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손프로젝트'의 헨리크 입센 3부작 시리즈의 첫 작품
심층 문화 비평 칼럼 <앨리스 박사의 문화로 보는 세상풍경>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주하영 칼럼니스트가 또 하나의 새 칼럼 <주하영 평론가의 짧은 단상>을 선보입니다. 짧은 형식 속에 담긴 자유롭고 날카로운 문화적 통찰을 기대해 주세요. [편집자주]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인간의 사회적 삶에는 상당히 많은 집단적 질서와 규범, 문화들이 작용한다. 하지만 존중되고 실천되어야 할 것들로 여겨지는 집단적 가치와 윤리, 문화들은 때로 개인의 삶을 얽매고 질식시키는 것들이 될 경우가 많다.
개인과 사회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질서를 유지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한 것이지만, 시간 속에서 정체되고 변화에 민감하게 적응하지 못해 부패하기 시작한 가치들은 개인의 즐거움과 행복, 자유를 억압할 뿐 아니라 삶을 ‘상처’와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다.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리크 입센(Henrik Ibsen)은 1881년 연극 '유령(Gengangere)'을 발표하면서, 격렬한 분노와 비난에 휩싸였다. 입센은 '유령'이 “일부 계층에게 경악을 불러일으킬 것”임을 알고 있었고, 그런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작품을 쓴 이유임을 명확히 피력했다.
자유연애에 대한 옹호, 종교의 위선, 방탕함으로 인한 매독의 유전, 조력 자살과 같은 주제를 다루는 희곡 출간본은 반품되기 시작했고, 대부분의 극장은 무대에 올리기를 거부했다.
인세에 크게 의존했던 입센은 결국 1882년, 책 판매량에 대한 걱정을 드러내며 극중 인물의 의견에는 작가가 “완전히 부재”하며, “단 하나의 의견도, 단 하나의 발언도” 작가에게 귀속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유령'을 집필하면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가 쓴 모든 것은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내가 겪어온 일들과 가장 세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모든 인간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책임과 죄책감을 공유한다”라고 말한 것과는 상당히 모순되는 발언이었다.
사회적 지위의 현상 유지, 명예를 무너뜨릴 스캔들에 대한 공포, 경제적 안정과 평판은 입센 역시 과감하게 벗어나기 어려운, 기존 사회에 ‘유령’처럼 드리워진 죽은 생각들이었고, 축적된 과거의 산물이었다.
수많은 극장에서 거절당한 희곡 '유령'은 1882년 5월, 미국 시카고에서 아마추어 배우들에 의해 스칸디나비아 이민자들을 상대로 초연되었다.
이후 1883년 후반부터 스웨덴과 노르웨이에서 상연되었지만, 영국에서는 검열법으로 인해 1914년이 되어서야 공식적인 공연이 가능해졌다.
허가되지 않은 채로 클럽 멤버만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1891년 런던 공연은 일회성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혹평과 500개가 넘는 기사들을 통한 논쟁으로 이어졌다. 1902년에 거론된 입센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제동이 걸린 것도 '유령'이 품은 부정적 시선 때문이었다.
사실 '유령'은 성별과 결혼을 둘러싼 규범에 대한 강력한 도전으로 여겨졌던 입센의 1879년 희곡 '인형의 집'에 대한 반응을 염두에 두고 집필된 작품이다.
개인을 불행하게 만드는 사회의 주입된 사고와 가치를 인식한 뒤 가정을 떠나는 선택을 했던 주인공 노라가, 만약 그대로 머물면서 기존의 틀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삶을 선택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보여주고자 한 작품인 '유령'은, 이전 세대의 유산이 다음 세대를 ‘피할 수 없는 불행’으로 몰아넣는 결과를 보여준다.
윌리엄 아처(William Archer)에 의해 영문으로 번역되면서, “유령들(Ghosts)”이란 뜻을 갖게 됐지만, 노르웨이어 작품명인 “Gjengangere”는 ‘다시 걷는 무언가 또는 누군가’를 뜻한다. 즉, 이제는 사라졌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주변을 맴돌고 있는 무언가, 삶을 또다시 점유하면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는 누군가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연출 박지혜와 배우 손상규, 양조아, 양종욱으로 구성된 공동창작집단 양손프로젝트는 향후 3년간 선보이게 될 ‘입센 3부작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유령'을 선택했다.
양손프로젝트는 3막으로 이루어진 입센의 원작을 90분가량의 압축된 대본으로 각색하면서 복수형인 '유령들'이란 작품명을 사용했다. 또, 5명의 등장인물을 3명의 배우가 연기하고, 서술자가 따로 존재하는 느낌을 추가하면서, 매우 독특한 양손프로젝트만의 입센의 '유령들'을 만들어냈다.
관객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원작 텍스트가 애매모호하게 암시한 맥락들을 구체적인 단어로 명시하고, 실제로 내뱉는 말과 유사하게 다듬은 각색은 집을 떠나지 못한 ‘노라’, 아니 떠났지만 다시 돌아오는 선택을 한 ‘노라’라고 볼 수 있는 ‘알빙 부인(헬레나 알빙)’을 중심으로, 그녀의 삶이 어떻게 되었는지, 어떤 비극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펼쳐 보인다.
4면이 모두 객석으로 둘러싸인 아레나 형태로, 의자 몇 개와 조명, 빗소리만 갖춰진 무대는 알빙 부인의 삶을 지탱하고 있던 피상적인 것들이 벗겨지는 과정을 관객이 실시간으로 공유하며, ‘유령들’처럼 목격하는 느낌을 더한다.
배우들이 등장해 관객과 인사를 나누면서 시작되는 공연은 극작 시기와 극 제목에 대한 설명, 인물 배역에 대한 언급과 함께 자연스럽게 작품 속 공간과 시간적 배경에 대한 서술로 옮겨진다.
한 명의 배우(양조아)가 알빙 부인을 고정적으로 연기하지만, 상황에 따라 다른 두 명의 배우(손상규, 양종욱)가 만데르스 목사와 알빙 부인의 아들 오스왈, 목수 엥스트란드, 알빙 저택의 하녀 레지나를 유연하게 연기하는 방식은, 객석에 웃음을 가져오기도 하고, 느슨해질 수 있는 장면의 템포를 빠르게 만들기도 한다.
또, 한 명의 인물이 하는 대사를 두 명의 배우가 번갈아 가며 특정 인물에게 쏟아내는 장면은 획일적 사고가 강요되는 사회의 억압이나 비난의 시선을 강조하는 느낌을 부여한다.
그리고, 희곡 지문을 그대로 읽거나 인물의 대사와 감정, 생각들을 축약해서 소설의 서술자처럼 관객에게 전달하는 방식은, 연극임을 인식하면서도 마치 책을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을 부여한다.
사회에서 존경받는 ‘알빙’이라는 이름이 방탕함과 부도덕, 배신으로 가득한 거짓 위에 세워진 모래성임을 잘 알면서도 진실을 폭로하기보다는, 과거를 청산함으로써 새롭게 출발하고자 했던 알빙 부인은, 순응을 선택한 그 순간부터 ‘비극’이라는 결말이 예정되어 있었음을 뒤늦게 인식한다.
기존의 질서에 편입된 개인으로서 알빙 부인은 아들에게만큼은 다른 삶을 물려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운명은 모든 선택에 대한 대가를 요구한다.
“아버지의 죄가 아들에게 되돌아간다”는 상징으로 적용된 오스왈의 질병과 아들 오스왈이 어머니인 알빙 부인에게 요구하는 가혹한 선택은 현재에도 여전히 충격적이며, 많은 고민과 사유를 남긴다.
입센 원작의 본질은 ‘폭로’에 있다. 관객은, 알빙 부인이 숨기고 있던 진실의 폭로와 오스왈의 선천적 질병 외에도 만데르스 목사의 위선과 이기심, 목수 엥스트란드의 교활함, 하녀 레지나의 신분 상승의 욕망, 부패한 사회의 허위, 진보하지 못하고 고여있는 가치들의 폐해와 질식을, 냉혹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자기 인식의 깨달음을 얻었으나 용기를 발휘해 틀을 벗어나지 못한 자의 비극은 알빙 부인을 통해 전달되지만, 스스로를 사회의 가치에 묶어버린 눈먼 자의 비극은 만데르스 목사를 통해 관객에게 노출된다.
결국 ‘나’를 옭아맨 모든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해방’은 잘못된 모든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해도 반드시 상응하는 대가가 따르는 삶의 이치, 예측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휘몰아치는 운명의 가혹함, 그것이 우리가 삶의 선택에 그토록 진실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10월 26일까지 LG아트센터 서울, U+ 스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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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상지대 겸임교수, 대림대 겸임교수, 한국외국어대 객원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공학대학교 지식융합학부(교양교육센터)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 《한국연극》 편집위원과 한국연극평론가협회 편집위원 및 이사, 세계문화예술경영연구소 초빙연구원, 외국문학연구소 초빙연구원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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