이라고 말했다.

붉은 색 긴 가운을 입은 레르몬토프는 빅토리아가 자신과 발레단을 버리고 줄리안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깊은 슬픔과 고통을 느낀다. 그의 좌절과 그녀를 다시 데려오고 싶은 갈망을 표현하는 레르몬토프의 춤은 발레리나의 푸앵트 동작의 발을 형상화한 소품 동상과 함께 ‘예술이 아닌 사랑’을 선택한 빅토리아에 대한 배신감과 실망감, 버림받은 아픔과 상처를 느끼고 있는 그의 내면을 잘 드러낸다.

매튜 본 '레드 슈즈' 공연 장면. 붉은 색 긴 가운을 입은 '레르몬토프(아담 쿠퍼)'는 빅토리아가 자신과 발레단을 버리고 줄리안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깊은 슬픔과 고통을 느낀다./사진=공식 웹사이트 캡처. Johan Persson
매튜 본 '레드 슈즈' 공연 장면. 붉은 색 긴 가운을 입은 '레르몬토프(아담 쿠퍼)'는 빅토리아가 자신과 발레단을 버리고 줄리안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깊은 슬픔과 고통을 느낀다./사진=공식 웹사이트 캡처. ⓒJohan Persson

또 하나의 인상적인 장면은 줄리안을 해고한 레르몬토프에 반발해 함께 발레단을 그만둔 빅토리아가 이스트 엔드에 위치한 뮤직홀에서 발레에 아크로바틱 댄스를 접목한 코믹하고 대중적인 공연을 선보이는 부분이다.

복화술과 캉캉 춤, 버라이어티 쇼와 같은 공연을 선보이는 무대 뒤에서 빅토리아는 트라우마로 인한 ‘환각’을 경험한다. 레르몬토프의 실제 모습을 본 것인지 환영을 본 것인지 혼란을 겪던 빅토리아는 줄리안을 포함한 무대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비웃는 환각 속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런던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줄리안과 빅토리아의 침실 장면은 두 사람이 겪고 있는 내면의 소용돌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잠든 아내 몰래 일어나 갑자기 영감이 떠오른 듯 피아노 앞에 앉아 작곡에 열중한 줄리안을 발견한 빅토리아는 그에게로 다가가 악보를 덮어버린다.

매튜본 '레드 슈즈' 공식 시네마 트레일러의 한 장면. 현실적 삶과 꿈의 성취 사이에서 분투하던 '빅토리아(애슐리 쇼)'는 점점 더 환각을 겪으며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사진=트레일러 캡처.
매튜본 '레드 슈즈' 공식 시네마 트레일러의 한 장면. 현실적 삶과 꿈의 성취 사이에서 분투하던 '빅토리아(애슐리 쇼)'는 점점 더 환각을 겪으며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사진=트레일러 캡처.

영화 속에서 빅토리아는 발레를 향한 자신의 열망을 숨긴 채 남편 줄리안의 오페라 작곡을 격려하지만 매튜 본의 빅토리아는 억울함과 원망, 후회를 드러낸다. 두 사람의 싸움 장면은 다소 과격하게 느껴질 정도로 폭력성을 담고 있으며, 악보를 빼앗는 아내와 발레 슈즈를 빼앗는 남편은 서로의 꿈을 방해하는 무거운 장애물로 인식된다. 상대를 격려함으로써 예술적 성취를 함께 이루었던 처음의 두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꿈꿀 수 없는 절망으로 인해 불행과 슬픔에 빠진 연인의 설정은 빅토리아가 레르몬토프에게 되돌아가는 서사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또한 줄리안을 향해 느끼는 죄의식과 다시 발레에 몰두하고픈 갈망, 그 사이에서 점점 더 환각을 겪으며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는 빅토리아의 내면을 관객들이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다.

매튜본 '레드 슈즈' 공식 시네마 트레일러 캡처. 꿈꿀 수 없는 절망으로 인해 불행과 슬픔에 빠진 연인의 설정은 '빅토리아(애슐리 쇼)'가 '레르몬토프(아담 쿠퍼)'에게 되돌아가는 서사에 설득력을 부여한다./사진=트레일러 캡처.
매튜본 '레드 슈즈' 공식 시네마 트레일러 캡처. 꿈꿀 수 없는 절망으로 인해 불행과 슬픔에 빠진 연인의 설정은 '빅토리아(애슐리 쇼)'가 '레르몬토프(아담 쿠퍼)'에게 되돌아가는 서사에 설득력을 부여한다./사진=트레일러 캡처.

정신없이 회전하는 프로시니엄 아치를 넘나들며 레드 슈즈를 신은 소녀와 자신을 혼동하고, 죽을 때까지 춤을 추도록 강요하는 제화공이 레르몬토프가 되며, 소녀를 찾아 헤매는 소년이 줄리안으로 변하는 ‘환상’은 결국 무대를 뚫고 들어온 증기 기관차라는 혹독한 ‘현실’에 치여 쓰러지는 순간 멈춘다. 발레 공연 속 주인공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 발목에 묶여 있는 레드 슈즈의 끈을 풀어줄 것을 요청하는 빅토리아는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이탈리아의 미술 평론가 리오넬로 벤투리는 “예술에 있어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에 예술이 어떻게 공헌하느냐”라고 말했다.

매튜본 '레드 슈즈' 공식 시네마 트레일러의 한 장면. 춤 추는 일을 멈출 수 없었던 '소녀(Girl)'는 마침내 사랑하는 '소년(Boy)'의 품 안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소녀는 자신의 발목에 묶여 있는 레드 슈즈의 끈을 풀어줄 것을 마지막으로 요청한다./사진=트레일러 캡처.
매튜본 '레드 슈즈' 공식 시네마 트레일러의 한 장면. 춤 추는 일을 멈출 수 없었던 '소녀(Girl)'는 마침내 사랑하는 '소년(Boy)'의 품 안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소녀는 자신의 발목에 묶여 있는 레드 슈즈의 끈을 풀어줄 것을 마지막으로 요청한다./사진=트레일러 캡처.

매튜 본의 ‘레드 슈즈’는 현실적 삶과 꿈의 성취 사이에서 행복을 찾고자 분투하는 젊은 커플의 모습과 성취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삶에 집착하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삶의 균형을 잡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전달한다.

삶에 무엇이 더 중요한가는 개인에 따라 다르게 작용하겠지만 무언가를 희생해야만 한다는 법칙은 누구에게나 모질고 혹독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빅토리아에게 연민을 품는 것은 그녀의 삶에 닥친 혼란이 비단 그녀의 것만이 아님을 인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 가족, 일, 건강, 여가와 자유, 의무 사이에서 끊임없이 선택을 강요받는 현대인의 삶에 평화와 안식이 가능할까? 희생 없는 성취라는 ‘꿈’은 결코 이룰 수 없는 희망인 것일까?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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