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외로움과 사랑...매혹적인 스릴러 판타지 연극 '렛미인'
[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외로움과 사랑...매혹적인 스릴러 판타지 연극 '렛미인'
  •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승인 2025.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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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따 소년과 뱀파이어 소녀의 가슴 시린 소통과 구원
- 국립극장 대극장의 퀄리티 높인 영국 제작진의 세련된 무대 미학(美學)
연극 '렛미인' 공연 장면/사진=신시컴퍼니
연극 '렛미인' 공연 장면/사진=신시컴퍼니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 대극장(해오름극장)에 오른 연극 '렛미인'(~8월 16일)은 왕따 소년과 뱀파이어 소녀의 소통과 사랑을 통해 ‘외로움’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화제작이다. 또한 영국 제작진이 참여해 미니멀한 연출 기법과 퀄리티가 높은 무대 미학의 아우라를 체험할 수 있게 했다.

신시컴퍼니(예술감독 박명성)가 주최한 연극 '렛미인'은 영국의 연출가 존 티파니와 안무가 스티븐 호겟 등 크리에이티브팀이 주도했고 한국팀이 수퍼바이저로 참여했다. 한국판 '렛미인' 출연 배우들은 영국 제작진과 함께 오디션으로 선발했다.

따라서 관객들은 연출 기법과 배우들의 무브먼트(움직임)뿐 아니라 무대미술, 조명, 음악, 특수장치 등 스태프 전반의 연극술을 체험할 수 있다.

대극장 연극, 특히 국립극장 대극장 연극은 오랜만에 접했는데 예전과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전면 개보수로, 대사 전달이 안 되던 예전의 답답함이 싹 가셔 분위기가 아늑했고, 음향과 조명이 일류여서 관극하기가 편했다. 이처럼 좋아진 대극장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연극이 자주 공연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뱀파이어 뉴클래식’이란 명제를 붙인 '렛미인'은 스웨덴 작가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의 소설이 원작으로, 영화와 TV시리즈 등으로 제작된 유명 콘텐츠이다. 국내에도 영화가 상영되었고, 10여 년 전 연극으로 공연되기도 했다. 이번 '렛미인'은 영국과 한국 크리에이티브팀의 합작인만큼 기술적으로 완성도가 높고 우리말 공연으로 내용의 이해가 쉬워졌다.

이런 최상의 조건에서도 관건은 ‘뱀파이어 문화’를 어떻게 한국 관객들에게 먹혀들게 했느냐였다. 우리 관객들도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뱀파이어를 접했지만, 무대에서는 익숙한 소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피를 먹고 사는 불멸의 뱀파이어와 필멸의 인간이 서로 사랑한다는 소재는 한국 관객들의 공감을 받기가 쉽지 않았고, 이 점이 공연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연극 '렛미인' 공연 장면/사진=신시컴퍼니
연극 '렛미인' 공연 장면/사진=신시컴퍼니

존 티파니 연출은 정공법으로 뱀파이어를 밀고 나갔다.

자작나무 숲에서 행인을 죽여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피를 받는 장면으로 시작하여 뱀파이어 소녀와 왕따 소년과의 만남과 끌림, 죽음에 직면한 소년을 구하는 흡혈귀 소녀의 충격적 라스트 장면까지 객석을 휘어잡았다. 흰 눈이 덮인 무대에서 검붉은 선혈은 충격적일 수 있었지만, 판타스틱한 무대로 동화 같은 아우라를 보여주었다.

존 티파니 연출은 뱀파이어보다 더 강한 화두로 ‘외로움’을 부각시켰다. 기술문명의 발달과 AI로 인간의 삶은 편리하고 풍요로워졌을지 몰라도, 인간은 가정 내에서조차 더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

친구들에게 왕따 당하고, 엄마는 술에 절어있고, 가출한 아빠는 남자 친구와 지내는 상황에서 주인공 오스카(안승균)는 이웃에 이사 온 뱀파이어 일라이(권슬아)와 만나면서 묘한 분위기와 특히 냄새에 이끌린다.

이들에게 성별이나 흡혈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일라이는 자신이 남성일수도 여성일수도 모호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오스카는 남성이라도 사랑하겠다고 말한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신분과 환경에서 서로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고독, 분노, 슬픔 등의 감정을 소통하는 것이다. 일라이는 세상에 초대받지 못한 뱀파이어지만 어찌보면 소년 오스카도 초대받지 못한 존재인 것이다.

이 연극의 장점은 ‘비언어적 몸으로 전달하는 감정의 서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상한 냄새가 이들의 장벽일 수 있었는데 “난 상관없어. 그냥 니 냄새야!”로 소통하는 식이다. 영원한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이들은 서로의 삶에 상대를 받아들이며 외로움과 결핍의 상처에 치유의 빛을 비춘다는 사랑 이야기에 관객들은 공감의 박수를 보냈다.

연극 '렛미인' 공연 장면/사진=신시컴퍼니
연극 '렛미인' 공연 장면/사진=신시컴퍼니

오스카 쪽 인물들, 어머니와 아버지와 학교 친구들과 선생님 등은 사실적이어서 이해가 쉬운데, 일라이 쪽의 뱀파이어 하칸(지현준)은 그림자의 삶이어서 신비감을 자아냈다. 하칸은 단 한 사람 알라이를 위해 필사적으로 헌신하지만 늙어가는 모습이 연민을 갖게 했다. 다만 초반에 강렬한 연기를 펼치던 하칸의 후반부가 약한 점이 좀 아쉬웠다.

이들 외에 박지원(엄마), 차정현(함버그 경찰서장, 아빌라 선생), 이의령(아빠 등), 정우재(지미 등), 최홍혁(스윙 등), 김재민(조니), 지준형(미키) 등 배우들이 톱니바퀴처럼 탄탄한 앙상블로 극을 이끌어갔다. 무엇보다 이 9명의 배우들이 빚어내는 무브먼트 앙상블은 웬만한 뮤지컬보다 강렬하고 멋졌다.

필자는 이 동화같은 연극에서 힐링을 받았을 뿐 아니라 평자의 입장에서 보고 배울 점이 많았다.

무엇보다 리얼리즘 연극은 정체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존 티파니의 미니멀한 연출 기법을 보며 아직도 개발할 여지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극 '렛미인' 공연 무대. 

연출은 영국에서 공수한 크리스틴 존스의 무대 세트 ‘자작나무 숲’을 모든 이들을 품어내는 포용의 공간으로 삼은듯하다. 빼곡히 솟아있는 자작나무는 모든 것을 지켜보는 증인 역할의 코러스 같았다.

이 자작나무 숲을 중심으로 조명과 소품으로 공간을 변화시키면서 모든 배우가 무대를 전환시켰으며, 동선(動線)을 최소화해 대극장의 낭비적 요소들을 없앤 점도 돋보였다.

자작나무 숲, 그 포용의 공간에 사탕 파는 남자부터 행인까지 외로운 사람들을 투영시켰고, 외로운 사람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접근하며 사랑을 키우게 했다.

'렛미인'은 살인사건이 반복되는 스릴러지만 외로움을 사랑으로 감싸는 따뜻한 연극이었고, 그래서 현대인들에게 위로와 힐링을 안겨주는 것이다.

'렛미인'은 연극에서 움직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 나게 보여주었다.

안무가인 스티븐 호겟은 배우들의 모든 동작을 무용처럼 안무하면서 무대가 좀 빈 듯하다 싶거나 변화를 주고 싶을 때 출연 배우들로 하여금 군무를 추게 했는데, 그 장면 장면의 미장셴들이 필자에게는 너무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연극 '렛미인' 공연 장면/사진=신시컴퍼니
연극 '렛미인' 공연 장면/사진=신시컴퍼니

앞서도 말했지만 장충동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이번처럼 편안히 대사를 들으며 극에 몰입한 것은 오랜만이었다. 대극장인데도 대사가 잘 들렸는데 무선마이크(와이어리스)도 보이지 않아 더 신기했다. 전문가가 아니라 기술적인 것은 알 수 없지만, 천정의 집음 장치를 잘 이용한 것 같았고, 그렇다면 여러 명 배우의 대사를 공간감 있게 전달한 음향 오퍼의 역할이 컸으리라고 본다.

조명(Chahine Yavroyan)이 공간 구획뿐 아니라 극의 아우라를 환상적으로 만들어냈다.

음악(Olafur Arnalds)도 극의 서사를 따라가며 관객들에게 공포와 사랑의 느낌을 애잔하게 가슴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막판에 숲의 놀이기구처럼 보이던 구조물이 회전하면서 미니 수영장을 만들어내는 장면은 이 공연의 하이라이트였다. 친구들의 학폭으로 위험에 처하게 된 오스카를 알라이가 구하는 결정적 장면을 위해 영국팀은 이 수조를 공수해왔다.

이처럼 연극이야말로 끊임없이 연구하고 실험해야 할 장르임에도 우리 토양이나 지원체계에서는 기대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 안타까웠다.

연극 '렛미인' 커튼콜 무대./사진=정중헌

'렛미인'은 오디션에서 선발된 배우들이라 유명도는 덜하지만 신선감이 돋보였다. 일라이 역 권슬아, 오스카 역 안승균의 호흡이 잘 맞았고, 특히 권슬아의 변화무쌍한 감성 연기가 관객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하킨 역 지현준은 연기파 배우로 큰 작품을 많이 했는데, 이번 무대에서도 묵직한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경찰서장과 교사 역을 함께 한 차정현 배우의 연기가 편안하게 다가왔고, 엄마 역 박지원도 일상에 지쳐있는 힘겨운 연기를 보였다.

'렛미인'을 보면서 한국 연극도 더 발전해야 하고, 발전할 수 있는 지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AI 시대에 밀어닥칠 인간의 외로움과 공허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연극도 진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극단생활 대표.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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