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하영 365칼럼] 유한함과 무한함 사이의 선택...음악극 '노베첸토'
[주하영 365칼럼] 유한함과 무한함 사이의 선택...음악극 '노베첸토'
  • 주하영
  • 승인 2025.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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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문화로 보는 세상풍경]
- 이탈리아 거장 감독 주세페 토르나토레의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1998)의 원작
-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현대 소설가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1994년 모놀로그 희곡
- 1인 11역과 라이브 재즈 피아노의 만남
음악극 '노베첸토' 공연 사진.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폐선 폭파가 결정된 버지니아 호에서 하선하지 않은 '노베첸토(오만석)'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설명한다.
음악극 '노베첸토' 공연 사진. 1945년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폐선 폭파가 결정된 버지니아 호에서 하선하지 않은 '노베첸토(오만석)'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설명한다./사진= HJ컬쳐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세상은 무한한 곳일까, 유한한 곳일까? 땅 위에 발을 딛고 사는 인간에게 세상은 유한하게 느껴진다. 세계 여행을 위해 배낭을 메고 나선 여행자가 지구를 한 바퀴 돌고 나면, 출발한 곳으로 다시 되돌아오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둥근 지구의 모든 구석을 빠짐없이 다 돌며 사는 일은 한평생을 다 바쳐도 모자랄 일이다. 물질적으로는 유한한 땅이지만, 인간의 열망과 욕망이 만들어 놓은 길들은 수많은 갈래로 다르게 펼쳐지고, 방사형으로 끝없이 뻗어나간다.

만들어진 길 위에 또 다른 갈래가 생기고, 새로운 포장이 더해지고, 변화가 생기는 세상의 움직임은 한없이 작기만 한 인간에게 예측할 수 없는 거대함으로 다가온다. 기회와 좌절,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 행복과 절망, 삶과 죽음이 숨 쉬고 있는 곳, 인간에게 세상은 유한한 공간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한없이 무한하다.

만약 ‘육지’라고 불리는 땅 위에 단 한 번도 발을 딛지 않은 채, 평생 바다 위를 항해하는 ‘배’ 안에 머물며 특정 구간만을 진자처럼 왕복해 온 인생이 있다면, 그에게 세상은 어떤 곳일까?

한 번에 2,000명씩 탑승해 유럽과 미국 사이를 오가는 커다란 여객선에 살고 있지만 육지와 다름없이 사람들이 밥을 먹고, 잠을 자며, 일상을 살아가는 곳, 대략 닷새에서 열흘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 음악이 흐르고, 춤을 추는 가운데, 새 옷을 만들기도 하고, 아이를 낳기도 하며, 낯선 사랑을 발견하기도 하는 곳, 끝없이 순환하며 새로운 사람들을 태우고 내려주는 배 안의 삶은 육지의 삶과 많이 다를까?

음악극 '노베첸토' 포스터 컷. 제작사 HJ컬쳐가 '씨어터 프로젝트'로 선보이는 첫 번째 작품인 음악극 '노베첸토'는 1인 11역과 피아니스트의 라이브 연주를 특징으로 한다.
음악극 '노베첸토' 포스터 컷. 제작사 HJ컬쳐가 '씨어터 프로젝트'로 선보이는 첫 번째 작품인 음악극 '노베첸토'는 1인 11역과 피아니스트의 라이브 연주를 특징으로 한다./사진= HJ컬쳐

대학로 예스24스테이지 2관에서는 배 안에서 태어나 평생을 바다 위에서 보낸 천재 피아니스트의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1인극 '노베첸토'가 막공을 향해가고 있다.

국내에서 '노베첸토'는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원제: The Legend of 1900)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를 불러온 영화 '시네마천국(1988)'으로 전 세계에 알려진 이탈리아의 거장 감독 주세페 토르나토레의 1998년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은 국내에서 2002년에 개봉되었다.

토르나토레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현대 소설가이자 음악평론가, 영화감독이기도 한 알레산드로 바리코(Alessandro Baricco)의 1994년 희곡 '노베첸토'의 스크린 대본을 직접 담당하고, '시네마천국'의 음악을 담당했던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에게 작곡을 의뢰했다. 모리코네의 음악은 제57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음악상을 수상했다.

음악극 '노베첸토' 공연 사진. 무대 디자이너 '에밀 카펠류쉬'는 프로그램북을 통해, '노베첸토(오만석)'가 피아노 안에 있는 느낌을 부여하기 위해 "악기 내부를 연상시키는 형상"의 무대를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음악극 '노베첸토' 공연 사진. 무대 디자이너 '에밀 카펠류쉬'는 프로그램북을 통해, '노베첸토(오만석)'가 피아노 안에 있는 느낌을 부여하기 위해 "악기 내부를 연상시키는 형상"의 무대를 만들었다고 설명한다./사진= HJ컬쳐

바리코의 희곡 '노베첸토'는 “음악이 있는 1인극”으로 무대화를 염두에 두고 쓰인 “연극적 모놀로그”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1994년 9월, 희곡을 책으로 출간하면서 바리코는 같은 해 7월 아스티 페스티벌에서 이미 초연이 있었음을 언급하는데, 극 대본의 형식과 관련해 “실제 공연과 큰소리로 읽어야 하는 소설의 중간쯤 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한다.

트럼펫 연주자인 ‘팀 투니’라는 인물이, 20세기 초 이민자들을 싣고 유럽과 미국을 오갔던 여객선 ‘버지니아 호’에서 만난 놀라운 피아니스트 ‘노베첸토’에 관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구성의 작품이, 무대 위에서 혼잣말로 읽어주는 소설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희곡 ‘노베첸토’는 관객에게 영웅 혹은 전쟁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고대 그리스의 음유시인을 떠올리게 만드는 특징이 있다. 하지만 보다 흥미로운 점은 ‘노베첸토’라는 천재 피아니스트가 무대 위 화자를 통해서만 설명되는 가운데 인물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음악’과 관련해, 극작가가 어떤 특정한 지시도 내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음악극 '노베첸토' 공연 사진. 재즈 라이브 연주를 선보이는 피아니스트는 극중 인물을 연기하지 않지만, 화자인 '팀 투니(강찬)'는 노베첸토를 비롯한 다양한 인물을 자유자재로 연기한다.
음악극 '노베첸토' 공연 사진. 재즈 라이브 연주를 선보이는 피아니스트는 극중 인물을 연기하지 않지만, 화자인 '팀 투니(강찬)'는 노베첸토를 비롯한 다양한 인물을 자유자재로 연기한다./사진= HJ컬쳐

재즈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래그타임(ragtime)’이나 남부 뉴올리언스에서 출발한 행진곡 빠르기의 ‘딕시(Dixie)’, 흑인 삶의 고단함과 슬픔을 담은 느린 곡조의 ‘블루스(blues)’, 3박자의 경쾌한 춤곡인 ‘왈츠(waltz)’ 등, 곡의 스타일에 관한 언급만이 있을 뿐 구체적인 곡명을 제시하지 않는 바리코의 희곡은 노베첸토의 “마법과 같은 연주”가 어떤 것인지에 대한 감상을 언어로 표현한다.

이 때문에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 속 모리코네의 음악들은 “마치 딴 세상에 있는 사람”처럼 악보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음계로 연주”하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피아니스트 노베첸토의 연주의 기준이 된다.

모리코네는 배 위에서 노베첸토와 피아노 연주 대결을 벌이는 뉴올리언스 출신의 재즈 피아니스트 ‘젤리 롤 모턴’의 곡들과 트롬본 연주자로 시작한 재즈 피아니스트 아메데오 토마시의 곡, 래그타임의 왕으로 일컬어지는 스콧 조플린의 곡을 제외하고는 모든 음악을 작곡해 사용한다.

특히 노베첸토가 창밖으로 보이는 여인에게 낭만적인 사랑의 감정을 느끼면서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곡인 ‘플레잉 러브(Playing love)’는 아름다운 선율로 인해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30년이 넘는 세월을 배 위에서 보낸 노베첸토가 처음 육지로 내려가 다른 삶을 살 결심을 한 이유처럼 제시되는 ‘낯선 여인을 향한 설렘과 고백하지 못한 수줍음’은 원작에는 존재하지 않는, 영화에만 덧붙여진 장면이다.

음악극 '노베첸토' 공연 사진. 1인 11역을 소화하는 배우는 흰색 롱코트를 입는 순간 노베첸토와 선상에서 피아노 대결을 하는 재즈의 창시자 '젤리 롤 모턴(유승현)'으로 변모한다.
음악극 '노베첸토' 공연 사진. 1인 11역을 소화하는 배우는 흰색 롱코트를 입는 순간 노베첸토와 선상에서 피아노 대결을 하는 재즈의 창시자 '젤리 롤 모턴(유승현)'으로 변모한다./사진= HJ컬쳐

제작사 HJ컬쳐가 ‘씨어터 프로젝트’의 첫 번째 작품으로 선보이는 '노베첸토'는 배우가 화자를 포함한 11명의 인물들을 연기하는 가운데, 피아니스트의 라이브 연주가 배경 음악과 노베첸토의 피아노 연주, 젤리 롤 모턴의 피아노 연주를 재현하는 ‘음악극’ 형식을 갖고 있다.

바리코의 희곡 '노베첸토'는 라이브 연주가 아니라 녹음된 음악을 오디오로 들려주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녹음된 피아노 연주를 사용할 경우, 이미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은 굳이 연극으로 작품을 봐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노베첸토'가 음악극으로서 ‘피아니스트의 라이브 연주 방식’을 택한 것은, 영화에 친숙한 관객들이 연극에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뿐 아니라 ‘차이’를 느낄 수 있다는 면에서, ‘장점’으로 작용한다.

음악극 '노베첸토'는 영화 '피아노의 전설'에 삽입된 모리코네의 음악들을 사용하는 대신, 별개의 다른 음악들을 편곡해 사용한다. 영화와 겹쳐지는 곡은 젤리 롤 모턴의 개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표작인 ‘더 크레이브(The Crave)’ 뿐이다.

음악극 '노베첸토' 공연 사진. 영화 '피아노의 전설'에 삽입된 음악을 사용하는 대신, 별개의 다른 곡들을 선별해 편곡한 음악은 주인공인 노베첸토의 상황과 감성선에 기준한다.
음악극 '노베첸토' 공연 사진. 영화 '피아노의 전설'에 삽입된 음악을 사용하는 대신, 별개의 다른 곡들을 선별해 편곡한 음악은 주인공인 노베첸토의 상황과 감성선에 기준한다./사진= HJ컬쳐

바리코의 희곡이 언급한 딕시풍과 래그타임, 왈츠, 블루스의 스타일은 그대로 보존하지만 영화와 차별된 곡들을 선택해 편곡한 음악은, 거슈윈이나 쇼스타코비치, 라흐마니노프, 드뷔시, 포레, 카치니 등 비교적 대중에게 잘 알려진 작곡가들의 곡을 포함한다.

음악감독을 맡은 김은영은 프로그램북에서 “재즈라는 음악적 장르에만 국한하지 않았다”라고 밝히는데, “노베첸토의 상황과 감정선에 맞는 음악을 선곡”했음을 강조한다.

특히 노베첸토가 처음으로 육지에 발을 딛을 결심을 했다가 선회하는 순간의 음악을 가장 많이 고민했기 때문에, 인상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의 교향시 '바다(La Mer)'를 활용했음을 덧붙인다.

자유로운 음계와 조성을 사용해 바다의 신비롭고 다양한 모습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바다(La Mer)'가 노베첸토의 내밀한 갈등과 깊은 깨달음을 표현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음악극 '노베첸토' 공연 사진. 2차 세계대전의 폭격 속에 배 위의 소품들은 모두 바닥으로 쓰러지고, '노베첸토(강찬)'는 폐선이 결정된 버지니아호에 그대로 머문다.
음악극 '노베첸토' 공연 사진. 2차 세계대전의 폭격 속에 배 위의 소품들은 모두 바닥으로 쓰러지고, '노베첸토(강찬)'는 폐선이 결정된 버지니아호에 그대로 머문다./사진= HJ컬쳐

또, 조지 거슈윈의 1935년 민속 오페라(folk opera)인 '포기와 베스'에 등장하는 유명한 아리아 ‘서머타임(Summertime)’을 활용해 노베첸토의 ‘마지막 연주’와 ‘마지막 만남’을 연결한다.

흑인 영가의 느낌을 담고 있고, 아련한 향수와 애잔한 슬픔을 간직한 아름다운 선율의 ‘서머타임’은 고독했던 노베첸토의 삶을 위로하는 듯한 효과를 불러온다.

음악극 '노베첸토'의 가장 큰 매력은 한 명의 배우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과정에 등장하는 11명의 인물들을 자유자재로 표현하며 관객과 호흡을 이어나가는 부분에서 발견된다.

기본적으로 배우는, 배에서 태어난 후 평생 단 한 번도 땅을 밟지 않은 친구 ‘대니 부드먼 T.D. 레몬 노베첸토’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화자 ‘팀 투니’를 연기하지만, 내성적이고 순수한 피아니스트 노베첸토를 비롯해 그의 농담 속에 등장하는 ‘천사’에 이르기까지, 다른 10개의 캐릭터를 표현한다.

음악극 '노베첸토' 공연 사진. 한 명의 '배우(주민진)'가 11명의 인물을 연기하는 작품은 원작 희곡에 바탕을 두
음악극 '노베첸토' 공연 사진. 한 명의 '배우(주민진)'가 11명의 인물을 연기하는 작품은 원작 희곡에 바탕을 두지만, 배우의 다채로운 '연기'에 초점을 맞춘다./사진= HJ컬쳐

영화의 경우, 팀 로스가 연기한 노베첸토의 모습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면, 연극에서는 노베첸토의 삶과 그의 마지막 결정에 관한 ‘이야기’가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연극의 경우, “좋은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를 들려줄 누군가가 옆에 있다면, 아직 희망이 있는 것”이라는 노베첸토의 마지막 메시지는 그대로 구현된다. 노베첸토의 삶이라는 ‘좋은 이야기’를 무대화한 연극이 기꺼이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된 ‘관객’을 만나 이해와 공감, 연민이라는 ‘희망’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음악극 '노베첸토'는 바리코의 희곡보다 ‘연극성’을 확대한 특징이 있다. 배우가 관객을 향해 말을 건네면서 객석과 무대의 경계를 흐리는 ‘즉흥성’과 연극임을 인지하면서도 즐겁게 몰입할 수 있는 관객의 반응이 강조된 ‘라이브 쇼’와 같은 속성을 유지한다.

음악극 '노베첸토' 캐릭터 컷. 화자(팀 투니) 외 배우 유승현.
음악극 '노베첸토' 캐릭터 컷. 화자(팀 투니) 외 배우 유승현. "운이 따르거나 의지만 있다면 아름답기도 한 게 인생이니까요."/사진= HJ컬쳐
음악극 '노베첸토' 캐릭터 컷. 화자(팀 투니) 외 배우 오만석.
음악극 '노베첸토' 캐릭터 컷. 화자(팀 투니) 외 배우 오만석. "그가 거기서 연주한 음악은 다른 세상의 소리였어요."/사진= HJ컬쳐
음악극 '노베첸토' 캐릭터 컷. 화자(팀 투니) 외 배우 강찬.
음악극 '노베첸토' 캐릭터 컷. 화자(팀 투니) 외 배우 강찬. "내가 기억하는 한 그 이야기는 생생하게 남아있을 겁니다."
음악극 '노베첸토' 캐릭터 컷. 화자(팀 투니) 외 배우 주민진.
음악극 '노베첸토' 캐릭터 컷. 화자(팀 투니) 외 배우 주민진.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승패를 제외한 나머지 전부였어요."/사진= HJ컬쳐

또, 대본의 경우 바리코의 희곡에 바탕을 두지만, 소설처럼 묘사가 길게 나열된 원작의 부분들은 거둬내고 배우의 ‘연기’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4명의 배우(오만석, 주민진, 유승현, 강찬)가 다르게 완성한 노베첸토에 대한 다채로운 해석과 11명의 캐릭터 연기의 변화무쌍함을 각각 따로 경험할 수 있다. 또, 피아노로 라이브 음악을 들려주는 연주자가 노베첸토의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노베첸토의 피아노 연주보다는 삶을 향한 그의 태도와 내면의 고독, 두려움, 갈망, 고뇌에 보다 집중하게 된다.

음악극 '노베첸토' 공연 사진. 객석과 무대의 경계를 가르는 철봉 형태의 '스틸 커튼'은 장면에 따라 다양한 상징성을 갖는다.
음악극 '노베첸토' 공연 사진. 객석과 무대의 경계를 가르는 철봉 형태의 '스틸 커튼'은 장면에 따라 다양한 상징성을 갖는다./사진= HJ컬쳐

파도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버지니아 호 선체처럼 보이는 무대 위로 피아노 연주자의 경쾌한 라이브 연주가 시작되면, 무대와 객석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철봉 형태의 ‘스틸 커튼’이 열리고 배우가 등장한다.

‘스틸 커튼’은 거대한 피아노 현으로 볼 수 있지만, 노베첸토가 평생을 보낸 ‘배’의 공간을 ‘감옥’과 연계하게 된다. 먼지가 쌓인 트럼펫을 불면서 ‘팀’을 연기하는 배우는 피아노 연주자에게 다가가 가벼운 대화를 나누다가 관객을 향해 인사를 건넨다.

여행을 좋아하는 관객이 있는지,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가 어디인지를 질문하는 배우는 ‘배 여행’에 관한 언급을 기점으로, 작품 속 내레이션으로 향한다.

새로운 땅에서의 성공을 꿈꾸는 이민자들이 가득한 배 위에는 ‘아메리카’ 대륙을 제일 처음 발견하고 크게 외쳐 부르는 이가 반드시 있다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연극은, 사람의 눈 속에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가 마치 정해진 운명처럼 담겨있다는 노베첸토의 의미심장한 말을 전달한다.

음악극 '노베첸토' 공연 사진. 프로그램북에 따르면, 반원 형태의 벽을 세운 무대는 피아노를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처럼 보인다고 한다.
음악극 '노베첸토' 공연 사진. 프로그램북에 따르면, 반원 형태의 벽을 세운 무대는 피아노를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처럼 보인다고 한다./사진= HJ컬쳐

1927년 1월, 화자인 ‘팀’은 버지니아 호에 승선하고, 애틀랜틱 재즈 밴드의 일원이 되어 트럼펫을 연주한다. 폭풍우가 거세게 몰아치던 어느 날, 그는 노베첸토와 가장 가까운 친구로 발전한다. 27세의 노베첸토를 만난 팀은 배에서 6년간 함께 연주하며 그와 시간을 보낸 뒤, 마지막으로 그를 보게 된 것이 엄청난 양의 다이너마이트 폭발물 위에 앉아있었던 때임을 회상한다.

팀은 흑인 선원 ‘대니 부드먼’이 연회장 피아노 위에 놓인 레몬 상자 안에서 태어난 지 열흘 된 아기를 발견하게 된 과정과, 그 아기가 ‘1,900’이라는 숫자를 지칭하는 단어인 ‘노베첸토’를 이름으로 갖게 된 배경을 설명한다.

1900년 1월 1일에 발견된 아기에게 붙여진 20세기의 시작을 의미하는 ‘노베첸토’라는 이름은 발견자인 ‘대니 부드먼’과 발견된 상자의 상표인 ‘T.D. 레몬’까지 덧붙여져 아주 길게 완성된다.

음악극 '노베첸토' 공연 사진. '팀 투니(유승현)'는 6년 동안 버지니아 호에서 노베첸토와 함께 한 뒤 1933년 육지에서의 삶을 위해 하선한다.
음악극 '노베첸토' 공연 사진. '팀 투니(유승현)'는 6년 동안 버지니아 호에서 노베첸토와 함께 한 뒤 1933년 육지에서의 삶을 위해 하선한다./사진= HJ컬쳐
음악극 '노베첸토' 공연 사진. 흑인 선원 '대니 부드먼(유승현)'은 노베첸토가 8살이 되던 해에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음악극 '노베첸토' 공연 사진. 흑인 선원 '대니 부드먼(유승현)'은 노베첸토가 8살이 되던 해에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사진= HJ컬쳐

연극은 출생증명서가 없는 노베첸토가 어떻게 배 안에서 살게 되었는지, 사고로 인한 대니 부드먼의 죽음과 함께 항만 당국에 인계될 상황에 있던 어린 노베첸토가 어떻게 갑자기 사라졌는지, 배우지 않은 피아노를 어린 노베첸토가 어떻게 연주하며 승객들의 마음을 울렸는지를 전달한다.

폭풍우로 인해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는 배 안에서 피아노 바퀴의 고정쇠를 푼 채 “검은 비누가 미끄러지듯” 자유자재로 피아노를 운전하며 연주한 일, 재즈의 창시자라 일컬어지는 젤리 롤 모턴과의 선상에서의 피아노 대결, 벽에 걸린 그림이 ‘툭’ 하고 떨어지듯 느닷없이 하선하겠다는 결심을 드러낸 순간, 그리고 무엇을 봤는지 계단에 가만히 멈춰 선 채로 육지를 바라보다 다시 배로 돌아와 버린 에피소드까지….

팀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음악을 피아노 건반 88개로 연주하며 무한한 상상력을 펼쳐 보인 노베첸토의 삶을 관객에게 들려준다. 빙글빙글 도는 의자는 폭풍우 속 흔들림이 되고, 긴 상자에 분필로 그려진 선원의 모습은 대니 부드먼이 된다.

음악극 '노베첸토' 공연 사진. 연극성이 강조된 무대는 세로로 긴 상자에 분필로 대니 부드먼을 그려서 표현하고, 화자인 '팀(강찬)'은 그와 노베첸토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음악극 '노베첸토' 공연 사진. 연극성이 강조된 무대는 세로로 긴 상자에 분필로 대니 부드먼을 그려서 표현하고, 화자인 '팀(강찬)'은 그와 노베첸토의 이야기를 전달한다./사진= HJ컬쳐

마이크를 손에 들면 선상 MC로, 흰색 모자와 흰색 롱코트를 차려입으면 젤리 롤 모턴으로, 선장 모자를 쓰면 스미스 선장으로 변모하는 현란한 배우는, 심지어 벽에 걸린 그림이 떨어질 결심을 하는 대화까지 상상해 ‘연극성’을 극대화한다.

노베첸토에 대한 이야기가 관객에게 긴 여운과 슬픔, 안타까움과 연민을 낳는 것은, 끝내 육지에 발을 딛는 선택을 거부한 채로 평생을 배에서 보낸 그가 버지니아 호의 폐선 폭파결정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팀이 배를 떠난 뒤 2차 세계대전 동안 병원선으로 이용된 버지니아 호는 1945년 종전과 함께 쓸모를 다한 배를 없애는 결정과 마주하게 된다. 노베첸토가 배에서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팀은 그를 설득하기 위해 버지니아 호로 향하지만, 노베첸토는 배에서 내리지 않겠다는 자신의 선택을 번복하지 않는다.

노베첸토는 유한한 숫자의 건반들로 무한을 연주하는 일은 할 수 있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한 숫자의 건반들로는 음악을 만들어낼 수 없음을 피력한다.

매번 2,000명의 사람들이 그가 경험하지 못한 세상의 이야기와 감정, 삶을 두 눈에 담고 승선했던 배 안에서, 그는 상상력을 통해 그 삶들을 엿보며 88개의 건반들로 무한한 선율의 음악을 창조해왔다.

음악극 '노베첸토' 공연 사진. 마이크를 든 배우는 '선상 MC(주민진)'로 변화해 미국과 유럽을 오가는 여객선 버지니아 호를 움직이는 선장과 선원, 의사, 요리사, 밴드를 소개한다.
음악극 '노베첸토' 공연 사진. 마이크를 든 배우는 '선상 MC(주민진)'로 변화해 미국과 유럽을 오가는 여객선 버지니아 호를 움직이는 선장과 선원, 의사, 요리사, 밴드를 소개한다./사진= HJ컬쳐

하지만 육지에서 바라보는 바다가 ‘삶의 무한함’에 대해 외치는 소리를 듣고자 했던 노베첸토는 배에서 내리려던 순간, 오히려 그에게는 육지가 무한한 바다와 같은 곳임을, 그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거대한 가능성과 위험, 욕망, 갈망을 담고 있는 곳임을 인지한다.

팀에게 자신이 하선하지 못했던 이유를 설명하는 노베첸토는 깨달음을 얻은 이후 자신이 어떻게 모든 욕망과 갈망, 집착과 이별해 왔는지를 덧붙인다.

1932년 2월, 버지니아 호의 “두 번째 계단과 세 번째 계단 사이”에 멈춰 선 채 그가 본 세상은, 결국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1945년을 지나 버지니아 호의 폐선이 결정된 보스턴 항구에서 그에게 ‘끝’으로 다가온다.

누군가에게는 현실 도피로 보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지나친 공포로 인한 광기로 읽힐 수 있지만, 노베첸토는 자신이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세심하고 영민한 선택을 하고 있음을, 자신에게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불행을 무장해제” 하고 있음을, 삶을 붙들고 있는 모든 욕망을 하나씩 내려놓는 과정을 통해 존재의 ‘본질’을 스스로 규정하고 있음을 토로한다.

마지막까지 죽은 후 천사 앞에 섰을 때의 에피소드를 상상하며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 노베첸토는 팀에게 자신을 기억해 줄 것을, 자신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한다.

음악극 '노베첸토' 공연 사진. 2차 세계 대전은 버지니아 호를 병원선으로 활용하도록 만들고, 노베첸토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연주를 지속한다.
음악극 '노베첸토' 공연 사진. 2차 세계 대전은 버지니아 호를 병원선으로 활용하도록 만들고, 노베첸토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연주를 지속한다./사진= HJ컬쳐

삶은 누구나에게 자신의 크기만큼 고통스럽다. 모두의 삶에는 각자의 난관이 도사리고 있고, 수많은 도전의 갈림길이 반복적으로 펼쳐진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모험을 선택하고, 성공을 욕망하며, 더 넓고 높은 세상을 꿈꾸는 것은 아니다.

예상할 수 있는 길과 예상할 수 없는 길, 감당할 수 있는 일과 감당할 수 없는 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포용하는 선택과 보다 나은 자신을 향해 나아가는 선택 사이에는 ‘내면의 나침반’이 작용한다.

내면의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 안에 가득 차오르는 욕망들을 하나씩 내려놓는 선택을 하기도 한다. 평화와 안정감, 요란하지 않은 조용한 행복감이 그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노베첸토의 삶을 슬프고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그가 놓친 무한한 세상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한함 속에서 무한함을 추구하는 삶과 무한함 속에서 유한함을 인식해야 하는 삶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게 될까?

어쩌면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는 삶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인지하고 정의한 그의 선택이 모험보다 훨씬 더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 것은 아니었을까? 좋은 삶, 좋은 이야기, 좋은 선택이란 무엇에 기준해야 하는 것일까? 6월 8일까지 예스24스테이지 2관.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상지대 겸임교수, 대림대 겸임교수, 한국외국어대 객원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공학대학교 지식융합학부(교양교육센터)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 《한국연극》 편집위원과 한국연극평론가협회 편집위원 및 이사, 세계문화예술경영연구소 초빙연구원, 외국문학연구소 초빙연구원을 역임했다.

주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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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y021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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