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한국 현대 연극사에 남을 원로배우 버전의 '고도를 기다리며'
[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한국 현대 연극사에 남을 원로배우 버전의 '고도를 기다리며'
  •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승인 202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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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놓치면 후회할 신구, 박근형, 박정자 대배우의 명품 연기와 앙상블
- 원로들 공연에 젊은 관객들 만원...기획의 승리이자 시대상 반영
파크컴퍼니 제공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사진=파크컴퍼니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신구(87) 박근형(83) 박정자(81) 대배우를 원캐로 캐스팅하여 화제와 기대를 모은 '고도를 기다리며'가 2023년 12월 19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막을 올렸다. 필자는 운 좋게 역사적인 첫 공연 현장을 심쿵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원로배우 앙상블 공연에 젊은 관객 만원. 첫공부터 달오름극장의 객석은 꽉 찼고 80~90%가 20~40대로 관객층이 젊었다.

세 대배우의 평균나이 83.6세. 기록은 확인해 보지 않았지만 아일랜드 출신의 샤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가 1953년 프랑스 바빌론극장에서 초연된 후 70년 동안 세계 각국에서 다양한 해석과 기라성 같은 배우들에 의해 공연되었지만, 연기경력 60년 이상을 지닌 80대 배우들이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로 호흡을 맞춘 공연은 찾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고도...'의 메인캐스팅에 여배우가 출연한 것도 한국 최초의 기록이자 세계 공연사에서도 흔치 않은 일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개성으로 팬덤을 형성해온 박정자 대배우가 짐꾼이자 노예인 럭키 역을 맡아 유리천장을 깬 것이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포스터/사진=파크컴퍼니 

한국에서 '고도...'하면 임영웅 연출의 전매특허나 다름없었다.

임 연출은 1969년 12월 한국일보 송현홀에서 함현진(고고) 김성옥(디디) 콤비로 초연한 이후, 2019년 명동예술극장에서 정동환 안석환이 산울림 50년 기념공연까지 반세기를 '고도...'의 무대화에 생애를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젠 한국연극의 레전드가 된 송현홀 초연은 전석 매진 기록을 세웠고, 고인이 된 함현진의 고고 역이 가슴 시리도록 명연이었으며, 디디 역 김성옥은 “밤샘 연습으로 발바닥이 아파 걸을 수 없을 정도였다”는 일화 등이 전해지고 있다. 지난 50년 동안 임영웅표 '고도...'는 1,500회 이상 공연되었고 22만의 관객을 모으며 꾸준히 사랑받았다.

필자와의 관련도 깊다.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고도...'가 공연되었는데, 세계적 비평가인 스탠퍼드대 마틴 에슬린 교수의 격찬을 조선일보에 싣는 역할을 했다. 다음해 프랑스 아비뇽연극제에 참가한 '고도...' 공연팀에 끼게 되었고, 그곳에서 임영웅 연출은 더블린연극제에 초청을 받기도 했다. 몇 년 후 폴란드 그다니스크 공연 때도 동행했었다.

임영웅 버전 '고도...'에는 이호재 전무송 등 한국의 대표적인 남자 배우들이 거의 망라되시피 무대에 섰다. 처음에는 부조리극을 잘 모르는 관객들이 웃지 않았는데 명배우들이 열연을 펼치면서 웃음이 터지기 시작해 희비극의 특성을 살려내게 되었다. 투병 중이신 임영웅 연출은 50주년 공연 후 “새로운 '고도...'가 이어지면 좋겠다”고 말했고, 문호가 개방되자 새로운 '고도...'들이 선을 보이고 있다.

신구·박근형·박정자 대배우들의 합류...공연사에 주목할만한 명기획

사진=파크컴퍼니 제공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사진=파크컴퍼니 

이번 원로배우 버전 '고도를 기다리며'는 기획사인 파크컴퍼니가 국립극장과 함께 제작했다. 기획사 공연은 수익 창출에 목표를 두고 있지만 일반 극단이 미치지 못하는 기획력과 집중투자로 작품의 완성도가 높은 특징도 무시할 수 없다.

흥행을 떠나 명품 연기파 배우 신구와 1970년대 명동 국립극장의 독보적 명배우 박근형을 도도와 디디로 캐스팅하고, 박정자 대배우를 럭키로 가세시킨 젠더 프리 캐스팅으로 국립극장 무대에 서게 했다는 것은 공연사에 주목할만한 명기획이 아닐 수 없다.

'고도...'에 목말라했던 노배우들은 기획사 제안에 흔쾌히 응했고, 정말 재밌게 열정적으로 연습하고 있는 모습을 필자는 대학로 설렁탕집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이처럼 발상이 신선하고, 주름이 넘쳐도 그 자체가 사랑스러운 노배우들의 경륜과 매력이 젊은 관객들을 사로잡았고, 그 열기가 대박으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연출과 무대 미학이 소탈하면서도 세련된 점도 이번 공연의 특징이다.

베케트의 저작권을 관리하는 재단에서는 원작 그대로 공연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오경택 연출은 오리지널 원작을 1, 2부로 나뉘어 150분 대작 무대를 보여주었다. 요즘 주목받는 연출가로 떠오르는 오경택은 '라스트세션' '러브레터' 등으로 호평을 받았다. 그의 무대는 심플하면서도 흡입력을 지녔다는 평을 얻고 있다. 모든 스태프의 역량을 모아 배우들이 연기에 집중하게 해주고, 특히 미장셴이 탁월해 연극이 배우예술임을 실감케 해주고 있다. 나무 한 그루 서 있는 무대(김종석), 달처럼 왠지 슬프게 잦아드는 조명(김건영), 모자가 어울리는 의상(오수현), 입체적인 분장(백지영) 등이 관객의 시선을 거슬리지 않으면서도 오케스트라처럼 잔잔한 변주를 들려주었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사진=파크컴퍼니 

이 작품에 관객이 몰리는 이유는 배우들의 명연을 보기 위해서 일 것이다. 80대 배우들이 부조리극의 현대 고전인 '고도를 기다리며'를 어떻게 연기할지가 거리에 붙은 포스터를 보아도 궁금한데, 그 호기심과 함께 역사적 공연에 동참하고 싶은 욕구도 작용했다고 본다.

신구와 박근형이 연기하는 고고와 디디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슬퍼보이는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다. 함현진 김성옥의 레전드 연기를 빼고 명배우들의 콤비 연기를 거의 섭렵했지만 이번 두 대배우의 호흡은 결이 달랐다. 연기하지 않는듯한 고난도의 연기, 가상이 아니고 현실 같아 보이는 사실적인 연기, 일상 같이 느껴지다가도 판타지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마력의 연기... 그 표현은 다 열거하기가 힘들 정도다.

사진=파크컴퍼니 제공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사진=파크컴퍼니 

신들린 연기자 신구. 60년 넘게 무대에 서온 그의 연기는 “너희가 게 맛을 알아!”하는 유명CF처럼 감칠맛이 있고, 관객을 매료시키는 흡인력을 지녔다. 필자는 김광탁 희곡의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에서 치매로 죽는 신구 배우의 연기가 너무 리얼해 커튼콜에 그가 나오자 섬뜩했던 기억이 있을 정도다.

이번 '고도...'에서 신구는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에스트라공의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관객을 배꼽 빠지게 웃길 수 있는 희극연기를 펼 수도 있었는데, 그보다는 소외된 현대인의 불안하고 무미건조한 캐릭터를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굳이 대사를 이해하고 따라갈 필요도 없이 신구 배우의 일거수일투족이 연기의 총화였다.

심성이 우러나는 맛깔나는 대사와 상대 배우 박근형과의 앙상블은 거의 완벽했다. 탁구로 치면 막상막하의 랠리를 펼치다가 순식간에 신구가 스매싱을 날리는 격인데 그 날렵함은 가히 압권이었다. 연극 동네에서는 그 스매싱을 ‘똑 따먹는다’고 말한다. 어디라고 지적하기 힘들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대사 한마디, 동작 하나로 상황을 압도하고 반전시키는 신구의 순발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때마다 젊은 관객들은 웃음을 터뜨렸지만 “내가 뭘!”하는 신구의 능청스러움 또한 그의 트레이드 마크다. “자 가자” “안 돼” “왜?”“고도를 기다려야지”라고 주고받은 후 신구가 “아 그렇지!”하는 포스와 표정은 두고두고 기억날 것 같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사진=파크컴퍼니 

연기의 달인 박근형. 에스트라공 신구의 캐릭터가 다소 정적이었다면 블라디미르 박근형의 캐릭터는 동적이었다. 동선도 더 넓었고 대사의 톤도 다소 높아 고고와 대조를 이루었다. 필자가 연극을 처음 접하던 70년대, 명동극장 시대의 박근형 배우의 인기는 요즘 아이돌만큼은 아니지만 대단했다. 무대에 서면 빛이 났고 어떤 배역도 매력 있게 연기해낸 명배우였다. 그런 그가 TV 드라마에 경도되어 꽤 장기간을 연극 무대와 멀어져 있을 때 아쉬움이 컸다. 몇 년전 그가 '아버지'라는 외국작품의 주인공으로 명동예술극장에 귀환했을 때 너무 반가웠는데 무대 연기도 멋졌다.

이번 '고도...'에서 박근형은 70년대의 열정과 연기의 묘미를 되살려주었다. 유려한 대사는 기본이고, 춤과 노래까지 해내며 무대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오줌마려워하는 표정 연기까지도 매력적이었다. 특히 신구와 함께 만드는 브로맨스 끈적한 미장셴은 이 작품의 함의인 ‘삶의 무의미함’ “인생의 허무‘가 배어나와 관객의 가슴을 먹먹케 했다.

사진=파크컴퍼니 제공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사진=파크컴퍼니 

관객의 가슴을 후련하게 해준 박정자의 방언 같은 연기. 프로그램 인터뷰를 보면 신구 박근형 대배우 모두 '고도...'를 해보고 싶었으나 기회가 없었다며 노년에 캐스팅된 것을 자랑스러워 했다.

박정자 역시 1969년 초연부터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고도...'를 보아왔다며 “배우로서 꼭 한 인물로 무대에 서고 싶어” 출연을 자청했다고 한다. 자신만의 개성으로 아성을 쌓아온 박정자의 출연과 짐꾼이자 노예인 럭키 역 캐스팅은 파격이었다. 남자 배우들도 고되기만 한 이 배역을 꺼려해 젊은 배우들이나 맡던 역할을 80대 여배우가 맡아 “연습하는 내내 매 순간이 감동이었다”고 했다. 그가 남자 역을 한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자신을 던진 럭키 역은 그의 연극 목록에 금자탑으로 기록될 것이다.

포조에게 조정당하는 럭키는 임영웅 버전에서는 생략된 부분이 많았는데 이번 무대에서는 전모를 보여주었다. 기계처럼 움직이던 럭키에게 생각하게 해보라고 주문하자 박정자 대배우는 무언지 모를 내용을 주저리주저리 쏟아냈는데 권력자들을 조롱하는 듯한 폭포수 같은 연기는 박정자 대배우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관객들은 넋을 잃고 그의 세리프에 몰입했고, 필자도 뜻은 모르지만 열변에 빠져들어 흥미로우면서도 후련함을 느꼈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사진=파크컴퍼니 

이 공연에서 60대 배우는 청춘이다. 럭키의 주인인 포조 역을 맡은 김학철 배우는 연극 영화에서 40년 넘게 활동해온 중진이다. 그가 80대 대배우들의 무대에 참여하면서 연륜이 지배하던 무대 흐름에 패기로 분위기를 일신시켰다. 포조와 럭키는 부조리극 속에 또 하나의 부조리극을 보여주면서 작품을 더욱 모호하게끔 하는 듯했지만, 황량한 사막에 오아시스처럼 권태를 덜어냈으며 웃음도 자아냈다. 우리네 지루한 인생에 광대들이 놀이판을 벌인다면 사는 게 덜 따분할 수도 있지 않을까. 오랜만에 무대에서 만난 김학철은 선 굵은 연기와 시원한 대사로 극에 활력소 역할을 했다.

'고도...'에서 박정자 배우는 홍일점이 아니다. 고도의 메신저 역인 소년 역을 맡은 김리안 배우도 여성이기 때문이다. 무대에서 보면 외모나 목소리가 영락없는 10대 소년인 김리안 배우가 20대 중반이라니 필자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1막과 2막에 잠깐 나오는 김리안 배우지만 "비록 오늘은 고도가 오지 못했지만 내일은 꼭 올 거"라는 희망을 주는 역할을 천진스럽게 해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희비극이지만 재미있는 연극은 아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태동한 부조리극은 형식도 내용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래서 더욱 복잡해지는 현대사회와 현대인들의 심성과 맞아떨어지는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지만, 인간관계나 소통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는 현실이다. 고도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올지 안 올지도 불분명하지만 우리가 메시아를 기다리듯 그 누군가를 갈구하고 있음을 이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일반 연극과 달리 시간과 공간이 모호하고 반복과 침묵이 잦은데도 젊은 관객들이 열광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물질적 풍요는 이루었어도 삶의 허무와 무의미함은 70년이 흐른 요즘 더욱 악화되었다는 반증이 아닐까.

이런 복잡한 상념을 떠나 한국의 대표적 연기파 배우 3인이 주축이 되어 엮어내는 역사적인 '고도를 기다리며'를 본 것만으로 가슴이 뻐근해 필자의 주관적인 소감을 피력해 보았다.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극단생활 대표.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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