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체홉 원작 '세자매', 그리스 비극·시어터 댄스로 진화시킨 '나진환의 역작'
[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체홉 원작 '세자매', 그리스 비극·시어터 댄스로 진화시킨 '나진환의 역작'
  •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승인 2023.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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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톤 체홉의 '세자매' 원작으로 재탄생한 연극 '세자매-죽음의 파티'
- 극단 피악의 나진환 연출 각색..."우리의 삶은 왜 이리 비루하고 고통스러운가?"
- 모든 등장인물이 권총으로 생을 마감하는 죽음의 파티
사진=극단피악
‘세자매 죽음의 파티’ 포스터/사진=극단피악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3면이 진홍색 커튼으로 드리운 사각의 공간에 연이어 총성이 터지고 인물들은 쓰러진다. 죽음의 파티는 세 자매의 막내 이리나를 사이에 두고 벌인 결투에서 승자인 솔료늬이 대위가 뚜젠바흐 중위의 시신을 운반해 오면서 피의 종막으로 향한다.

핏자국이 선연한 무대에서 모든 캐릭터들이 권총을 머리에 들이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세자매(올가, 마샤, 이리나)는 물론이고 오빠 안드레이와 부인 나타샤, 마샤의 연인 베르쉬닌과 군의관 체부띄긴, 하녀 안피사까지 10명의 캐릭터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 원작의 결말과 달리 전원 죽음으로 파티는 막을 내린다.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안톤 체홉의 ‘세자매’는 이제껏 보아온 사실주의 연출과 달리 세트를 배제하고 색채와 음악과 춤과 대사로 몽환적인 무대를 선보였다,

이 작품을 각색하고 연출한 극단 피악의 나진환 대표는 ‘세자매’를 그리스 비극으로 해석했고, 현대 춤(Contemporary Dance)의 언어를 연극에 도입한 시어터 댄스(Theatre-Dance) 형식을 활용했다고 밝혔다.

요즘 한국연극은 체홉 전성기라고 할 만큼 사방에서 체홉의 대표작들이 공연되고 있다. 그중에서 나진환 각색 버전인 ‘세자매’는 ‘죽음의 파티’라는 부제가 암시하듯 연출이 파격적이고 강렬하다. “체홉은 끊임없이 진화하는 텍스트”라는 오종우 성균관대 교수의 표현처럼 진화된 체홉인 것이다.

나진환 연출은 왜 10명의 캐릭터를 죽음으로 몰았을까? 그 의도를 작품으로 다 이해하지 못했는데 프로그램 북에 실린 연출의 작품 해설 및 단상에서 그 답을 찾아냈다. 키워드는 ‘절망(絶望)’이었다. 풀어서 말하면 “우리의 삶은 어째서 이토록 고달프고 힘이 드는가”이다.

나진환 연출은 “절망은 인간을 아름답게 만든다. 절망은 당신의 존재 이유를 아름답게 한다. 그러니 절망과 함께 춤을 추어라! 이 절망의 춤이야말로 진정한 희망의 노래이다”라고 '죽음의 파티'를 해설했다.

세 자매와 아들 안드레이는 명문 귀족인 세르게이 가문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들로 높은 이상과 고귀한 삶을 꿈꾸었다. 하지만 현실은 운명에 의해, 또는 세상의 부조리에 의해 파괴되고 몰락해 간다. 올가는 가장 역할에 지쳐가고, 마샤는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몸부림치고, 이리나는 사랑 없는 새 출발마저 좌절되자 상실의 늪에 빠진다. 높은 이상과 고귀한 생을 꿈꿔온 안드레이는 집까지 저당 잡히는 나락의 신세가 되고 만다.

이들의 운명은 그리스 비극과 닮아있다. 운명에 저항해 보지만 절망 앞에서 발버둥 치고 허우적거릴 뿐이다. 세 자매는 그들의 고향인 모스크바로 가기를 희망하지만, 모스크바는 신기루처럼 끝내 잡히지 않는다. "삶은 왜 이리 비루하고 고통스러운가"라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절망의 끝은 죽음 아닐까. 나진환 연출은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논듯 죽음의 파티에 세 자매와 주변 인물들을 초대한다.

‘세자매 죽음의 파티’ 공연 장면./사진=극단피악

무대는 온통 진홍의 붉은색이 지배한다. 붉은색은 정열, 사랑, 강인한 생명력 같은 긍정의 의미도 지니지만 욕정, 분노, 죄, 죽음 같은 어두운 이미지도 동반한다.

사각의 링 같은 죽음의 파티에는 붉은색을 일렁이게 하는 마약 같은 음악과 격정의 춤이 난무한다. 장장 180분 동안, 줄거리는 안톤 체홉을 따라가지만, 표현방식은 씨어터 댄스와 소품들로 다양한 변화를 시도한다. 믹서기로 갈아낸 토마토 주스는 피를 예고하고, 독백 때마다 천정에서 내리는 빗물은 뼛속까지 스며드는 고독의 냄새를 풍긴다. 체홉이 일상의 언어로 그려낸 19세기 러시아의 암울한 분위기가 시뻘건 아우라로 관객을 마취시키는 느낌이 들었다.

10명의 배우들은 각자의 캐릭터를 연기하면서도 코러스처럼 퍼포먼스를 펼치고, 전문 무용수 못지않은 군무까지 소화해냈다. 연극 같은 무용인지, 무용 같은 연극인지 몽환적 무대에 관객은 빨려 들어간다.

이 연극의 강점은 배우들의 연기가 고르고 앙상블이 뛰어나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나진환 연출의 장기인 탁월한 캐스팅과 역동적인 미장셴은 이 작품에서 더욱 진일보해 판타스틱한 이미지의 향연을 즐길 수 있다.  

경력이 탄탄한 김소희가 맏딸 올가, 관능미의 리다해가 둘째 마샤, 청순미의 권혜원이 셋째 이리나 역으로 응집력 있는 세 자매를 이루었고, 때 묻지 않은 이미지의 김찬이 안드레이 역으로 연민을 자아냈다. 안드레이와 결혼해 집안을 휘어잡는 나타샤 역의 안예진이 신예지만 개성이 강한 캐릭터를 잘 살려냈다.

‘세자매’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인 베르쉬닌 역을 연기파 한윤춘이 맡아 탄탄한 화술과 유려한 춤으로 극의 중심을 잡아주었다. 남성 역할인 군의관 체부띄낀 역을 여배우 김미숙이 맡아 관조자의 역할을 매력 있게 해냈다.

대위 숄료늬이 역 진현철과, 중위 뚜젠바흐 역 이천영이 젊은 패기의 춤과 연기로 극에 역동성을 불어넣었고, 하녀 안피샤 역 양수연은 아코디언 연주와 함께 애잔한 연기로 시선을 모았다.

특히 소도구의 활용도 다채로웠지만, 천정에서 비를 뿌려 배우들을 젖게 하는 아우라는 이 연극의 백미였다. 아련히 떨어지는 빗물은 한없이 감성적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속죄의식 같아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을 안겨주었다.

한국연극의 현실에서 이처럼 열정적 에너지와 독창적 방법론으로 ‘안문학적 성찰’시리즈를 이어가는 나진환의 러시아 작가 연극은 그 실험성이나 완성도로 볼 때 관객의 뜨거운 호응을 받아 마땅한데 여전히 소수 마니아만이 관람하는 현실이 가슴을 무겁게 했다. 지원 제도의 폐쇄성 등 여러 외적 요인도 있겠지만, 긴 러닝타임이나 반복적인 형식 등 '관객 친화'를 배려하지 않은 요인도 없지 않다고 본다. 특히 이번 ‘세자매’를 각색하고 연출하는 과정에서 본인의 주관적인 현실 발언이 과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올봄 국립극단을 비롯한 여기저기서 ‘벚꽃동산’이 공연되고 단편들까지 포함시키면 체홉의 작품이 쉬지 않고 무대화되고 있다. 그중에서도 나진환 연출의 ‘세자매-죽음의 파티’는 체홉 작품의 진화된 해석과 형식 실험으로 주목할 만한 무대였다.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극단생활 대표.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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