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365 홍찬선 칼럼니스트 = 걷기는 발견이다. 여러 번 오간 곳을 걷다 보면, 그동안 보지 못했던 사연이 문득 말을 건다.
반가운 눈으로 화답하면 또 다른 것이 ‘나도 여기 있다’며 인사한다. 참으로 신비한 경험이다.
“마음에 없으면 봐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는, '대학(大學)'의 “심부재언(心不在焉) 시이불견(視而不見) 청이불문(聽而不聞 식이부지기미(食而不知其味)”라는 말이 진리임을 깨닫는다.
운현궁이 있는 경운동에서, 운당여관과 조선형평사가 있던 운니동을 지나, 박녹주 명창의 옛집과 오진암터 및 바지락칼국수로 유명한 찬양집이 있는 익선동을 한 바퀴 돌아보는 것이 그렇다.
무언가에 쫓기듯 휘몰아치는 걸음이 아니라 뒷짐지고 느긋하게 진양조로 걷는 맛이 제격이다. 하늬바람이 솔솔 부는 가을에는 더욱 그렇다.
운현궁 옆 교동초등학교 담 아래서 한성사범학교 흔적을 보다
운현궁(雲峴宮)은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살던 집이다. 이곳에서 태어난 그의 아들 명복(命福), 희(凞)가 조선 26대 왕 고종(高宗, 1852~1919)으로 등극한 뒤 궁궐에 견줄 만큼 크게 신축했다.
일제강점기 때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고 지금은 사랑채인 노안당(老安堂)과 안채인 이로당(二老堂)‧노락당(老樂堂), 그리고 운현궁 사당이 있던 곳에 세워진 양관(洋館) 등만 남아 있다.
운현궁 양관은 흥선의 손자인 이준용(李埈鎔, 1870~1917)이 1911년에 지은 것으로, 광복 직후 백범 김구(金九, 1876~1949)가 2층을 집무실로 사용한 적이 있고, 현재는 덕성여대 소유이다.
노안당 이로당 노락당의 현판은 흥선대원군의 스승인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쓴 글씨로 유명하다. 석파(石坡, 이하응의 호)는 노년에 부인과 함께 편안하고 즐겁게 지내라는 스승의 깊은 권유를 깨닫지 못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절대권력을 휘두르면서도 옛것을 개혁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일보다는 쇄국(鎖國)에 올인, 결국 국권을 일제에 빼앗기도록 하는 원인(遠因)을 제공했던 석파는 저승에서 완당을 만나 반성했을까. 참으로 안타까운 조선말의 역사다.
더는 볼 게 없다고 생각한 건 두 마리 개였다
월요일인 걸 깜빡하고 찾아간 게 오히려 행운이었다
꽉 닫힌 문을 뒤로 하고 교동초등학교 담벼락을 더듬다
발밑 낙옆 사이로 한성사범학교터라는 표지석을 발견했다
1895년 4월, 우리나라 최초의 소학교 교원양성학교가
이곳에 있었다는 것을 숱하게 오고갔으면서도 알지 못했다
담장에 새겨진 교동초등학교 교가도 처음 가슴에 보였다
역사는 그렇게 우연의 옷을 입고 필연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 홍찬선, '운현궁에서 보지 못한 것' 전문.
닫힌 운현궁 대문을 뒤로 하고 낙원동 쪽으로 돌아려는데, 교동초등학교 담벼락 아래에서 뭔가 반짝거렸다. 가까이 가보니 ‘한성사범학교 터’라는 동판이 보도블록 사이에 놓여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곳을 100번 이상 오갔을 텐데, 오늘에서야 비로소 눈에 띄었다. 가끔은 하늘을 우러러보듯, 가끔은 땅을 유심(有心)하게 관찰(觀察)하며 걸을 일이다.
한성사범학교는 1984년 9월18일, 소학교 교원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최초의 관립교원학교다. 1895년 4월, 2년제 본과(정원 100명)와 6개월제 속성과(정원 60명)로 개교했다. 1906년 ‘사범학교령’에 따라 3년제 본과와 1년 이내의 예과, 속성과 강습과 등으로 개편됐다. 본과와 속성과 학생에게는 학비를 지급하고 전원 기숙사 생활을 했고, 졸업 후 취직이 보장돼 지원자 수가 많았다. 졸업자들은 본과는 6년, 속성과는 2년 동안 보통학교 교원으로 복무해야 했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로 합병한 뒤인 1911년 ‘조선교육령’으로 폐지됐다.
‘한성사범학교 터’ 동판 위 벽에는 교동초등학교 역사를 설명한 도표가 가득하다. 그중에 교동초등학교의 교가(校歌)의 악보가 있어 눈길을 끌었다.
작사는 교동초등학교를 졸업한 아동문학가 윤석중(尹石重, 1911~2003) 시인이 했고, 손대업(孫大業, 1923~1980) 작곡가가 곡을 붙였다. 가까운 곳에 탑골공원이 있으니, 그곳에서 1919년 3월1일에 일어난 기미독립운동의 삼일정신을 본받아 역사에 빛나는 사람이 되자는 뜻을 담았다.
공부를 잘하나 잘들 노나
북악이 우리를 굽어본다
배움의 고개는 구름 고개
서로 손잡고 올라가자
교동 교동 교동 운현에 터잡은 우리 교동
나라를 찾아준 삼일정신
그대로 간직한 탑골공원
정성을 바쳐서 하는 일에
우리의 공든탑 무너지랴
교동 교동 교동 역사에 빛나는 우리 교동
- 교동초등학교 교가/ 윤석중 작사, 손대업 작곡.
운니동의 운당여관과 조선형평사
운현궁을 돌아 동쪽으로 가다 보면 월드오피스텔이 나온다. 운당여관(雲堂旅館)이 있던 곳이다. 이곳은 본래 순조 때 내관을 지낸 사람이 지은 집이었다. 박귀희(朴貴姬, 1921~1993) 명창이 1951년 사들여 1993년 2월까지 여관으로 운영했다.
가야금병창의 인간문화재였던 박귀희(본명 오계화, 吳桂花) 명창은 경북대학교 경제학과를 중퇴하고, 국악에 전념했다. 1949년, 이응로(李應魯, 1904~1989) 화백과 결혼해 6.25전쟁 때 수덕사 앞의 수덕여관에서 지낸 적이 있다. 이응로는 박귀희와 이혼하고 21세 연하인 이화여대 미대 졸업생과 파리로 떠났다.
운당(雲堂)은 구름 속에 있는 집, 스님들이 좌선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1960년, 정릉에 있던 순정효황후가 머물렀던 별장을 인수해 이곳으로 이전, 운당여관은 객실이 31개나 되는 규모로 커졌다.
운당여관은 안숙선, 안옥선 자매가 박귀희 명창으로부터 가야금병창을 배우는 등 국악의 전승지로 이름을 날렸다.
또 1958년부터 한국기원이 주최하는 국수전 명인전 기왕전 등 각종 바둑대회의 결승전이 열려, ‘한국기원 특별대국실’이란 별명도 얻었다. 2025년 3월에 개봉된 영화 '승부'(감독 김형주, 주연 이병헌 유아인) 마지막 장면에서, 이병헌(조훈현 역)과 유아인(이창호 역)이 대국이 열리는 여관으로 들어서며 이병헌이 “창호, 또 너냐?”라고 하는 곳이 바로 운당여관이다.
운당여관은 1993년에 세원산업으로 넘어가 그 자리에 오피스텔이 지어졌다. 다행히 건물은 남양주 조안면 삼봉리에 있는 종합촬영소로 옮겨 복원됐다.
사람이 떠나면 집도 가고
집이 허물어지면 추억은 역사로만 남아
날마다 희미해진다는 사실을
운당여관터 안내판이 알려주고 있었다
한때 객실을 서른한 개나 거느리고
국수전 명인전 기왕전의 결승대국이 열려
조남철 김인 윤기현 조치훈 조훈현 이창호 9단이 드나들어
한국기원 특별대국실로 불렸던 운당(雲堂)여관은
박귀희 명창이 떠나고
남양주 종합촬영소로 몸이 옮겨진 뒤
월드오피스텔 앞의 손바닥만해 보일동말동한
안내판이 옛사람들을 그리워하는 얼을 안타깝게 보듬고 있었다
- 홍찬선, '운당여관은 안내판만 남고' 전문.
운당여관을 지나 창덕궁(昌德宮)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으로 가다 보면 보도블록에 ‘조선형평사 총본부 터’라는 동판이 있다. 유심하게 자세히 봐야 보일 정도로 크지 않아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조선형평사(朝鮮衡平社)는 백정의 신분해방을 목적으로 1923년 4월25일 경남 진주에서 창립됐다. 전국에 걸쳐 대규모 운동조직으로 발전하면서 1924년4월, 본부를 서울로 이전했고, 1926년 운니동 23번지에 총본부 사옥을 마련했다. 1929년 이후 사회운동단체와의 협동전선을 강조하는 신파와 백정계급의 인권해방과 권익옹호를 고수하는 구파 사이의 노선갈등을 활동이 위축되다가, 일제의 압력으로 1937년 5월 해체됐다.
‘조선형평사 총본부 터’에서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 왼쪽으로 꺾어져 지하철3호선 6번출구로 가는 좁은 골목길을 간다. 이곳은 고려 때부터 마을이 형성된 곳으로, 골목길이 예전에는 조그만 개울이었다. 그곳 골목에 오래된 기와집 벽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소설가 김유정이 사랑했던 명창 박녹주가 살던 집’이라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김유정(金裕貞, 1908~1937)은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재동공립보통학교와 휘문고보 및 연희전문 문과를 다녔다.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소나기'가 당선돼 등단했다.
휘문고보에 다닐 때만 해도 운동장에서 투포환을 가슴에 맞고도 끄덕하지 않을 정도로 건강했지만, 늑막염에 걸린 뒤 박녹주(朴綠珠, 1906~1979) 명창과의 실연이 겹쳐 건강이 급격히 악화됐다.
그런 박녹주 살던 집에 붙어있던 안내문이 이번에 가보니 보이지 않았다. 골목을 잘못 들었나 해서 여러번 왔다갔다 했는데도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예전에 안내문이 붙어있던 집은 그대로인데, 다른 사람이 인수해 안내문을 떼어버린 듯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오진암(梧珍庵)이 있던 곳으로 향했다. 이곳은 조선 말기 서화가 이병직(李秉直, 1896~1973)의 가옥이었는데, 1953년 한정식집으로 등록해 서울시 등록음식점1호였다. 삼청각 대원각과 함께 1970~80년대 요정정치의 근거지로 유명했다.
특히 1972년 7월4일 남북공동성명 때,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박성철 제2부수상이 이곳에 만나 논의한 역사적 장소이다.
2010년9월, 호텔신축을 위해 철거돼 부암동 무계원으로 이전됐다. 무계원은 과거 무계정사지와 가깝다. 무계정사지는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이 안견(安堅, ?~?)에게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하고 정자를 지었다고 하는 장소다.
필자는 초짜 기자 시절이던 1990년대 초, 한두 번 오진암에 간 적이 있다.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기생이 가야금을 켜면서 창을 하던 모습이 가물가물하다. 그때 할머니가 다 된 마담이 7.4공동성명을 만들어 낸 곳이라며 얘기하던 것도 아스라이 떠오른다.
이제 마무리하러 찬양집으로 간다. 3~4년 전쯤 '주역(周易)'을 배우러 다닐 때 선생님과 도반(道伴)들이 함께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찬양집은 1965년 20원짜리 칼국수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이곳 한자리에서 60년 동안 한결같이 바지락칼국수와 만두를 판다.
칼국수 값이 9000원으로 올랐지만, 맛은 한결같아 미식가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찬양집에서 막걸리를 곁들인 바지락칼국수로 경운동-운니동-익선동-낙원동으로 이어진 ‘역사 나들이’를 마감했다.
뽀얗고 시원한 국물이 행복이었다
멸치와 홍합과 바지락과 채소가 듬뿍 어우러져 내는 육수에
주문할 때마다 반죽으로 뽑아 쫄깃쫄깃한 면발이 살살 녹았다
양은잔에 가득 따른 장수막걸리가 딱 어울리며
소설가 김유정을 아프게 한 박녹주의 고택이 자취를 감춘 아쉬움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사르르 날려주었다
- 홍찬선, '찬양집의 바지락칼국수에 취하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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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선 칼럼니스트
시인 겸 소설가. 충남 아산 출신으로 천안고, 서울대 경제학과, 서강대 경영대학원(MBA)을 졸업했다. 한국경제신문과 동아일보 머니투데이 기자를 하면서 서강대 경영학과 박사과정(재무관리전공)과 일본 주오(中央)대학교 기업연구소 객원연구원, 중국 칭화(淸華)대학교 경제관리학원 고급금융연수과정, 성균관대학교 성균인문동양학아카데미 등을 수료했다. 머니투데이방송(MTN) 보도국장, 머니투데이 북경특파원과 편집국장 역임한 뒤, 100세 시대에 제2인생을 살기 위해 2017년 7월부터 시인과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시세계’ 신인상으로 등단(2016년 가을호)한 뒤 시집 ‘틈’ ‘독도연가’ ‘서울특별詩 1, 2, 3, 4, 5’ ‘생명과 사랑’ 등 19권과 부부시화집 ‘그 섬에서 1박2일’ 등 2권을 출간했다. ‘연인’에서 소설 등단(2019)해 소설집 ‘그해 여름의 하얀 운동화’와 장편소설 ‘백석의 불시착’도 출간했다. ‘주식자본주의와 미국의 금융지배전략’ ‘패치워크인문학’ ‘20대 대통령을 위한 경제학’ 등 경제분야 저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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