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하영 365칼럼] 선의와 친절, 구원을 향한 열망...뮤지컬 '팬텀' 10주년
[주하영 365칼럼] 선의와 친절, 구원을 향한 열망...뮤지컬 '팬텀' 10주년
  • 주하영
  • 승인 2025.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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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문화로 보는 세상풍경]
- 2015년 한국 초연 이후 10주년 ‘그랜드 피날레’
- 프랑스 작가 가스통 르루의 소설 '오페라의 유령' 원작 뮤지컬
- 모리 예스톤 작곡·작사⨉아서 코핏 극본의 1991년 초연작
뮤지컬 '팬텀' 10주년 공연 사진. 얼굴의 대부분을 가린 마스크 뒤에 숨은 '팬텀(카이)'은 크리스틴을 향한 수줍은 마음을 제대로 표현조자 하지 못한다./사진= EMK 뮤지컬컴퍼니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2025년 1월, 파리에 위치한 프랑스를 대표하는 오페라 극장 ‘오페라 가르니에(Opéra Garnier)’는 150주년을 맞이했다.

1860년 12월 30일, 나폴레옹 3세는 파리를 현대적인 도시로 개조하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새로운 오페라하우스 건축 설계를 위한 공모전을 발표했다. 170개가 넘는 설계안이 제출되었고, 건축가인 샤를 가르니에는 1차 심사에서 5명의 최종 후보 명단에 올랐지만, 최하위 점수를 기록했다. 가르니에는 2차 심사에서 자신의 설계안을 과감히 변경했다.

'뉴욕타임스'의 저널리스트인 샘 루벨(Sam Lubell)에 따르면, “압도적인 아케이드와 콜로네이드, 파빌리온, 돔, 페디먼트”가 포함된 기념비적인 신바로크 양식의 웅장한 건물은 나폴레옹 3세의 ‘개혁자’로 읽히고픈 욕망과 맞물렸고, 가르니에는 최종 승리자로 선정되었다.

여러 양식을 혼합해 “나폴레옹 3세 양식”이라는 스타일을 창조해 낸 ‘오페라 가르니에’는 1861년부터 건설을 시작했지만 14년 만인 1875년에 마침내 완공되었다.

뮤지컬 '팬텀' 10주년 공연 사진. 프랑스의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인 가스통 르루에 의해 1909년부터 1910년까지 연재된 소설 '오페라의 유령'은 1875년에 완공된 '오페라 가르니에'를 배경으로 한다.
뮤지컬 '팬텀' 10주년 공연 장면. 프랑스의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인 가스통 르루에 의해 1909년부터 1910년까지 연재된 소설 '오페라의 유령'은 1875년에 완공된 '오페라 가르니에'를 배경으로 한다./사진= EMK뮤지컬컴퍼니

1861년, 무대 장치를 위해 지하 16미터까지 파고 내려가는 기초 공사를 진행하던 작업자들은 센 강(Seine River)의 숨겨진 지류를 발견했다. 공사 현장에 가득 들어찬 물을 모두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가르니에는 아치형 천장을 갖춘 거대한 콘크리트 저수조를 설치해 물을 차단하기로 결정했다.

지하 5층, 지면으로부터 약 10미터 아래에 위치한 오페라 극장의 저수 공간은 ‘호수’라고 불리게 되었고, 프랑스의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인 가스통 르루(Gaston Leroux)에 의해 1909년부터 1910년까지 연재된 소설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의 배경이 되었다.

최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는 2015년 한국 초연을 선보인 모리 예스톤(Maury Yeston) 작곡·작사, 아서 코핏(Arthur Kopit) 극본의 뮤지컬 '팬텀(Phantom)'의 10주년 기념 공연이 막을 내렸다.

2015년과 2016년에 뮤지컬 부문 티켓 판매 순위 1위를 기록했고, 제11회 골든티켓어워즈 대상을 수상한 뮤지컬 '팬텀'은 한국 초연 10년째인 올해 다섯 번째 시즌을 선보이면서 ‘그랜드 피날레’를 선언했다.

제작사인 EMK뮤지컬컴퍼니는 프로그램북을 통해, 10주년을 이어온 여정을 마무리하고 “시대의 흐름과 관객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다음 시즌에 새로운 모습을 갖출 것임을 예고했다.

뮤지컬 '팬텀' 10주년 공식 포스터 컷. 제작사 EMK뮤지컬컴퍼니는 그랜드 피날레 시즌으로 뮤지컬 '팬텀' 10주년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시대의 흐름과 관객의 기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모습을 갖출 것을 예고했다.
뮤지컬 '팬텀' 10주년 공식 포스터 컷. 제작사 EMK뮤지컬컴퍼니는 그랜드 피날레 시즌으로 뮤지컬 '팬텀' 10주년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시대의 흐름과 관객의 기대에 부응”하는 새로운 모습을 갖출 것을 예고했다./사진= EMK뮤지컬컴퍼니

1991년 미국 텍사스 휴스턴에서 초연된 뮤지컬 '팬텀'은 르루의 소설 '오페라의 유령'을 기반으로 주인공인 ‘팬텀’의 입장에서 비극성을 강조한 특징이 있는 작품이다.

예스톤은 2018년 뉴욕 웨스트체스터 공연을 위해 진행된 연출가 톰 폴럼(Tom Polum)과의 인터뷰에서, “상당히 낭만주의적인 19세기 이야기”를 “겉모습은 끔찍할지라도 내면에는 아름다움이 빛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품으로 표현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1982년에 토니상 5개 부문을 수상한 뮤지컬 '나인(Nine)'의 작곡가인 예스톤은 이듬해인 1983년, 배우이자 연출가인 제프리 홀더(Geoffrey Holder)로부터 르루의 '오페라의 유령'을 뮤지컬로 창작하면 어떻겠냐는 전화를 받았다.

영화화된 작품을 본 적은 있지만 소설을 읽은 적 없던 예스톤은 “끔찍한 아이디어”라고 반응했고, “공포 스릴러나 다름없는 이야기”를 뮤지컬로 만드는 일에 회의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하지만 홀더는 예스톤에게 원작 소설을 읽어볼 것을 권했고, 다음 미팅에서 예스톤은 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의 꼽추 ‘콰지모도’나 영화 '엘리펀트 맨'의 기형아 ‘조셉 메릭’과의 연계가 가능할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뮤지컬 '팬텀' 10주년 공연 캐스팅 컷.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흉측한 얼굴 탓에 가면으로 모습을 숨기고 숨어 살아가야 하는 ‘팬텀’ 역의 배우들 (왼쪽부터) 박효신, 카이, 전동석.
뮤지컬 '팬텀' 10주년 공연 캐스팅 컷.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흉측한 얼굴 탓에 가면으로 모습을 숨기고 숨어 살아가야 하는 ‘팬텀’ 역의 배우들 (왼쪽부터) 박효신, 카이, 전동석./사진= EMK뮤지컬컴퍼니

태어날 때부터 기형적인 외모로 인해 타인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고 학대와 조롱, 차별의 대상이 되었지만, 내면적으로는 누구보다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갖고 있는 ‘팬텀’이라는 인물은, 예스톤의 상상력을 통해 선한 의도를 가졌으나 비극적인 상황으로 치닫는 ‘연민할 수 있는 인물’로 설정되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불완전함을 딛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는 보편성의 차원에서 팬텀이라는 인물에게 접근하기를 바랐던 예스톤은 집안에 미친 가족 구성원이 있을 경우, 다락방에 몰래 가둬 숨기곤 했던 19세기라는 시대적 배경을 떠올렸다.

그는 만약 오페라 가수인 엄마라면, 태어나면서부터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가진 아이를 극장의 깊은 지하에 숨길 수 있을 것이란 가정을 덧붙였다.

또, 아이가 지하에서 극장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노래와 풍성한 음악들을 끊임없이 들으며 성장했다면, 분명 내면에는 음악이 발현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더했다.

뮤지컬 '팬텀' 10주년 공연 사진. '팬텀'은 '에릭'이라는 이름과 재능을 가졌음에도 추한 외모로 인해 평생을 오페라 극장 지하 호수 근처에서 '유령'처럼 숨어 살아왔다.
뮤지컬 '팬텀' 10주년 공연 장면. '팬텀'은 '에릭'이라는 이름과 재능을 가졌음에도 추한 외모로 인해 평생을 오페라 극장 지하 호수 근처에서 '유령'처럼 숨어 살아왔다./사진= EMK뮤지컬컴퍼니

예스톤은 악의를 품고 있는 어두운 인물이 아니라, 자신의 끔찍한 얼굴과 가면이라는 불행 속에서 유일한 평안으로 느꼈던 “소프라노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빼앗겼을 때, 문제를 해결하고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 비극적인 길로 향하는 안타까운 인물을 창조했다.

예스톤은 노래를 심하게 못하는 ‘카를로타’라는 소프라노가 새로운 극장장의 아내로 모든 오페라의 주연을 맡게 된 돌발적인 상황이 지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주인공(팬텀)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될 것이라고 여겼다.

또, 오페라 극장을 지배하는 두려움의 대상인 ‘유령’으로 인식되는 그의 실제 모습을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카를로타가 지하로 내려보낸 의상 담당자 ‘조셉 부케’와의 마주침이 팬텀에게 우발적 ‘살인’을 저지르도록 만들 것이라고 가정했다.

뮤지컬 '팬텀' 10주년 캐스팅 컷. (왼쪽 위부터) 크리스틴 다에(이지혜,송은혜,장혜린) / 제라드 카리에르(민영기, 홍경수) / 마담 카를로타(리사, 전수미, 윤사봉) / 필립 드 샹동 백작(박시원, 임정모) / 무슈 숄레(문성혁) / 벨라도바(김주원, 황혜민, 최예원) / 젊은 카리에르(정영재, 김희현, 김태석)
뮤지컬 '팬텀' 10주년 캐스팅 컷. (왼쪽 위부터) 크리스틴 다에(이지혜,송은혜,장혜린), 제라드 카리에르(민영기, 홍경수), 마담 카를로타(리사, 전수미, 윤사봉), 필립 드 샹동 백작(박시원, 임정모), 무슈 숄레(문성혁), 벨라도바(김주원, 황혜민, 최예원), 젊은 카리에르(정영재, 김희현, 김태석)./사진= EMK뮤지컬컴퍼니

소설 속 암흑의 주인공 ‘팬텀’에 대한 예스톤의 상상과 가정에서 출발한 플롯은 극작가인 코핏에 의해 비극 속에서도 유머의 순간들이 빛을 발하는 대본으로 발전되었다. 코핏은 새로운 극장장인 ‘알랭 숄레’와 그의 아내인 소프라노 카를로타를 교만하고 이기적인 캐릭터이지만, 많은 웃음을 낳을 수 있는 ‘코믹 릴리프(comic relief)’로 기능하도록 설정했다.

또, ‘에릭(Erik)’이라는 이름과 재능을 가졌음에도 추한 외모로 인해 평생을 묘지로 둘러싸인 극장 지하 호수 근처에서 유령처럼 숨어 살아온 ‘팬텀’이 자신의 아버지이자 전임 극장장인 ‘제라드 카리에르’와 어색한 농담을 나누기도 하는 평범한 측면을 부여했다.

베일에 가려진 팬텀(에릭)의 출생과 부모의 존재, 천재 음악가의 자질을 갖출 수 있었던 배경, 크리스틴의 목소리를 유독 ‘구원’으로 느낀 이유에 대해 나름의 서사를 촘촘하게 부여한 대본은 원작 소설과는 거리가 있지만, 전혀 다른 안타까움과 슬픈 비극을 담고 있었다.

뮤지컬 '팬텀' 10주년 공연 사진. 자신의 끔찍한 얼굴과 가면이라는 불행 속에서 오페라 극장 지하에 숨어 사는 '팬텀(에릭)'은 "소프라노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위안을 느낀다.
뮤지컬 '팬텀' 10주년 공연 장면. 자신의 끔찍한 얼굴과 가면이라는 불행 속에서 오페라 극장 지하에 숨어 사는 '팬텀(에릭)'은 "소프라노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위안을 느낀다./사진= EMK뮤지컬컴퍼니

르루의 소설에서 주를 이루는 라울 샤니 자작과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소프라노 ‘크리스틴 다에’의 러브스토리는 삭제되었고, 스웨덴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자였던 크리스틴의 아버지가 남긴 ‘음악의 천사’와 관련된 맥락도 반영되지 않았다.

뮤지컬 '팬텀' 속 크리스틴은 원작보다 밝은 캐릭터로 등장해 자신에게 보컬 수업을 해주는 가면 속 ‘마에스트로’를 진심으로 연민하고 사랑하지만, 팬텀의 외모에 너무 놀라 돌이킬 수 없는 실수와 상처, 비극을 낳는 인물로 설정되었다.

예스톤에 의하면, 팬텀에게 가면을 벗어 얼굴을 보여줄 것을 청하는 크리스틴의 행동과 관련해 처음에는 ‘호기심’과 ‘선의’라는 맥락에서 접근했지만, 이후 고마움과 사랑의 표현으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팬텀(에릭)의 과거에 대해 알게 된 크리스틴은 그의 어머니가 일그러진 얼굴을 아름다움으로 받아들였듯, 자신 역시 사랑으로 그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 여기지만, 충격을 감당하지 못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탓에 비극을 불러오게 된다.

뮤지컬 '팬텀' 10주년 공연 사진. 작곡 및 작사를 맡은 모리 예스톤은 선한 의도를 가졌으나 비극적인 상황에 처한 '연민'할 수 있는 주인공 '팬텀(박효신)'을 그려낸다.
뮤지컬 '팬텀' 10주년 공연 사진. 작곡 및 작사를 맡은 모리 예스톤은 선한 의도를 가졌으나 비극적인 상황에 처한 '연민'할 수 있는 주인공 '팬텀(박효신)'을 그려낸다./사진= EMK뮤지컬컴퍼니

크리스틴은 시골에서 파리로 와 거리에서 오페라 악보를 팔며 노래를 부르던 중 오페라 가르니에의 후원자인 ‘필립 드 샹동’ 백작의 눈에 띄게 된다.

샹동 백작은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과 같은 목소리를 가진 그녀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네면서, 오페라 극장장을 찾아가 보컬 수업을 받게 해 달라고 청할 것을 권한다. 하지만 새로 부임한 극장장 숄레와 카를로타는 크리스틴에게 무대 의상을 정리하는 일을 맡긴다.

오페라가 공연되는 곳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쁨에 들뜬 크리스틴은 홀로 노래를 부르며 의상을 정리하고, 카를로타의 소음과 같은 발성 연습에 귀를 틀어막았던 팬텀(에릭)은 크리스틴의 목소리에 “고향”을 찾은 듯 평온함을 느낀다.

뮤지컬 '팬텀'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아름다운 음악’ 속에서만 찾을 수 있었던 에릭(팬텀)이 크리스틴의 “천상의 목소리”를 “음악의 천사”가 자신에게 보내준 “구원”으로 여긴다는 점을 부각한다.

뮤지컬 '팬텀' 10주년 공연 사진. 자신의 존재 의미를 아름다운 음악 속에서만 찾을 수 있었던 '팬텀(에릭)'은 '크리스틴'의 천상의 목소리를 '구원'으로 여긴다.
뮤지컬 '팬텀' 10주년 공연 장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아름다운 음악 속에서만 찾을 수 있었던 '팬텀(에릭)'은 '크리스틴'의 천상의 목소리를 '구원'으로 여긴다./사진= EMK뮤지컬컴퍼니

뮤지컬은 에릭(팬텀)이 크리스틴을 돕기 위해 비밀리에 보컬 수업을 하는 과정과, 비스트로에서 노래를 뽐내는 기회를 통해 오페라 무대에 데뷔할 수 있도록 이끄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비스트로에서의 성공 직후, 샹동 백작이 크리스틴과 축하의 시간을 보내면서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은 관객에게 뜬금없이 느껴지며 부당하다는 생각을 갖도록 만든다.

이미 관객은 얼굴의 대부분을 가린 마스크 뒤에 숨은 에릭(팬텀)의 수줍은 사랑과, 보컬 수업을 하면서 에릭의 친절하고 따뜻한 두 눈에 매료된 크리스틴의 마음을 엿본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르루의 소설에 등장하는 통제 욕구와 가스라이팅, 인간을 향해 느끼는 분노, 폭력성에 대한 자기 합리화, 선·악을 구분하지 않는 심성, 비뚤어진 집착의 주인공은 뮤지컬 '팬텀'에 반영되지 않는다.

뮤지컬 '팬텀' 10주년 공연 사진. '팬텀'에게 보컬 수업을 받아온 '크리스틴'은 비스트로 무대를 통해 자신의 노래 실력을 뽐낼 기회를 얻는다.
뮤지컬 '팬텀' 10주년 공연 장면. '팬텀'에게 보컬 수업을 받아온 '크리스틴'은 비스트로 무대를 통해 자신의 노래 실력을 뽐낼 기회를 얻는다./사진= EMK뮤지컬컴퍼니

또한 뮤지컬 '팬텀'에서 에릭(팬텀)이 폭주하게 되는 이유는 크리스틴이 샹동 백작과 연인으로 발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카를로타가 질투심으로 인해 오페라의 주연을 맡은 크리스틴에게 독약을 먹여 목소리를 망가뜨렸기 때문이다.

에릭은 이기심과 욕망, 조롱과 무시, 암투와 조작이 지배하는 “추악하고 잔인한 세상”에서 크리스틴을 보호하기 위해, 극장의 거대한 샹들리에를 추락시키고, 혼란을 틈타 크리스틴을 지하로 데려온다.

그는 크리스틴이라는 “선량한 꽃을 꺾은 무참한 자”인 카를로타에게 심판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카를로타에게 복수의 응징을 하기 위해 에릭이 극장으로 숨어든 사이, 크리스틴은 지하에서 카리에르에게 가면 속 ‘마에스트로’의 과거에 대해 듣게 된다.

뮤지컬 '팬텀' 10주년 공연 사진. 가스통 르루의 원작 소설에 등장하는 기괴하고 비뚤어진 집착의 주인공은 뮤지컬 '팬텀'에 반영되지 않는다.
뮤지컬 '팬텀' 10주년 공연 장면. 가스통 르루의 원작 소설에 등장하는 기괴하고 비뚤어진 집착의 주인공은 뮤지컬 '팬텀'에 반영되지 않는다./사진= EMK뮤지컬컴퍼니

뮤지컬 '팬텀'의 가장 큰 매력은 ‘드림 발레(dream ballet)’의 구현에 있다. 전문적인 무용수가 ‘춤’으로만 스토리텔링에 필요한 설명과 암시, 상징을 반영하는 드림 발레는, 1943년에 초연된 리처드 로저스와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의 뮤지컬 '오클라호마!'에서 비롯되었다.

고전발레를 미국 뮤지컬의 일부로 통합시킨 선구자로 평가받는 아그네스 드 밀(Agnes de Mille)의 안무가 두드러지는 1막 끝부분의 18분가량의 꿈속 장면은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황금기와 함께 미국적인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드림 발레는 반드시 꿈을 다루지 않더라도 시간의 왜곡을 가능하게 하는 상상을 펼쳐 보이거나, 장기간에 걸친 사건을 ‘몽타주(montage)’처럼 짧은 시퀀스로 표현하고, 효과적으로 요약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등장인물의 감정과 심리, 과거 속 이야기나 미래의 소망까지, 음악을 배경으로 ‘춤’으로 펼쳐 보이는 드림 발레는, 뮤지컬 '팬텀'에서 에릭의 어머니 ‘벨라도바’와 아버지 카리에르의 사랑을 둘러싼 이야기를 크리스틴에게 들려주는 맥락에서 적용된다.

뮤지컬 '팬텀' 10주년 공연 사진. '에릭(팬텀)'은 이기심과 욕망, 조롱과 무시, 암투와 조작이 지배하는 추악한 세상에서 '크리스틴'을 보호하기 위해 지하로 데려가려 한다.
뮤지컬 '팬텀' 10주년 공연 장면. '에릭(팬텀)'은 이기심과 욕망, 조롱과 무시, 암투와 조작이 지배하는 추악한 세상에서 '크리스틴'을 보호하기 위해 지하로 데려가려 한다./사진= EMK뮤지컬컴퍼니

오페라 무대의 발레리나였으나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디바로 거듭나는 벨라도바와 견습생이었던 젊은 시절 카리에르의 사랑 이야기는 15분가량의 흡입력 있는 발레 안무로 전개된다.

한국 공연의 연출을 맡은 로버트 요한슨은 프로그램북을 통해 “한국 프로덕션의 특별함”을 강조하는데, 예스톤이 “5곡을 새롭게 작곡”했을 뿐 아니라 “발레의 비중을 높여 다른 '팬텀'들과 매우 다른 공연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카리에르의 회상으로 전개되는 발레 장면은 크리스틴 역을 맡은 배우가 벨라도바의 아름다운 노래 또한 대신하는 가운데, 에릭(팬텀)이 왜 크리스틴의 목소리에 유독 집착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든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랑해 준 어머니의 목소리는 에릭(팬텀)의 어린 시절 기억과 함께 마음 깊은 곳에 잠재해 있다가 크리스틴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사랑’과 ‘따뜻함’, ‘구원’을 향한 열망으로 회귀한다.

에릭(팬텀)이 겪어온 외모로 인한 소외와 차별에 대한 상처, 아픔, 애정 결핍, 외로움의 감정은 그가 크리스틴에게 읽어줄 것을 청하는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시를 통해 은유적으로 표출된다.

1789년에 출판된 시집 '순수의 노래(Songs of Innocence)'에 수록된 시 ‘작은 검은 소년(The Little Black Boy)’은 검은 피부색에 가려져 희고 순수한 영혼이 인식되지 못하는 소년이 어머니의 따스함 속에서 위안을 얻으며, 신의 사랑 속에서 차별 없는 은총과 구원을 꿈꾸는 내용이다.

뮤지컬 '팬텀' 10주년 공연 사진. 전임 극장장인 '제라드 카리에르'는 지하 호수로 데려온 크리스틴을 지상으로 당장 돌려보낼 것을 주장하지만, '팬텀'은 거부한다.
뮤지컬 '팬텀' 10주년 공연 장면. 전임 극장장인 '제라드 카리에르'는 지하 호수로 데려온 크리스틴을 지상으로 당장 돌려보낼 것을 주장하지만, '팬텀'은 거부한다./사진= EMK뮤지컬컴퍼니

역경과 고난을 겪으며 자란 검은 피부의 소년이 시련을 겪지 않은 흰 피부의 영국 아이를 헌신적으로 보호함으로써, 비로소 사랑과 수용에 이르겠다는, 시의 뒷부분에서 피력되는 소년의 바람은, 뮤지컬에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에릭이 크리스틴을 향해 꿈꾸는 것이 무엇인지를 암시한다.

뮤지컬 '팬텀'이 르루의 원작보다도 훨씬 더 유명한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1986년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과 비교될 때, 평론가들로부터 우호적인 입지를 갖게 된 데에는 극본이 품은 설득력과 감동, 인간적인 공감이 작용했다.

무엇보다 카리에르가 자신이 아버지였음을 고백하고,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오랜 세월 모른 척해 온 아들 에릭(팬텀)이 끔찍한 외모의 범죄자로 생포되어 대중의 구경거리가 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아버지에게 부탁하는 장면은, 깊은 슬픔을 불러온다.

아버지와 아들의 화해는 모든 비극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젊은 시절 카리에르의 경솔한 선택과 무책임을 비난해야 함에도, 줄에 매달린 에릭(팬텀)이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지켜달라고 애원하는 가운데, 아들을 향해 울면서 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아버지의 모습 앞에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뮤지컬 '팬텀' 10주년 공연 사진. 가면 속 '마에스트로'인 '팬텀(전동석)'은 크리스틴이 오페라 무대에 설 수 있도록 비밀리에 보컬 수업을 제공한다.
뮤지컬 '팬텀' 10주년 공연 사진. 가면 속 '마에스트로'인 '팬텀(전동석)'은 크리스틴이 오페라 무대에 설 수 있도록 비밀리에 보컬 수업을 제공한다./사진= EMK뮤지컬컴퍼니

뮤지컬 '팬텀'은 음악과 대본이 거의 완성된 상태에서 웨버의 뮤지컬이 제작된다는 발표와 함께 같은 원작에 기반한 뮤지컬이라는 이유로 투자를 확보할 수 없어, 계획을 완전히 접어야 했던 작품이다.

예스톤은 뮤지컬 '팬텀'이 어렵게 초연된 1990년대보다 현재로 향할수록 더 많은 프로덕션에 의해 공연되는 현상에 대해 주제에 대한 보편성과 클래식 음악에 대한 애호 때문으로 설명한다.

아름다움과 추함, 사랑과 구원에 대한 갈구, 상처와 실수, 후회와 회한,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려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관객이 나름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랐던 예스톤의 선택은, 전 세계에 1,000개 이상의 프로덕션이 관객과 공감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또, 19세기 프랑스 음악의 특성을 담은 악보는 뮤지컬의 전신인 ‘오페레타(operetta)’의 형식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 전통성과 “화려함은 덜할지 모르지만 멜로디와 다양성을 중시했다”라는 평가에 이르도록 만들었다.

비이성과 어둠, 범죄성을 강조하며 계몽주의에 반발한 고딕 문학의 “숨겨진 거작”으로 평가받는 르루의 소설 속 기괴한 주인공 ‘팬텀’은 예스톤과 코핏의 상상력을 통해 전혀 다른 인물로 재탄생한다.

여전히 크리스틴이라는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여인을 사랑하지만, 집착이나 광기가 아닌 선의와 친절, 희생을 통해 ‘구원’을 간절히 꿈꿨던 뮤지컬 속 팬텀(에릭)의 이야기가 관객의 마음속에 감동을 남기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외모가 아닌 내면의 아름다움과 선의, 따스함과 포용이라는 주제에 집중한 뮤지컬 '팬텀'이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되지 않은 가장 큰 히트작”이라 불리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이지 않을까?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상지대 겸임교수, 대림대 겸임교수, 한국외국어대 객원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공학대학교 지식융합학부(교양교육센터)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 《한국연극》 편집위원과 한국연극평론가협회 편집위원 및 이사, 세계문화예술경영연구소 초빙연구원, 외국문학연구소 초빙연구원을 역임했다.

주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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