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차 세계대전 참호 속 비극 체험에 집중한 제스로컴튼 프로덕션 3부
- 2013~2014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화제작
- 국내 공연 전석 매진 '흥행 신화'를 낳은 작품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전쟁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과 돈의 역사'의 저자 던컨 웰던(Dauncan Weldon)은 “전쟁과 폭력은 인류가 제도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줄곧 그 제도를 규정해 왔다”라고 말한다.
그는 “아마도 최초의 정치 조직은 신체적으로 강한 자들이 직접 농사를 짓는 것보다 남에게 위협을 가해 식량을 빼앗는 게 훨씬 편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전쟁은 분명 엄청난 피해와 대가가 따르고 “인간이 저지르는 가장 비합리적인 행동”으로 보이지만, “인류 역사 속 경제적 성취에 무엇보다 큰 영향을 미쳐왔음”을 강조하는 웰던은, “제도와 유인(incentives), 전쟁의 관계”를 살펴봐야만 왜 계속 전쟁이 발생하는지 통찰할 수 있다고 피력한다.
웰던에 따르면,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전쟁이 얼마나 큰 인적·경제적 피해를 가져오는지 인지하는 이유는 20세기에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전쟁은 이전 시대의 전쟁과 양상이 달랐고, “고폭탄과 공중 폭격, 원자폭탄의 등장”과 “적국의 경제적 기반과 생산 능력을 의도적으로 파괴하는 경제전 전략”으로 인해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무시무시한 물리적 파괴”를 경험하도록 만들었다.
국가들은 전쟁을 이어갈 수 있도록 사회구조 전체를 “군사적 목적에 따라 재편”했고, 생산한 자원의 절반 이상을 모두 전쟁에 쏟아부었다. 19세기 이전에는 전쟁을 통해 나라가 부유해지고 사람들의 소득이 오르는 경우가 있었지만, 20세기의 전쟁은 “승전국조차 전쟁의 여파로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음”을 깨닫도록 만들었다.
최근 7년 만에 삼연으로 돌아온 연극 '벙커 트릴로지(The Bunker Trilogy)'가 서울 공연 195회 전 회차를 ‘전석 매진’으로 성황리에 마무리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참호를 배경으로 서양의 고전으로 불리는 '모르가나', '아가멤논', '맥베스'의 이야기를 재해석한 3부작 시리즈인 '벙커 트릴로지'는 2013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매진을 기록하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2014년 애들레이드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최고 연극상을 수상한 '벙커 트릴로지'는 같은 해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또다시 매진을 기록했고,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초청작으로 한국 관객들에게 소개되었다.
이후 제이미 윌크스(Jamie Wilkes) 극작, 제스로 컴튼(Jethro Compton) 연출의 '벙커 트릴로지'는 2016년에 지이선 작가(각색/작사), 김태형 연출로 국내 초연을 선보였으며, 초연과 2018년의 재연 모두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매회 단 100명의 관객만 ‘참호’ 속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비극을 마주할 수 있는 희소성과 참호에 실제로 갇힌 듯 좁은 공간에서 몰입하는 연극적 체험은 관객으로 하여금 3부작 모두를 경험하고 싶은 갈증을 느끼게 했다.
옴니버스 형식으로 75분간 따로 펼쳐지는 세 편의 이야기는 서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세 편의 공연을 모두 관극하고 나면 전체적으로 맞물리는 지점들을 깨닫게 되는 특징이 있다.
영국 초연 당시부터 가장 관심을 받은 부분은 ‘1차 세계대전의 참호(벙커)’라는 복제 공간을 조성해 몰입형 환경을 구축하고, 잘 알려진 세 편의 고전을 ‘공간’에 맞게 재구성했다는 점이었다.
컴튼은 짧은 공연 3부작이라는 선택에 대해 “페스티벌에 적합한 형식”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데, 한 공연장에서 세 가지 다른 작품을 선보일 수 있고 관객이 한 작품을 인상적으로 느꼈다면 나머지 두 작품도 보게 된다는 점에서 “마케팅이 수월하다”고 덧붙인다.
하지만 작품별 차별화를 분명히 하면서도 관객이 세 작품의 연결고리를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기에 작가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 된다.
2013년 초연 당시 인터뷰에서 컴튼은, 어떤 이야기를 전달해야 할지 결정하기도 전에 ‘참호’라는 공간이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공간과 제작 규모에 맞춰 “세 작품 모두 세 명의 남자 배우와 한 명의 여자 배우로 구성”하는 방식을 적용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제이미 윌크스가 '모르가나'와 '아가멤논'의 대본을 먼저 완성했고, 두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를 도출할 세 번째 작품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다.
“서로 유사하면서도 충분히 차별화될 수 있는 이야기”는 2012년에 컴튼이 옛 교도소 지하실에서 공연하려고 했던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재해석하는 방향으로 결정되었다. 권력에 대한 욕망과 광기, 피로 물든 손과 어둠, 죽음이 지배적인 '맥베스'는 3부작의 종착지로 적절하게 느껴졌다.
국내 공연의 경우, 한국 제작진의 각색이 상당히 많이 더해진 특징이 있다.
특히 '아가멤논'은 1차 세계대전과 같은 시대적 배경에 있는 여성참정권 운동 ‘서프러제트(suffragette)’의 맥락을 더해 능동적인 여성 인물을 그리고자 창작된 부분이 있으며, '모르가나' 역시 새로운 인물이 추가되었고, '맥베스'에도 “타올라라, 타올라라, 찬란한 촛불이여”와 같은 특정 대사들이 덧붙여졌다.
2016년 국내 초연 당시 프레스콜에서 지이선 작가는 “각색된 점을 꼽자면 안 된 부분을 꼽는 게 더 빠를 정도다”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따라서 국내 공연은 원작의 기본적인 ‘참호’라는 설정과 1차 세계대전을 중심으로 둔 고전의 재해석, 3부작의 연계성과 독립성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상당히 자유로운 각색을 취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컴튼이 3부작을 요약해 설명하는 “'모르가나'는 젊은 병사들의 순수함을 다루고 있고, '아가멤논'은 고향에 남겨진 이들을 조명하며, '맥베스'는 전쟁의 정신적·심리적 공포와 맞선다”라는 핵심은 국내 공연에도 잘 반영된 듯하다.
'벙커 트릴로지'의 세 작품 '모르가나(Morgana)', '아가멤논(Agamemnon)', '맥베스(Macbeth)'는 모두 전쟁터의 ‘참호(벙커)’를 배경으로 한다.
1차 세계대전은 기관총과 포병 화력의 발전으로 방어자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참호를 파고 양측이 대치하는 교착 상태가 계속되었고, 지리멸렬한 소모전으로 이어졌다.
병사들은 좁은 참호 안에서 진흙과 쥐, 시체 썩는 냄새, 전쟁 신경증에 시달리며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참혹한 전장 생활을 계속해야만 했다.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독가스 살포, 공중 포격, 화염방사기와 같은 현대적 무기가 투입되었지만, 수개월 동안 수십만 명의 희생자를 내면서도 전선은 몇 킬로미터밖에 움직이지 않았다.
양측 참호 사이에 놓인 ‘무인지대(no man's land)’는 적의 포격에 완전히 노출될 수밖에 없는 위험 지역이었다. 따라서 무인지대를 건너는 일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지휘관들은 70여 년 전에 있었던 유럽 강대국 간의 전쟁을 기준으로 1914년에 시작된 세계 대전이 어떻게 전개될지를 예상했다. 그들은 포병의 화력이 얼마나 향상되었는지, 폭탄의 파괴력이 얼마나 달라졌는지에 대한 지식이 없었고, 경험 또한 부족했다.
참전국들은 세계 대전이 빠르게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총력전’으로 향하며 4년간 지속되었고, 약 1,000만 명의 군인이 목숨을 잃었다.
'벙커 트릴로지'는 실제로 공중 폭격과 포격이 발생하고 있는 ‘참호’를 그대로 옮긴 것 같은 공간을 구축하기 위해, 공연장 안으로 들어서는 입구에서부터 쌓인 눈과 모래주머니, 군번줄, 가스램프, 전투모 등을 관객이 마주하도록 한다.
관객은 멀리서 들려오는 포격 소리와 천장과 바닥이 흔들리듯 느껴지는 미세한 진동을 감지하게 된다. 땅을 파서 만든 지하 참호 안에 있는 듯 느끼는 관객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들과 마주한다.
삼면을 채운 관객은 좁은 공간에서 공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가 하면, 특정 역할로 공연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공연 시작 전 안내에서부터 관객은 ‘병사들’로 불리며, ‘벙커 안의 수칙’에 대해 듣게 된다. 협소한 공간으로 인한 제약과 폐소공포증의 위험 등에 관한 안내 사항은 전쟁의 상황에서 병사들이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 긴장을 고스란히 관객이 인지하도록 만든다.
역사학자 앨런 포러스트(Alan Forrest)에 따르면, 양차 세계 대전은 “시민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군대의 황금기”였다.
민족의식이 깊이 뿌리내린 상태에서 시민들은 “자기희생이 요구되는” 전쟁에 국가가 “징집된 시민 군대”를 갖추는 일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영국의 경우, 애국심에 호소하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자원병을 모집할 수 있었는데, “1914년 8월 4일과 9월 12일 사이, 5주 동안에만 약 48만 명이 자원입대”할 정도로 열기는 뜨거웠다고 한다.
3부작 가운데 '모르가나'는 아서왕의 전설에 나오는 모험을 떠나듯 “영웅이 될 기회”를 꿈꾸며 “위대한 전사들”이 되어 귀환할 수 있을 줄 알고 자원한 청년 병사들이 참호 속에서 겪는 트라우마를 드러낸다.
어려서부터 함께 성장한 청년들은 자원입대를 독려하는 교장 선생님의 연설을 듣고 참전했다.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 이름으로 자신들을 부르며, 대영제국의 위상을 보여주겠다며 전쟁터로 온 병사들은 함께 입대한 친구들 10명을 잃고 오직 3명만이 남은 채로 참호 속에서 성탄절을 맞이하고 있다.
‘아더(아서), 랜슬롯, 가웨인’으로 불리는 병사들은 양측이 묵시적으로 서로 총을 쏘지 않는 잠깐의 휴전 상태 속에서, 가웨인이 무인지대에서 봤다는 ‘휘파람을 부는 여자’에 관해 논쟁한다.
가웨인은 분명 형체가 있는 여자라고 주장하지만, 아더와 랜슬롯은 무인지대에는 누구도 있을 수 없다고 반박한다.
랜슬롯은 가웨인이 상대가 원하는 대로 모습을 바꾸는 전설 속 모르가나를 본 것이라면서,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비아냥거린다. 화가 난 가웨인은 참호 밖으로 나가고, 아더와 랜슬롯은 가웨인에 대해 불안과 두려움이 섞인 걱정을 드러낸다.
관객은 가웨인이 무인지대에서 여자를 만나 나누는 대화와 랜슬롯이 꾸는 꿈과 환상, 아더의 기억을 모두 만나게 된다.
환청처럼 들리는 휘파람 소리와 함께 등장하는 여인은 때로는 아더의 약혼자(그웬)로, 랜슬롯의 꿈속에 등장하는 그웬으로, 또 가웨인이 무인지대에서 만나는 프랑스 여자로 변화한다.
관객은 병사들이 각자 참혹한 현실을 버텨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다는 것과, 친구들의 비극적인 죽음 가운데 참호 안에서 발생한 ‘가레스’의 죽음이 그들의 마음을 가장 고통스럽게 짓누르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살고 싶은 욕망과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 무겁게 내려앉으며 압도하는 죄책감, 피할 수 없는 공포 속에서 병사들은 환영과 환상, 환각 외에 도피할 곳을 찾지 못한다.
아서 왕의 아내인 기네비어 왕비의 웨일스어 이름 '그웬(Gwen)'이 '하얀 유령'을 의미한다는 점은 웨일스 신화를 비롯한 여러 전설에서 각기 다르게 묘사되는 '모르간 르 페이(Morgan le Fay)'와 연계되며, 상대가 원하는 존재로 변신하는 마녀 ‘모르가나’로 제시되지만, 사실상 그녀는 병사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불러낸 환각이자 환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환상은 애써 잊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영원히 지우지도, 끝내 죽음에 이를 것이라는 공포를 이기지도 못한다. 공포와 절망, 트라우마를 끝없이 견디는 것보다 무인지대로 걸어 들어가 적군의 목표물이 되는 것을 선택할 정도로 전쟁터의 시간은 최악의 악몽이자 비극이 된다.
'모르가나'가 아서왕의 전설을 모티브로 활용했다면, '아가멤논'은 고대 그리스 작가 아이스킬로스의 동명 비극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다.
영국의 여성참정권 운동은 평화적 시위가 변화를 낳지 못하자 폭력적인 방식으로 전환된다. 상점 유리창 파손, 우체통 폭파, 공공건물 방화 등의 저항은 여성들의 체포와 투옥으로 이어졌고 상당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1918년 여성 투표권의 부분적 인정을 가져왔다.
특히 1913년 에밀리 데이비슨(Emily Davison)이 경마장에서 달리는 말 앞에 뛰어들며 투신한 사건은 기폭제가 되었다. '아가멤논'은 과격 시위에 가담해 체포될 위기에 놓인 영국 여성 크리스틴이 독일로 도피해 저격수 장교 알베르트를 만나 결혼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비극을 맞는 플롯을 구축한다.
트로이 전쟁을 위해 그리스 연합군이 출항할 수 있도록 첫딸을 제물로 바친 아가멤논의 이야기는 만류하는 애원에도 불구하고 임신한 아내를 홀로 두고 금방 돌아오겠다며 전쟁터로 떠난 알베르트에게 반영된다.
길어지는 전쟁 속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적국인 영국에서 온 크리스틴이 라디오 뉴스에서 칭송하는 독일의 명사수 영웅 알베르트의 부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적대감을 드러낸다.
결국 영국군에게 동생을 잃고 분노한 한 독일 남자가 침입해 크리스틴과 알베르트의 아기를 베개로 질식시켜 죽이고, 크리스틴은 오열하며 처절한 몸싸움 끝에 남자를 죽인다.
굶주림과 외로움, 절망, 고통 속에 지쳐가는 크리스틴에게, 알베르트의 먼 친척이자 그녀를 몰래 좋아하는 유대인 요한은, 영국 첩보국이 제안한 성탄절 휴가로 귀환하는 알베르트를 죽이는 작전명 ‘아가멤논’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을 종용한다.
자신을 속이고 딸을 제물로 바친 남편 아가멤논에게 복수하는 클리타임네스트라의 서사를 크리스틴에게 적용한 플롯은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을 교묘하게 이용하며, 크리스틴에게 남편을 죽이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부여한다.
아내가 보낸 편지를 뜯을 용기가 없어서 읽지 않은 남편은 아이의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 장교이지만 처음 투입된 실전에서 죽음의 공포와 허무, 절망에 무너져 내린 알베르트는 적의 저격수를 사살하는 임무에만 집착한다.
끝내고 싶지만 끝낼 수 없는 전쟁에 사로잡힌 알베르트는 크리스틴에게 사냥터에서 죽어가는 사슴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총을 쐈듯이 자신의 고통을 끝내달라고 부탁한다.
'맥베스'는 원작의 모티브를 활용하기보다는 극중극의 틀을 더해 연합군의 승리를 축하하는 전야제 연극으로 부대 안에서 장군과 병사들이 공연을 하는 구성을 취한다.
1차 세계대전이 4년 만에 종료된 1918년 11월 11일을 배경으로 하는 '맥베스'는, 방어선을 구축한 양측이 참호를 향해 서로 포격을 퍼붓고 돌격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공격 방법이 없었던 전선에서, 100야드도 전진하기 어려웠던 영국군 내의 지휘부와 병사들의 갈등을 조명한다.
관객은 마크 장군의 입장에 기립하는 신병들로, 전야제 연극 공연의 관객으로, 극 속 연회장의 손님들로 경계를 넘나들며 참여하게 되는데, 공연장 안으로 들어오는 길에 걸려 있는 군번줄을 하나씩 가져와 목에 걸고, 마지막 장면에서 전쟁터에서 사망한 전우들을 위해 군번줄을 손에 들고 함께 흔들면서 추모하게 된다.
권력에 대한 욕망과 예언, 살인, 잠들지 못하는 맥베스, 씻을 수 없는 피, 소음과 분노로 가득한 세상, 복수와 광기, 찰나의 촛불처럼 사라지는 삶 등 셰익스피어 원작의 주요 장면들이 그대로 축약된 극중극은, 마크 장군이 어떻게 폭군이 되었는가와 면밀하게 연결된다.
마크 장군과 동료 장교 벤, 야전 병원 간호사 릴리, 동생과 함께 참전한 병사 매튜가 겪은 일들은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공연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교차하며 연결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벙커 트릴로지'의 '맥베스'가 겨냥하는 바는 1890년대 이전의 전술만을 공부한 탓에 새로운 형태의 전쟁 양상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한 지휘부가 얼마나 많은 아군의 희생을 낳았는지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다.
변화한 화력의 전쟁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명령을 내리는 장군들은 병사들을 장기판의 말처럼 여기면서 진군을 명령했다.
적군에 의해 사살되거나 폭격에 맞아 죽는 것이 아니라, 아군에 의해 죽음에 이르는 일이 더 많아졌던 전쟁의 막바지는 셰익스피어의 원작이 드러내는 멈출 수 없는 욕망과 광기의 소용돌이와 연결된다.
'벙커 트릴로지' 3부작에는 베개, 촛불, 군번줄 등의 소품이 공통으로 등장해 상징성을 가지고 잠, 죽음, 삶의 취약함, 전쟁과 같은 메시지를 전달한다.
또,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1차 세계대전 당시 연락병으로 참전했을 때의 모습을 엿보도록 만든다.
관객은 원작과 작품 사이의 유사점을 떠올리는 것 외에도 세부적 디테일의 연결점을 인식하고 숨겨진 의미를 끝없이 파악하게 되는데, 각 작품에 사용된 음악과 소품, 연출적 포인트가 암시하는 것들이 상당히 많은 편이다. 따라서 그러한 부분들을 서로 연결하고 맥락을 찾는 재미가 존재한다.
역사학자 카렌 하게만(Karen Hagemann)은 “1차 세계 대전이 고도로 산업화된 최초의 대규모 전쟁”이었다고 말한다.
전쟁이 “마르스의 선물이 아니라 저주”임을 일깨운 20세기 초의 1차 세계대전은 “전쟁의 경제사”에 엄청난 파괴성과 막대한 피해를 인지하게 만든 “큰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100여 년이 지난 지금, 세계는 또다시 전쟁을 일으키며 위험하고 불안한 비극의 길로 향하고 있다. 지난 시간의 교훈으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어리석음, 그 어리석음이 빚어내게 될 상상할 수 없는 크기의 죽음과 파괴에서 벗어날 길을 세계가 찾을 수 있을까? 언제까지 인간은 전쟁의 역사를 지속하려는 것일까? 3월 22일까지 세종예술의전당.
-
주하영 칼럼니스트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상지대 겸임교수, 대림대 겸임교수, 한국외국어대 객원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공학대학교 지식융합학부(교양교육센터)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 《한국연극》 편집위원과 한국연극평론가협회 편집위원 및 이사, 세계문화예술경영연구소 초빙연구원, 외국문학연구소 초빙연구원을 역임했다.
- Copyrights ©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