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사극 ‘줄리어스 시저’ 재창작한 대본
- 로마 공화정을 위협하는 시저의 암살을 둘러싼 브루터스의 갈등에 집중
- 고대 그리스 연극의 코러스 역할 강조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2025년 6월 27일,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OWP 최고경영자 프로그램 기조강연에서, 하버드대 교수이자 정치학자인 대니얼 지블랫(Daniel Ziblatt)은 최근 몇 년간 미국이 경험한 민주주의의 후퇴를 언급하며, “지난 6개월 동안 민주주의 규범이 더욱 심하게 침식되는 신호”를 보내왔음을 지적했다.
지블랫은 “민주주의는 언제나 위태로운 제도였다”면서, “비즈니스 리더들이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정책에 조용하지만 효과적인 방식으로 반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2018년에 출간된 뉴욕타임스 논픽션 베스트셀러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의 저자이기도 한 지블렛은 “독재를 경험한 국가와 달리 미국은 권위주의의 위험성에 대한 문화적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다른 국가들의 정치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어야 함을 피력했다.
그는 민주주의의 핵심은 “조화가 아니라 경쟁 시스템”이며, 정당과 아이디어가 공정하고 개방적인 경쟁 속에서 서로를 시험할 때, “권력이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제한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주의의 강점은 최고의 리더를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와 교체를 허용하는 것”임을 강조한 지블렛은 민주주의 시스템의 자정 기능을 구축하는 데에는 “집단적 용기와 전략적 협력”, 그리고 “도덕적 명확성과 책임감을 갖춘 원칙에 입각한 행동”이 필요함을 촉구했다.
지난 20일 서강대학교 메리홀 대극장에서는,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 권력의 정점에 선 줄리어스 시저를 암살했으나 결국 황제가 다스리는 제정으로 이어진 로마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건을 다룬 연극 '킬링시저'의 막이 내렸다.
7명의 코러스와 배우들의 연기가 돋보였던 작품 '킬링시저'는 서사보다는 로마 원로원을 떠올리게 하는 원형 무대와 조명의 대비, 안무적 움직임이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관객들의 호응을 얻었다.
연극 '킬링시저'는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1599년에 초연된 희곡 '줄리어스 시저'(원제: The Tragedy of Julius Caesar)를 재창작한 작품이다.
하지만 원작에서 가장 유명한 브루터스와 안토니우스의 연설 장면을 포함한 일부 장면들과 특정 대사들을 차용했을 뿐, 셰익스피어의 의도나 인물 형상화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작품이다.
권력에 대한 욕망과 변질되고 왜곡된 야심, 강력한 힘에 대한 공포, 암살이라는 선택이 불러온 정치적 후폭풍과 그 결과에 흔들리는 심리적 갈등에 주목하고 있는 듯 보이는 연극 '킬링시저'는,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 보다 '맥베스'를 더 닮은 듯 느껴지는 측면이 있다.
무대 또한 비스듬히 매달린 왕관처럼 보이는 샹들리에와 사슬이 걸쳐진 채 여기저기 놓여 있는 의자들, 피가 얼룩진 커튼 등을 통해 폭압과 반란, 죽음의 느낌을 강조한다.
1599년 여름에 완공된 글로브 극장(Globe theatre)의 무대에 오른 최초의 작품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는 토마스 노스(Thomas North)가 번역한 플루타르크(Plutarch)의 '영웅전(Parallel Lives)'을 원전으로 삼고 있다.
플루타르크의 원문을 그대로 반영한 곳도 있지만, 인물들의 성격묘사에 있어 변화를 꾀하며 다면성을 부여한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는, 다각도의 해석이 가능한 복잡하고 미묘한 작품이다.
셰익스피어가 '줄리어스 시저'를 집필할 당시, 영국은 41년간 통치를 이어온 엘리자베스 여왕(Elizabeth I)이 후세가 없는 채로 60대 중반의 나이에 이른 시점이었다.
시드니 대학 영문과 교수인 휴 그리피스(Huw Griffiths)는 현대 역사가들이 “군주 공화국(monarchical republic)”으로 평가하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통치 형태가 세기말에 이르러 더 이상 작동하지 않으면서, 파벌주의와 상호 의심, 음모와 갈등으로 이어지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했음을 지적한다.
그리피스는 기원전 44년 로마 공화정 말기에 원로원 의회에서 암살당한 시저가 독재자인지 아닌지, 브루터스의 암살이 정당한 행위인지 아닌지의 질문은 셰익스피어에게 영국이라는 조국의 정치와 관련된 문제였음을 덧붙인다.
저명한 셰익스피어 학자 코펠리아 칸(Coppélia Kahn)에 따르면, 르네상스 시대의 많은 관객들은 이미 기원전 510년에 왕정을 타도하고 공화정을 수립하는 데 기여한 ‘루키우스 브루터스(Lucius Junius Brutus)’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의 후손인 ‘마르쿠스 브루터스(Marcus Junius Brutus)’가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 황제의 관을 수락할 것으로 확실시되는 줄리어스 시저를 암살하는 음모에 가담한 역사 또한 잘 인지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시저 암살에 대해 각기 다른 의견을 갖고 있었고, 시저를 배신한 브루터스를 영웅으로 보거나 악당으로 보는 견해로 나뉘어 논쟁을 벌였다.
한 사람의 야심에 의해 체제가 전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로마의 자유를 수호하고 시민들이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개인적인 친분과 우정을 누르고 공적인 살해에 동참했다고 연설하는 브루터스의 정당성은 “내가 시저를 덜 사랑한 것이 아니라 로마를 더 사랑했을 뿐”이라는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대사로 축약된다.
이에 맞서는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대중을 선동해 브루터스를 포함한 음모자들이 ‘해방자’에서 로마의 영웅을 살해한 ‘반역자’들로 순식간에 뒤바뀌는 장면은,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를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조차 잘 알려진 순간이다.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는 브루터스를 주요 탐구 대상으로 삼은 탓에 극 제목에 관한 논란이 있었는데, 당대에는 지위가 높고 더 잘 알려진 인물을 내세워 흥행을 꾀하는 관행 때문이었다는 설이 있다.
재창작을 표방하는 연극 '킬링시저' 역시 셰익스피어의 작품처럼 시저에 비해 브루터스의 갈등과 선택, 내면에 집중한 특징이 있다. 셰익스피어가 원전 작가인 플루타르크의 시선에서 벗어나 시저, 브루터스, 카시우스, 안토니우스를 각각 미덕과 결함을 가진 모순된 인간 존재로 형상화했다면, 연극 '킬링시저'는 셰익스피어가 다양화한 인물들의 측면을 반대로 전형화해 특정 유형의 대표격으로 제시한다.
'킬링시저'의 가장 큰 특징은 카시우스와 안토니우스를 ‘X’라는 하나의 유형적 인물의 다른 측면처럼 설정하고, 시저 또한 로마 제정의 초대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와 겹쳐지는 일종의 ‘권력’의 주체로 정형화한다는 점이다.
시저는 줄리어스 시저라는 사람의 이름이라기보다 ‘황제’, ‘군주 독재’, ‘군주 전제’, ‘절대 권력’의 의미로 쓰인다. 따라서 연극의 제목은 ‘권력을 죽이는 일’, ‘독재자 혹은 독재를 무너뜨리는 일’이라는 의미와 로마 역사 속 인물인 시저를 죽이는 ‘브루터스의 선택과 행위’를 일컫는 이중적 맥락을 갖게 된다.
재창작의 대본을 맡은 오세혁은 프로그램북 인사말에서, 시저를 찌른 브루터스의 비극이 “고결한 정의를 말했던 자들이 어느새 가장 피비린내 나는 광기의 중심에 서 있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고 해석한다.
그는 “시저가 죽은 이후에야 진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고, 광장을 흔들고, 민중을 선동하며, 전쟁을 일으켜 새로운 독재자를 탄생시키는 역사가 현재까지 되풀이되어왔기 때문에, ‘시저’라는 이름을 “신이자 제물, 인간이자 체제, 죽은 자이자 부활한 자”로 사용하고 있음을 설명한다.
따라서 연극 '킬링시저'에서 ‘시저’는 끝없이 부활하는 절대 권력이며, ‘브루터스’는 스스로 정의라고 믿었던 이상을 향해 움직였으나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은 속에서 자신의 선택이 옳았는가에 대해 번민하고 정당화하려 애쓰는 사후의 기억이 된다.
카시우스와 안토니우스를 오가는 존재인 ‘X’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숨은 ‘욕망’을 대변하고, 브루터스를 유혹하거나 조종하고 비웃으며 질책한다.
필요에 따라 순간순간 다른 모습으로 변모하는 X는 때로는 브루터스의 내면에 자리한 모든 부정적인 것들, 의심과 불안, 두려움과 공포, 죄책감과 야심처럼 보이고, 때로는 기나긴 역사 속에 자리한 인류의 본질적인 갈등, 불화, 욕심과 질투, 피의 욕구인 듯 보인다.
첫 장면부터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와는 전혀 다른 출발을 보이는 연극 '킬링시저'는 마치 죽은 혼령들이 살아있던 때를 회상하듯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꿈’의 분위기를 담아낸다.
수많은 배신자들의 칼에 찔려 암살당하는 꿈을 꾸는 시저는 신관들에게 더 많은 예언을 조작할 것을 지시하고, 자신을 ‘신’과 동일시한다. “로마를 사슴처럼 길들여 사자가 되는 날, 시저가 불멸한다”는 예언에 크게 만족한 듯 웃는 시저는 독재자의 야심을 숨기지 않는다.
“민중의 힘으로 영웅의 자리에 오른 자가 스스로 신이 되려 한다”면서 시저의 야심을 인식하는 브루터스는 자신이 꿈속에 있는 것인지, 현실 속에 있는 것인지 혼란을 느끼며, “나는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지?”라고 묻는다.
X는 “꿈속에서도 진실을 꿈꾼다면 그건 현실”이지만, “현실에서도 꿈속을 헤맨다면 그건 여전히 꿈”임을 강조하면서, 시저의 죽음을 꿈꾸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브루터스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를 묻는다.
브루터스의 혼란스러움과 고민, 갈등은 7명의 코러스가 묻는 질문과 답을 통해 표현된다. 로마 공화정을 세운 선조의 명예를 지킬 것과 자유와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시저를 제거할 것을 압박하는 목소리에 브루터스는 억압과 부담을 느낀다.
카시우스로 변모한 X는 “민중을 구원할 해방자들”의 명단이 완성되었음을 알리고, 시저를 어떻게 암살할 것인지를 논의한다. 로마 시민을 대표해서 시저를 처단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브루터스는 “원로원에서의 공개적인 살인”이 신에게 제물을 바치듯 경건하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독재자가 되려는 시저의 ‘정신’을 죽이는 것일 뿐 시저라는 인간의 ‘육체’를 죽이려는 것이 아님을 토로하는 브루터스를 향해 카시우스로 변모한 X가 묻는다. “너의 말은 칼처럼 날카롭다. 하지만 과연 너의 조상 루키우스의 칼만큼 날카로울 수 있을까?”
X는 브루터스의 선택이 앞으로 자신이 무엇을 연기할 것인가와 관련이 있음을 언급하는데, 모두가 죽게 될 결말을 미리 알고 있음을 드러내며, 자신이 미지의 초월적인 존재임을 암시한다.
X 역할을 맡은 양지원 배우는 '관객과의 대화'에서, X가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역할에서 영감을 얻어 표현되고 있음을 피력한다.
그는 브루터스가 X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따라 카시우스와 안토니우스가 결정된다고 설명한다. 외투를 벗어 팔에 걸치는 동작만으로도 카시우스와 안토니우스를 넘나드는 X와 마찬가지로, 시저/옥타비아누스 또한 말투와 태도, 복장의 변화를 통해 브루터스와 관련한 장면에서 각기 다른 인물로 자리한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에서 시저는 자신의 업적을 나열하거나 폼페이우스를 물리치고 권력을 독차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또, 필리피 전투에서 브루터스와 카시우스를 물리치고 궁극적으로 황제가 될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 의원들을 숙청하고, 반대파를 지지한 수천 명의 시민들을 처단한 뒤, 공화정 체제를 불태울 것이라는 미래를 언급하는 일도 없다.
하지만 '킬링시저'는 브루터스의 패배 이후 펼쳐진 로마의 역사를 아우르는 대사들을 첨가하고, 평화와 자유, 해방을 외치며 죽음에 이르러야 했던 과거의 모든 사람들을 브루터스와 동일시한다.
“나는 죽은 것인가?”라고 자문하는 브루터스를 향해 옥타비아누스는 “천진난만한 이상주의자”라고 비난하며, 후회하는지를 묻는다. 브루터스는 마치 미래 세대를 향해 이야기하듯 객석을 바라보며 두려워하지 말고 광장으로 나아갈 것을 독려한다.
역사 속에서 피를 흘리며 죽음에 이른 “위대한 해방자”들이 시민들의 핏줄과 마음으로 스며들어 함께할 것임을 토로하는 브루터스는, 고대 로마에서 시저를 암살하는 선택을 했던 인물이라기보다는 인류의 모든 역사에서 독재에 맞서 싸웠으나 의지를 관철하지 못한 채 더 큰 권력에 가로막혀야 했던 비극적 인물이 된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오세혁 작가는 작품을 통해 전하려는 메시지를 묻는 질문에 “아무도 매장되지 않은 들판이란 없다”는 유병록 시인의 시 '붉은 달'의 문장을 인용하면서, 아름다운 들판 아래에 묻혀있는 수많은 목숨을 기억하고자 했다고 답했다.
안전한 세상은 그러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전투 속에서 수없이 쓰러져간 수많은 시민들이 있었다는 것임을 말하고 싶었다는 오세혁은, 극 제목이 ‘킬링 시저’인 이유 또한 그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는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와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후 유독 서구권에서 많이 공연된 특징이 있는 작품이다. 야망과 탐욕이 권력을 추동하는 속성에서부터 음모와 추측, 불확실성이 팽배한 가운데 정의를 세워야 하는 어려움, 시민권의 의미와 책임, 권리에 이르기까지, 깊이 있는 토론을 가능하게 하는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권위주의와 포퓰리즘의 부상으로 인한 ‘민주주의의 퇴보(democratic backsliding)’, 허위정보의 배포와 감정적 진실로 인한 ‘탈진실의 시대(post-truth age)’와 같은 현재 세상의 문제를 고스란히 담은 듯 느껴지는 셰익스피어의 텍스트는 하나의 정답을 갖고 있지 않다. 바로 그 점이 셰익스피어의 '줄리어스 시저'가 수많은 버전을 낳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서 지블랫은 잠재적인 독재자가 권력을 잡을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민사회와 정당 체제, 민주주의의 규범(democratic norm)”이 제대로 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며 “문지기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위기의 순간에 침묵하지 않고 민주적 규범을 따르는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용기와 집단의 협력, 더 많은 사람들이 권위주의적 행위자에게 선을 긋고 동료 시민들에게 민주주의의 가치를 상기시킬 수 있는 문화만이 민주적 제도를 구해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지블랫은, “민주적 제도의 완전함은 이를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달려있다”라고 피력한다.
위기 속에서 길을 찾으려는 노력, 위험을 인지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깨어있기 위한 의지, 겪어보지 않은 일을 상상하고 가늠해 보는 추론에 ‘연극’보다 더 적합한 예술이 있을까?
셰익스피어가 카시우스에게 부여한 “후세에 두고두고 이 장면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나라에서, 미지의 언어로도 되풀이되며 상연될 것이오!”라는 대사는 앞으로 얼마나 더 지속되며 계속 여운을 남기게 될까?
21세기 세상의 시민들은 민주주의가 “깊은 잠”에 빠지지 않도록 주어진 “문지기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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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상지대 겸임교수, 대림대 겸임교수, 한국외국어대 객원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공학대학교 지식융합학부(교양교육센터)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 《한국연극》 편집위원과 한국연극평론가협회 편집위원 및 이사, 세계문화예술경영연구소 초빙연구원, 외국문학연구소 초빙연구원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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