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사기' 속 도미전 설화 바탕 소설 '몽유도원도' 원작의 창작 뮤지컬
심층 문화 비평 칼럼 <앨리스 박사의 문화로 보는 세상풍경>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주하영 칼럼니스트가 또 하나의 새 칼럼 <주하영 평론가의 짧은 단상>을 선보입니다. 짧은 형식 속에 담긴 자유롭고 날카로운 문화적 통찰을 기대해 주세요. [편집자주]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도원(桃源)이란 '복숭아꽃(桃)이 흐르는 수원지(源)'라는 뜻으로 ‘이상향’을 일컫는다.
중국 동진 시대의 시인 도연명이 지은 ‘도화원기(桃花源記)’에 나오는 복숭아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별천지를 빗댄 말인 ‘도원’은, 한 어부가 물길을 따르다 우연히 발견하게 된 속세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는 이상적인 곳을 말한다.
조선 전기의 화가 안견은 1447년에 세종대왕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무릉도원에 대한 묘사에 기반해 수묵담채 산수화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를 그렸다.
안평대군의 3일간의 꿈 이야기를 듣고 안견이 3일 만에 완성한 것으로 알려진 몽유도원도는 기암괴석과 복숭아꽃 풍경을 중심으로 태평성대를 표현했는데, 안평대군의 정치적 이상세계를 담은 그림으로 해석되곤 한다.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는 최인호 작가의 1995년 소설 ‘몽유도원도’를 원작으로 한 창작 뮤지컬 '몽유도원'이 막공을 앞두고 있다.
고려 인종 23년(1145)에 김부식이 왕명에 따라 펴낸 역사책인 ‘삼국사기(三國史記)’ 제48권 열전(列傳)에 기록된 ‘도미 처 설화(都彌 妻 說話)’를 원작으로 한 소설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본 도원을 접목해 상상력을 발휘한 작품이다.
최인호는 ‘작가의 말’에서 “우리나라의 설화 가운데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빌려와 낡은 고서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의 소설”을 쓰고 싶은 바람을 갖고 있었음을 피력하는데, 안견의 그림 제목을 빌려와 “꿈속에서 노닐던 도원경”의 세계를 ‘도미전(도미 처 설화)’에 접목하고자 했다고 설명한다.
그는 현실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생(生)이 “안평대군이 꾸었던 한바탕의 짧은 백일몽”과 다를 바 없음을 강조하면서, 도미전 설화가 “죽음을 뛰어넘는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사랑의 위대함”을 각인시키고 확산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뮤지컬 '몽유도원'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신념 속에 한국적 미학을 바탕으로 한 보편적 감동을 겨냥하며, 헛된 욕망의 파멸과 도원(이상향)의 의미, 순수한 사랑의 주제를 아름다운 수묵담채화가 무대 위에 ‘꿈’처럼 펼쳐지듯 구현해 낸 작품이다.
“사실적 재현보다 상징적·시각적 표현에 집중”하는 연출을 목표로 한 무대 공간은 어부가 만났다던 ‘도원’을 실제로 엿본 듯,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려진 ‘몽환적인 세상’을 여백의 미와 함께 아름답게 구현한다.
한지에 검은 먹의 농담만으로 그려낸 수묵담채화와 옅은 색을 덧입힌 채색화의 느낌이 살아있는 영상과 조명의 대비, 빠르게 전환되는 무대배경과 장치의 움직임, 동양의 절제된 미를 담은 한복 의상과 서양 오케스트라와 국악기의 조화가 두드러지는 음악은 흥미로움을 자아낸다.
무엇보다 선녀들과 신하들, 마을 주민들뿐 아니라 운명을 건 한판을 벌이는 내기 바둑의 ‘흑돌’과 ‘백돌’을 도맡으며, 한국 무용이 접목된 안무로 화려함과 역동성을 더하는 앙상블의 춤은 감탄을 불러온다.
총 27곡으로 구성된 뮤지컬 넘버(노래)의 경우, 판소리와 정가, 국악의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현대 뮤지컬 작법과 어우러지도록 한 특징이 있다.
인물 캐릭터에 따라 음악 스타일을 다르게 적용하는 넘버는 “감정을 연결하고 극의 몰입도를 높일 수 있도록” 창작되었다.
국악의 전통 리듬과 현대적 멜로디가 교차하는 음악과 넘버는 동양의 미를 강조한 무대 및 의상과 함께 동·서양 악기의 소리와 조화를 이루며, 도미전 설화 속 배경인 백제 시대로 회귀한 느낌뿐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꿈속 공간 혹은 옛 시대의 알 수 없는 곳으로 들어간 듯한 착각과 몰입의 결과를 낳는다.
소설 원작은 사실 뮤지컬로 만들기에는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폭력적이며 잔혹한 측면이 있다. 소설은 열녀 설화의 원형처럼 여겨져 온 ‘삼국사기’ 속 이야기의 기본 골격을 그대로 따르지만, ‘여경’이라고 불리던 백제 제21대 개로왕(蓋鹵王) 14년에 불길한 징조로 여겨졌던 “일식(日食)이 있었다”라는 기록을 중심으로, 난잡한 폭군의 과도한 권력의 횡포를 현재의 관점으로는 상당히 불편하게 여겨지는 요소들을 담아 그려낸 측면이 있다.
소설은 도미전 설화에 ‘몽유도원도’에서 영감을 얻은 설정을 덧붙인다. 여경은 용상에서 낮잠에 빠져 “억겁을 통해 사랑해 온 여인”과 함께 사는 꿈을 꾸고, 깨자마자 화공을 불러 꿈속에서 본 아름다운 여인을 그리도록 한 후, 전국을 수소문해 그림과 똑같은 여인을 찾는다.
왕이 꿈에서 본 여인을 욕망한다는 점은 출세하려는 기회주의자 신하 ‘향실’의 교활한 계략과 음모를 불러온다. 소설은 여경이 ‘도미’의 아내 ‘아랑’을 빼앗기 위해 내기 바둑을 두는 설정과 갈대를 뽑아 얼굴에 상처를 내 엉망으로 만드는 아랑의 선택 등 세부 장면을 더한 특징이 있다.
뮤지컬은 설화에 상상을 덧붙인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꿈속에서 본 여인’이라는 설정을 그대로 반영했다.
여경이 도미의 두 눈을 멀게 해 강에 배를 띄워 보낸 장면과 부부의 연을 맺은 도미와 아랑의 극진한 사랑, 고통만 가져온 아름다움을 지우기 위해 온 얼굴에 상처를 내는 아랑의 선택, 피리를 부는 눈먼 남편 도미와 머리쓰개를 깊게 눌러쓰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아내 아랑이 되찾은 작은 평화 등의 서사 또한 그대로 적용했다.
하지만 세계 진출을 염두에 둔 작품인 만큼 현재 세대에게 불편하게 여겨질 요소들은 소설 원작과 설화에서 대부분 제거하거나 변경한 것으로 보인다.
아랑이 몸종을 설득해 대신 수청을 들게 하고, 이후 분노한 여경이 몸종을 칼로 찔러 죽이는 등 성폭력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들은 사라졌다.
왕 앞에 불려 온 그림 속 여인과 닮은 전국 각지의 여인들을 하룻밤 노리개로만 여기는 여경의 타락한 성정 또한 반영되지 않았다. 백제에 끝까지 저항한 부족의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노예만도 못한 “축생들”이라는 비하와 멸시를 쏟아내는 여경과 향실의 대화 또한 적용되지 않았다.
뮤지컬 '몽유도원'은 부여 출신의 무신 가문 ‘해씨’와 위례성 출신의 문신 가문 ‘진씨’가 팽팽하게 대립하며 세력을 지키고자 하는 가운데, 반정(反正)으로 왕위에 오른 여경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 ‘불안’과 싸우며 냉담한 삶을 살아온 것으로 설정한다.
어떤 여인에게도 마음을 내어주지 않던 여경은 꿈속에서 한 여인(아랑)을 본 후, 왕비를 간택하라는 해씨 가문과 진씨 가문의 독촉을 물리친다.
막이 오르자마자 수묵 애니메이션으로 펼쳐지는 여경의 꿈 장면들은 권력의 자리에서 평안을 누릴 수 없는 왕의 내면에 자리한 두려움과 상처, 불안과 욕망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복숭아꽃 가지를 든 아름다운 여인은 여경의 내면이 갈구했던 평안이자 구원의 형상화이지만, 불안으로 점철된 외로움 속의 여경은 향실과의 사냥 중에 팔을 다치면서 마주하게 된 도미의 아내 아랑을 향한 욕망을 집착으로 키워나간다.
어쩌면 여경이 갖고 싶었던 것은 세속을 벗어나 아름다운 아내 아랑과 신실한 사랑을 나누며 지도자로서 목지국 후손들을 이끌고 평화로운 삶을 구축한 도미의 행복,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피로 물든 왕좌에 앉은 속세의 권력자는 결코 누릴 수 없는 진실한 사랑과 평화, 안식, 구원에 대한 간절한 욕망은, 이미 남편이 있는 아내인 ‘아랑’을 자신의 왕비로 세우겠다는 비뚤어진 소유욕과 집착으로 발전된다.
질투심으로 인한 광기는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는 좌절로 인한 분노 속에 폭력으로 과격해지고, 여경은 헤어날 수 없는 욕망의 늪에서 파멸을 향해 나아간다. 소설과 달리 충신으로 변경된 향실은 여경의 폭주를 막아보려 하지만, 여경은 충언을 고하는 향실마저 죽여버린다.
여경의 ‘헛된 꿈’은 부부의 연을 맺은 도미와 아랑의 사랑을 향해 죽음의 칼을 휘두를 뿐 아니라, 역모의 죄를 지은 자의 후손들이라는 철퇴를 피해 은밀한 곳에 정착해 간신히 평화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보금자리를 빼앗고 굶주림과 척박함으로 내모는 횡포와 비극의 원인이 된다.
뮤지컬 '몽유도원'은 달을 신으로 섬기며 삶과 죽음에 관한 제의를 주관하는 제사장 ‘비아’라는 캐릭터를 추가함으로써, 한국 전통 민속 신앙과 의례를 보여줄 수 있는 장면들을 부여한다.
풍요와 다산, 생명력의 근원으로 여겨져 온 ‘달(月)’은 차고 기울어짐으로 농사 주기를 알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에 농경 사회에서 풍요와 안녕을 관장하는 신성한 숭배의 대상으로 여겨져 왔다.
지도자인 도미와 함께 신관으로서 마을을 이끌어온 비아는 도미와 아랑의 혼례와 시신을 찾을 수 없는 고혼(孤魂)을 달래는 진혼 의례를 주관하는데, 백제 시대의 토착 의례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동양 철학에서 욕망과 탐욕은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근본 원인이다. 과욕과 집착, 애욕은 고통과 혼란, 타락과 파국을 불러온다. 평화는 욕심과 갈망에서 벗어나 소박함 속에 작은 즐거움을 찾을 때 그제야 삶에 깃든다.
어쩌면 이상향은 대부분 현실에 존재하지 않거나 실현 불가능한 것이기에 그토록 인간의 갈망을 부채질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도미와 아랑의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그들이 고통 속에 많은 것을 희생하며 어렵게 되찾은 소박한 평화로움이 한없이 소중하고 얻기 힘든 것임을 우리가 깨닫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2월 22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4월 11일부터 샤롯데씨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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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하영 칼럼니스트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상지대 겸임교수, 대림대 겸임교수, 한국외국어대 객원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공학대학교 지식융합학부(교양교육센터)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 《한국연극》 편집위원과 한국연극평론가협회 편집위원 및 이사, 세계문화예술경영연구소 초빙연구원, 외국문학연구소 초빙연구원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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