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문학적 성찰시리즈’의 격조 있는 무대...나진환 연출, ‘연극 뮤지컬 드라마’로 공연 지평 넓혀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배우 정동환(74)은 70고개를 넘으며 구도자 같은 연극의 길을 걷고 있다. 필자는 젊어서부터 그의 팬으로 관극을 해왔지만 그때는 ‘연기 잘하는 진지한 배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최근 몇 년 동안 극단 파악과 함께 한 ‘단테 신곡-지옥편’, ‘대심문관과 파우스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이어 ‘톨스토이 참회록 안나 카레니나와의 대화’를 보면서 ‘고행의 수도승’ 같은 장인(匠人)의 모습에 외경의 마음을 갖게 되었다. 물 속 연기를 마다하지 않았고, 7시간 공연을 체력으로 버텨온 그야말로 구도의 연기자, 명배우라고 할만하다.
정동환 배우가 톨스토이로 나오는 ‘톨스토이 참회록, 안나 카레니나와의 대화’를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 소극장(~4월 16일까지)에서 다시 보았다.
2년 전 한양레퍼토리극장 공연 때보다 무대가 업그레이드되었고, 무엇보다 정동환(톨스토이), 정수영(안나 카레니나), 주영호(브론스키 등 멀티) 세 배우의 연기가 불을 뿜었다. 각자의 개인 연기가 최상의 기량이었고, 앙상블도 절정이었다. 나진환 연출은 음악과 영상에도 한층 공을 들여 ‘뮤지컬 드라마’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인문학적 성찰시리즈’의 격조 있는 무대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관객이 한 자릿수였다. ‘인문학적’이어서일까, 톨스토이가 해묵어서일까. 아니면 관람료(7만 원, 5만 원) 때문일까. 아무리 볼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이지만 정동환이라는 명배우가 출연하고, 대문호 톨스토이가 그의 걸작 ‘안나 카레니나’의 주인공 안나와 대화하는 기발한 발상의 공연에 이처럼 무관심한 현상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필자를 포함한 소수의 찐 팬과 젊은 청년들 몇만 문학과 음악과 미술과 영상이 어우러진 무대에서 불꽃 튀는 연기와 육중한 울림을 주는 공연을 만끽하는 호사를 누리면서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첫 관람 당시에는 내용이 잘 와닿지 않았고 지루한 감도 없지 않았다. 연기와 음악과 영상이 한 호흡으로 와닿지 않은 것이다.
이번 무대는 달랐다. 톨스토이의 참회로 깨달은 삶의 진실한 아름다움을 정동환 배우가 정확한 발성과 유려한 대사로 펼쳐내 전달이 잘 되었을 뿐 아니라, 연륜에서 우러나는 진득한 아우라로 깊은 울림을 주었다. 대문호가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과 간이역에서 만나 막차를 기다리며 대화를 나눈다는 설정은 정동환처럼 무대에서 치열하게 단련해온 배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연 때부터 정동환과 호흡을 맞춰온 안나 역 정수영이 이번 무대에서 열정적인 연기로 사랑에 목마른 여인의 매력을 한껏 발산했다. 마이크 없이도 또렷하게 대사를 전달했고, 온 몸을 던져 내면의 감정을 불살랐다. 특히 라스트의 죽음 장면은 압권이었다.
이번 공연에서도 안나의 연인 브론스키와 남편, 톨스토이 아들 역 등 멀티로 나온 주영호의 넘치는 에너지와 냉온탕을 넘나드는 복합적인 개성 연기로 무대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관객의 시선을 모았다. 특히 안나 역 정수영과 듀엣으로 추는 춤(박호빈 안무)은 호흡도 잘 맞았고 감정 표현도 뛰어나 극을 절정으로 끌어올리는 촉매 작용을 했다.
‘안나의 생각’ 역을 맡아 데뷔한 박채희는 낭독과 노래, 바이올린 연주까지 고루 소화해내 연기자로서의 가능성을 보였다. 톨스토이 딸 역 강정민은 극의 처음과 끝을 깔끔한 이미지로 매끄럽게 이끌었다.
서화영 음악감독이 지휘한 피아노와 첼로, 바이올린의 라이브 음악이 배우들의 연기를 감싸고 어루만지고 감성을 부추기면서 극과 일체를 이루었다. 배우들의 연기를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투사한 영상, 투사막과 물길이 인상적인 무대디자인, 의상과 가면도 극의 완성도를 이루는 데 역할을 했다.
끝으로 주목할 인물은 나진환 연출이다. 그는 극단 피악과 함께 국공립도 하기 힘든 ‘고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는 어려운 작업을 해왔다. 극한의 고통과 내적 갈등을 무대에 올려온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와 괴테를 결합(대심문관과 파우스트)하고, 톨스토이와 작품 속 주인공 안나를 만나게 하는 극작은 물론 '연극 뮤지컬 드라마'라는 형식으로 공연의 지평을 넓히는 작업을 하고 있다. 지원을 받은 작품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무대가 더 많아 어려움이 적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정책을 만드는 사람이나 지원기관 인사들이 현장을 와서 본다면 우리의 지원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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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극단생활 대표.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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