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선 시인의 시로 보는 세상 풍경] (3) 박인환 시인 고향, 인제에서 6.25전쟁 고통을 거듭 배우다
[홍찬선 시인의 시로 보는 세상 풍경] (3) 박인환 시인 고향, 인제에서 6.25전쟁 고통을 거듭 배우다
  • 홍찬선 칼럼니스트
  • 승인 2025.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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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문학관에서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에 위치한 박인환문학관에서.

인터뷰365 홍찬선 칼럼니스트 = 박인환 시인의 생가가 있던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 159번지 부근에 박인환문학관이 있다. 문학관 입구 오른쪽 커다란 유리벽에는 그가 남긴 시 '인제'가 새겨 있다.

인제/ 봄이면 진달래가 피었고/ 설악산 눈이 녹으면/ 천렵 가던 시절도 이젠 추억”으로 시작해 “그곳은/ 전란으로 폐허가 된 도읍/ 인간의 이름이 남지 않은 토지/ 하늘엔 구름도 없고/ 나는 삭풍 속에서 울었다/ 어느 곳에 태어났으며/ 우리 조상들에게 무슨 죄가 있던가”를 물은 뒤 “나의 가난한 고장/ 인제/ 봄이여/ 빨리 오거라”('인제' 부분)라로 끝나는 시다.

이 시는 6.25전쟁이 끝나고 2년 8개월이 지난 1956년 3월11일, 조선일보에 발표됐다. 박인환(朴寅煥, 1926~1956) 시인이 31살 꽃다운 나이에 죽기 바로 9일 전이다.

박인환좌상
박인환 좌상./사진=홍찬선

인제는 남북으로 분단됐을 때 38선 북쪽이었다. 박인환은 11살 때 서울로 이사했기 때문에 공산당 치하의 인제에서는 살지 않았다. 그는 전쟁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황폐화된 고향을 시 '고향에 가서'에서 묘사했다. “학교도 군청도 내집도/ 무수한 포탄의 작렬과 함께/ 지상엔 없다”고 아파했던 곳이다. 십여년 만에 종군기자로 찾은 고향이 “갈대만이 한없이 무성한” 모습을 보고 이 시를 썼을 것이다.

갈대만이 한없이 무성한 토지가
지금은 내 고향.

산과 강물은 어느 날의 회화
피 묻은 전신주 위에
태극기 또는 작업모가 걸렸다.

학교도 군청도 내집도
무수한 포탄의 작렬과 함께
세상에 없다.

인간이 사라진 고독한 신의 토지
거기 나는 동상처럼 서 있었다.
내 귓전엔 싸늘한 바람만이 설래이고
그림자는 망령과도 같이 무섭다.

어려서 그땐 확실히 평화로웠다.
운동장을 뛰다니며
미래와 살던 나와 내 동무들은
지금은 없고
연기 한 줄기 나지 않는다.

황혼 속으로
감상 속으로
차는 달린다.
가슴 속에 흐느끼는 갈대의 소리
그것은 비창한 합창과도 같다.

밝은 달 빛
은하수와 토끼
고향은 어려서 노래 부르던
그것 뿐이다.

비 내리는 사경(斜傾)이 십자가와
아메리카 공병이
나에게 손짓을 해준다.

- 박인환, '고향에 가서' 전문.

인제읍 고사리에 있는 피아시계곡./사진=홍찬선

박인환이 고향에서 느꼈던 전쟁의 고통은 75년이 흐른 지금도 인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다. 인제읍 고사리에 있는 피아시계곡이 아픈 기억의 현장이다.

박인환 시인의 시비가 있는 ‘합강정(合江亭)공원’ 앞에서 번지점프를 운영하는 청년이 그때의 사연을 얘기해 주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와 동네 어른들에게 들은 전설 같은 이야기다.

“합강은 인북천과 내린천이 만나는 두물머리입니다. 여기부터 강물은 북쪽으로 흐르지요. 전쟁 때 남쪽으로 피난 가려는 사람들이 물이 흐르는 방향만 보고, 남쪽 내린천 쪽으로 갔다가 피아시계곡에서 많이 죽어 피가 10리나 이어졌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그 계곡을 피아시계곡이라 부른다고…”

인제 피아시계곡에서 만난 새./사진=홍찬선

그말을 듣고 찾아가 보았다. 내린천 부근의 피아시식당에서 내린천로를 건너 짱구네민박 쪽으로 올라가는 계곡이 바로 피아시계곡이다. 피아시계곡은 내리쬐는 초여름 햇살을 말없이 견디는데, 교각(橋脚) 아래에서 이름 모를 새 한 쌍이 춤추며 노래했다. 그날 희생된 사람들의 혼 같았다.

피아시계곡물이 합쳐지는 이곳 내린천은 기암괴석의 절벽과 물살이 급해 래프팅과 물놀이로 사랑받는 곳이다. 그날의 아픔은 몇몇 사람의 기억 속에만 있고, 대부분은 그런 일이 있는지조차 모른 채 즐긴다.

피아시계곡 가까운 곳에 ‘한석산전적비’가 있다. 밀고 밀리는 치열한 전투로 수많은 사상자를 낸 뒤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전승비다. 수많은 죽음을 전승비로 달랠 수 있을까…

인제 합강정공원에 있는
박인환 시인의 시비를 보러 갔다가
번지점프 안내원에게 
가슴 시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인제의 인북천과 내린천이 만나는
두물머리 합강(合江)은 홍천을 향해 북으로 흐르는데
6.25전쟁 때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배를 남쪽으로 돌려 내린천으로 가다가
피아시계곡에서 인민군에게 몰살당했다고 합니다

희생자들이 흘린 피가 계곡을 벌겋게 적시며 흘러
피아시라는 이름을 얻게 됐다는 사연은 세월의 바람에 날아가고
내린천 래프팅과 기암괴석 절경을 즐기는 사람만 늘어간다는데
한석산전적비만 그때의 고통을 자랑으로 바꿔주고 있습니다

- 홍찬선, '피아시계곡을 아시나요' 전문.

박인환 시인 시비 앞에서.
박인환 세월이가면 악보
'세월이 가면' 악보./사진=홍찬선

합강정공원에 있는 박인환 시비에는 그가 죽기 직전에 쓴 시 '세월이 가면'이 새겨져 있다. 이 시비는 1988년 8월에 인제읍 군축령의 아미산공원에 건립됐는데, 국도확장공사로 1998년에 지금의 장소로 옮겨졌다.

시비의 기단부와 머릿돌은 박인환 시인의 시 '일곱 개의 층계'와 '구름'을 형상화했고, 몸체는 설악산 대암산 방태산을 상징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거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 박인환, <세월이 가면> 전문.

박인환은 죽기 며칠 전 명동의 술집 ‘은성’에서 즉흥적으로 이 시를 썼고, 함께 있었던 이진섭(李眞燮, 1922~1983) 작곡가가 현장에서 곡을 붙인 뒤, 가수 나애심(羅愛心, 1930~2017, 본명 전봉선, 全鳳仙)이 즉석에서 노래를 불렀다.

박인환이 시인 이상(李箱, 1910~1937)을 추모한다고 3일 연속 폭음한 뒤 갑자기 죽은 뒤 이 노래는 ‘명동의 엘레지(비가, 悲歌)’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시는 '주간희망' 1956년 4월13일에 실렸다. 박 시인이 죽은 지 24일 뒤였다.

박인환이 '세월이 가면'에서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이라고 노래했듯, 전쟁이 끝난 지 72년이 흘렀고, 박 시인이 죽은 지 69년이 지났지만, 전쟁의 고통은 박 시인의 안타까운 죽음과 함께 우리들 가슴에 깊숙이 남아 있다.

홍찬선 칼럼니스트

시인 겸 소설가. 충남 아산 출신으로 천안고, 서울대 경제학과, 서강대 경영대학원(MBA)을 졸업했다. 한국경제신문과 동아일보 머니투데이 기자를 하면서 서강대 경영학과 박사과정(재무관리전공)과 일본 주오(中央)대학교 기업연구소 객원연구원, 중국 칭화(淸華)대학교 경제관리학원 고급금융연수과정, 성균관대학교 성균인문동양학아카데미 등을 수료했다. 머니투데이방송(MTN) 보도국장, 머니투데이 북경특파원과 편집국장 역임한 뒤, 100세 시대에 제2인생을 살기 위해 2017년 7월부터 시인과 소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시세계’ 신인상으로 등단(2016년 가을호)한 뒤 시집 ‘틈’ ‘독도연가’ ‘서울특별詩 1, 2, 3, 4, 5’ ‘생명과 사랑’ 등 19권과 부부시화집 ‘그 섬에서 1박2일’ 등 2권을 출간했다. ‘연인’에서 소설 등단(2019)해 소설집 ‘그해 여름의 하얀 운동화’와 장편소설 ‘백석의 불시착’도 출간했다. ‘주식자본주의와 미국의 금융지배전략’ ‘패치워크인문학’ ‘20대 대통령을 위한 경제학’ 등 경제분야 저서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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