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회란기', 고선웅의 연금술로 빚어낸 권선징악의 명쾌한 재판극
[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회란기', 고선웅의 연금술로 빚어낸 권선징악의 명쾌한 재판극
  •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승인 2023.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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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무대에 올려진 고선웅 연출의 명품무대
- 연극 통해 할 말 하면서, 상식이 통하는 명쾌한 메시지 전달
- 마방진 배우들의 현란한 앙상블로 보여주는 재밌는 옛날이야기
연극 '회란기' 공연사진./사진=극공작소 마방진 제공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두산아트센트 연강홀에서 공연 중(~4월 2일)인 극공작소 마방진의 ‘회란기(灰闌記)’는 중국 고대 잡극(雜劇)을 고선웅이 각색 연출한 ‘동양판 솔로몬의 지혜’같은 통속극인데 서사가 재밌고, 오늘 지금 우리 현실을 보는 것처럼 대사들이 통렬하며, 교훈극인데도 메시지가 시원하다.

무엇보다 현란하고 끈적한 마방진 배우들의 연희에 인형까지 활용해 놀이판의 신명을 돋웠을 뿐 아니라 ‘연극으로도 하고 싶은 얘기 다 할 수 있다”는 ‘무대의 힘’을 보여주었다.

가운데 철문을 중심으로 양옆에 높다란 원주(圓柱)를 세운 블랙박스 무대에서 배우들은 오로지 대사와 몸짓으로 장대한 이야기를 알아듣기 쉽게, 스피드하게 풀어냈다. 암전도 거의 없는 벌건 무대에서 끊임없이 기운이 생동하고 사건이 전개되는 고선웅식 연기 메소드가 정교하면서도 설득력을 갖는 것이 이 연극의 매력이다.

연극 '회란기' 공연사진./사진=극공작소 마방진 제공

고선웅은 연출력도 특출하지만, 고전을 현대화하는 각색 솜씨 또한 탁월하다. 서기 1200년대 원나라 때 극작가인 이잠부의 잡극 원본이 어떤지는 보지 못해 모르지만, 배우들의 대사를 따라가다 보면 셰익스피어가 보이고 몰리에르가 들리는 느낌을 주었다. 옛극이지만 현대 복장을 하고 연기하듯, 화술 또한 ‘조씨고아’에서 보여주었듯이 기존 번역극과 차별되는 억양과 끄는 것 같은 말투로 다른 연극과 차별화됨을 발견할 수 있다. 배우들의 독특한 발성이 아직 몸에 배지 않아 낯선데도 내용이 속속 귀에 들어오는 것이 신통하기만 했다.

필자는 ‘회란기’를 보면서 내용보다 이 같은 형식에 끌렸다. 개론을 배울 때 연극은 ‘한다(to do, to act)’와 ‘본다(to see)’고 했듯이 고선웅 연출은 이 두 요소를 무대에 활용해 지루한 옛날얘기를 간결하게 입체적으로, 생동감 넘치게 형상화하는 장인(匠人)의 재능을 보이고 있다.

다음은 현실감이다. 800년 전 중국의 사회상이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 와닿지 않을 것 같은데, 고선웅의 연극 ‘회란기’는 현실에 와닿는다. 상식이 통하지 않고 권모술수와 범죄의 형태가 더 지능화 된 데다 예나 지금이나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되는 불공정 사례가 더 만연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 목숨을 쉽게 해치는 드라마와 영화가 넘쳐나고, 신문 사회면에는 고소 고발로 인한 갈등들이 무수히 노출되는 현실에서 아이들의 생명이 위협을 받고, 누군가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벌을 받는 것도 원나라 시대와 다를 게 없다.

연극 '회란기' 공연사진. (사진=극공작소 마방진 제공)
연극 '회란기' 공연사진./사진=극공작소 마방진 제공

그런데 ‘회란기’는 한 어미가 누명을 쓰고 아이마저 빼앗길 상황에서 포청천의 지혜로 악인은 벌을 받고, 선량한 사람들이 보상받는 이야기여서 사이다 같은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거짓은 탄로 나고 부정한 일을 저지른 사람들은 처벌받는 권선징악의 이 연극이 요즘처럼 흐린 세태에서 많은 것을 느끼게 하고 인과응보의 쾌감을 준 것이다.

고선웅 연출은 진부하고 교훈적인 이 통속극을 마방진 특유의 앙상블로 재미있게 전환시켰다. 이야기를 펼치는 1부 70분은 다소 지루한 부분도 없지 않았으나, 명쾌한 판결을 하는 2부 40분은 흥미진진했다. 특히 배우들의 마임 같고 무용 같은 몸짓들이 상황마다 다르게 연출되어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배우와 인형을 조화시킨 극 술이 실험된 지 오래지만 이 작품에서 주인공을 맴도는 복화술의 앵무새, 배우가 조종한 어린 아들 목각 인형 활용은 무대를 더 풍성하게 했고, 결정적인 장면에서 극적 효과를 높이는 데 일조했다.

연극 '회란기' 공연사진. (사진=극공작소 마방진 제공)
연극 '회란기' 공연사진./사진=극공작소 마방진 제공

18명 마방진 배우들이 무대를 돌고 도는 순환 연기와 집단 앙상블의 미장셴이 뛰어나 모두가 주역이라 할만했지만 1, 2부를 팽팽하게 이끌어간 ‘낳은 엄마’ 장해당 역 이서현의 뚝심과 저력의 연기는 단연 무대를 압도했다. 그와 쌍벽을 이룬 ‘뺏은 엄마’ 마부인 역 박주연의 악역이 탄탄해 긴장을 고조시켰다.

이 두 캐릭터를 에워싼 남편 마원외 역 견민성, 오빠 장림 역 원경식, 마부인의 정부 조영사 역 김남표의 삼각편대가 극의 요소요소에 활력소를 불어넣었다.

2부에서 판관 포대제 역을 맡은 박상원은 회벽의 원 안에 아들을 두고 두 여인이 당기게 하여 친모를 가리는 명쾌한 판결, 깔끔하고 무게감 있는 연기로 재미와 통쾌감을 관객들에게 안겨주었다. 장해당의 엄마 역 조한나, 장해당의 분신처럼 가려운 데를 긁어준 앵무새 역 최하윤, 목각 인형에 숨을 불어넣은 박승화 배우도 개성 있는 역할을 멋지게 해냈다.

개성으로 명품 무대를 만들어 믿고 보게 만드는 고선웅과 마방진의 ‘회란기’는 2022년에 이어 올해도 주목할만한 연극 리스트에 오를 역작이다.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극단생활 대표.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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