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톤 물로 비바람과 파도 연출...후반부 스펙터클 장면, 연극 현장감 극대화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3월 16일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한 천승세 작, 윤미현 각색, 심재찬 연출의 '만선(滿船)'은 초, 재연의 미비한 부분들을 보완하여 결점을 줄인 완성도 있는 무대를 보여주었다.
지난 수년 동안 페이스북에 많은 공연의 리뷰를 해왔지만 우리나라를 대표할만한 작품을 찾기 어려웠다.
필자는 '만선'을 다시 보면서 이만하면 한국 사실주의 연극의 최고 수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나름대로 높은 점수를 매겼다. 왜냐하면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 수 없는 무대만의 현장감이 생생하고, 서사가 일목요연할 뿐 아니라 군더더기가 없는 미려한 리얼리즘 연출에, 배우들의 연기가 극 중 인물의 캐릭터를 실감있게 살려냈기 때문이다.
종합 예술인 연극에서 좋은 작품이 되려면 희곡, 연출, 배우, 스태프 등 모든 조건이 갖춰져야 하는데 이번 '만선'은 그것들이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뤄 시너지를 뿜어낸 것이다.
무엇보다 심재찬 연출은 이번 작품에서 일체의 곁가지나 부수적인 요소들을 걷어내고 서사와 인물의 형상화에 주력했다. 서예의 일필휘지(一筆揮之)처럼 암전이나 장면전환 없이 임장감(臨場感) 넘치는 사실주의 무대를 펼쳐냈다. 필자를 비롯한 관객들은 110분 동안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극에 몰입했다.
천승세의 '만선'은 국립극단 희곡 공모에 뽑힌 작품이다. 악조건 속에서도 현실과 대결해 삶을 살아내는 뱃사람들의 숙명과 신념을 극으로 형상화해 그동안 여러 차례 공연되어 왔다. 필자가 이번 공연을 특히 평가하는 이유는 내용 전달이 충실했기 때문이다. 각색자 윤미현은 원작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순서를 바꾸거나 대사를 다듬어 ‘관객들이 보기 편하게’ 서사를 재구성했다. 이처럼 구성이 충실해 관객들은 작품의 내용뿐 아니라 인물들의 캐릭터를 이해하기 쉬웠고, 왜 제목이 '만선'인지를 여러 각도로 음미해 볼 수 있게 했다.
연출가 심재찬은 전작의 문제점들을 보완하고 일부 배역을 교체하여 완성도를 높이고 극적인 변화를 꾀했다. 단점은 개선하고 장점을 극대화한 것이다.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은 이태섭의 무대였다. 전작에서 경사가 심해 배우들의 연기가 불안정했고 주역들의 연기가 부각되지 못했었는데, 이번 무대는 경사를 완화해 한결 안정감을 주면서도 배우들의 연기를 생동적으로 살려냈다.
또한 무선마이크를 쓰지 않고 육성으로 감정을 살려낸 배우들의 화술이 국립극단다운 격조를 살려냈다. 오히려 대사가 진성으로 잘 들려 무대에 집중할 수 있어 좋았다.
이번 작품에서도 압권은 특수효과였다. 조명과 음향도 거들었지만 천정에서 억수 같은 비가 퍼붓고, 넘실대는 파도가 물거품을 일으키는 스펙터클 장면은 영화와는 다른 연극만의 입체적인 아우라를 느끼게 했다. 이 같은 현장감이야말로 인공지능 시대에도 연극이 존속하는 요체일 것이다.
필자의 개인적인 견해일지 몰라도 이번 공연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변모는 배우들의 연기였다. 출연진에 변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배우들이 자신의 캐릭터를 더도 덜도 아닌 꼭 필요한 만큼만 똑 부러지게 연기하는 절제미를 보인 것이다. 애드리브나 불필요한 동작을 거둬낸 연기의 집중도야말로 작품의 내용이나 인물의 개성뿐 아니라 주제와 메시지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선주 역의 김재건 배우는 국립극단 출신 원로답게 존재감을 뚜렷하게 드러냈다. 뱃사람들에게 군림하는 카리스마와 냉혹한 캐릭터로 위엄을 잃지 않은 악역을 해낸 것이다.
필자는 전작에서 주역인 곰치 역 김명수와 아내인 구포댁 역 정경순의 연기가 노력에 비해 관객에게 어필하지 못했다고 평했다. 이번에는 아니었다. 곰치는 뱃사람 체취가 체화된듯한 당당한 캐릭터를 구축해 고집불통의, 그러나 자부심과 신념에 찬 천생 어부의 투박한 심성을 뚝심 있게 형상화했다. 동작은 크고 분명했으며 소리는 자신감이 배어있었다. 구포댁은 물 만난 고기처럼 자식을 묻은 어미의 한과 그 수렁에서 벗어나려는 의지의 여인상을 구현해냈다.
이번 작품에서도 뱃사람 성삼 역 김종칠의 연기는 약방의 감초처럼 극의 간극을 메우는 연결고리로 작용했고, 인정미 넘치는 털털함으로 빛을 발했다. 이번에 새로 투입된 범쇠 역 박상종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집요하게 대시하는 끈적끈적한 캐릭터를 과하지 않게 표현했다.
새로이 교체된 젊은 배역들 역시 자신들의 역할을 똑 부러지게 해냈다. 아들 도삼 역 황규환은 아버지의 고집과 어머니의 불안 속에서 누이를 걱정하는 캐릭터를 개성 있는 음성으로 해냈다. 딸 슬슬이 역 강민지는 악조건 속에서도 행복을 꿈꾸나 희망이 절망이 되는 비련의 여인상을 당차게 해내 연민을 자아냈다. 그의 애인 연철 역의 성근창은 슬슬이에게 모든 것을 건 순정의 남성상을 진정성있게 연기했다.
특히 젊은 배우 3인은 변화를 바라는 희망의 상징으로 구세대와 대비를 보여 신선했다. 동네 아낙 역 조주경과 김경숙, 어부 역 정나진은 연기파 배우답게 주어진 역할을 야무지게 ‘똑 따먹었다’.
극 중 인물에게 '만선'은 무슨 의미일까.
곰치에게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꿈과 집념일 것이고, 구포댁에게는 바다를 벗어나 육지로 가고 싶은 염원인지도 모른다. 도삼과 연철에게는 젊은 세대의 변화일 수 있고, 슬슬이에게는 절망의 물거품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심재찬 연출의 '만선'을 보며 희랍 비극을 떠올렸다. 비극성이 주는 교훈과 카타르시스를 주고 있다고 느낀 것이다. 심재찬 연출은 뱃사람들의 숙명과 열악한 삶 속에서도 자부심과 신념을 잃지 않는 곰치의 의지를, 아들을 더 이상 바다에 묻고 싶지 않은 구포댁의 염원을, 밑바닥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희망 등 우리네 모습을 압축된 무대에서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곰치는 외친다. “바다를 떠나? 어림없는 소리!” 아들들을 바다에 묻은 구포댁은 하나 남은 아들마저 배에 띄워 육지로 보낸다. 이번 무대에서는 이 같은 고집과 소망이 팽팽히 맞서는 긴장이 바닥에 흘렀다. 여기에 5톤의 물을 퍼붓는 클라이맥스의 장관이 겹쳐지면서 심재찬의 '만선'은 사실주의 연극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했다고 본다. 단점이라면 너무 매끈해 거칠고 투박한 맛이 덜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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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극단생활 대표.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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