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호가 만난 人] 美유학파 원예농업전문가의 별난 인생 유전...고향서 일군 10억 매출 '맛집' 비화
[김두호가 만난 人] 美유학파 원예농업전문가의 별난 인생 유전...고향서 일군 10억 매출 '맛집' 비화
  • 김두호
  • 승인 2023.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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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김재정 진주 삼계탕집 '석원' 대표, 알고 보니 ‘비닐하우스 영농’ 1세대 개척자였다
- 국비유학생으로 미국에서 농업 신기술 전공...정치인 사촌형 도우며 보좌관 활동도
- 지옥과 천당 수십 번 오갔던 곡절 많은 청년기...한때 극단적 시도 생각도
- 미국 이민 생각 접고 요식업 뛰어들어...전국 삼계탕집 찾아다니며 공부
- 2001년 부터 고향 진주서 부부가 개발 개척한 삼계탕집 운영...입소문 타고 진주 맛집으로
 진주에서 맛집으로 소문난 삼계탕집 '석원'의 김재정 대표. 김 대표는 미국유학 출신 원예농업전문가로, 곡절 많은 희비의 청년기를 보내고 20여년 전부터 고향에서 삼계탕집을 운영하고 있다./사진=인터뷰365

인터뷰365 김두호 인터뷰어 = <인터뷰365>수록 인터뷰이는 얼굴과 이름이 알려진 명사들이 많지만, 무명의 보통사람도 있다. 귀감이 되고 감동을 주는 삶이나 드라마 같은 고난을 극복한 입지전의 주인공들이다. 진주 문산읍에 있는 대형 음식점 ‘석원’이라는 삼계탕 맛집을 찾았다가 우연히 주인 김재정(1948∼ 진주시 문산읍 동부로 537) 대표의 지나온 삶의 역정(歷程)이 독특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즉석 인터뷰를 시작했다.

진주 토박이인 김재정 대표는 지금 삼계탕 요식업으로 성공한 부자가 되었지만 그의 청년기와 중년기 삶의 무대는 희망과 절망의 양극을 오가는 유전인생의 본보기였다. 청년기에는 국비 유학생으로 미국에 건너가 온실 농작물 영농기술을 배워 국내 비닐하우스 원예농업을 개척한 선구자 시절이 있었다. 하우스 온실 농업기술을 성공적으로 선보이면서 그의 비닐하우스 단지는 농업인과 대학생의 견학 명소가 되어 전국에서 실습생들이 몰려들었다. 특히 수분을 고루 공급하는 온상 분무 기술을 국내 처음으로 개발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장래가 열려있던 성공한 혁신 농업인이 한때 정치 활동을 하는 집안 형의 후견인으로 걸음을 옮겼다가 파산, 방황 끝에 생명을 포기하는 극단의 선택 문턱까지 간 좌절도 겪었다. 밑바닥 맨주먹에서 다시 정신을 차린 그는 동네에서 소문난 삼계탕집을 염두에 두고 더 유명한 삼계탕 요식업에 도전, 꿈꾸던 대로 연 매출 10억대 대형 음식점으로 성장시켜 인생 3부의 드라마를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고 있다.

국비 미국 농업 유학생 80명 중 23명만 귀국

- 자연기후에 맞추어 논밭 농사를 하던 시절에 사계절을 두고 채소 등의 농작물을 재배 수확하는 비닐하우스 농업시대의 등장은 농업혁명과도 같았다. 진주지역에서 비닐하우스 혁신 영농의 개척자라는데.

“청년기를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새마을운동의 불길이 타오르던 시기에 정부가 농업계 고교 및 대학 출신 80명의 청년 예비농업인을 선발해 농촌진흥청에서 1년간 연수교육 후 다시 미국으로 2년 과정의 농업기술 유학을 보냈다.

1972년 8월이다. 나도 그중 한 명으로 미국 미주리주립대에 적을 두고 농장을 오가면서 실습기술 연수교육을 열심히 받았다. 수료 후 귀국 일정을 맞이했을 때는 23명만 돌아왔다. 배운 지식과 기술을 귀국 후 농촌근대화에 기여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지만, 당시 미국 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어렵게 사는 우리 농촌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드물었다.”

- 대다수 귀국을 외면한 그 시절에 고민 없이 귀국 결단을 한 용기가 놀랍다.

“나도 실습 작업을 했던 농장주가 그대로 있어 주기를 요청해 다소 혼란스러울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귀국을 포기한다는 생각은 언감생심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귀국 후해야 할 새로운 농업 대한 설계를 하고 있어서 홀가분하게 꿈을 안고 돌아왔다.”

- 농업 분야 유학이었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농업보다 공업 분야 직종으로 젊은이들이 모여들 때인데 귀국해서 농촌 생활로 돌아간다는 생각은 쉬운 결정이 아니다.

“귀국 후 곧장 선친이 이루지 못하고 남겨준 진주 문산 지역의 99.000㎡(약 3만여 평) 불모지를 논으로 개간하고 난 뒤 그 땅 절반을 비닐하우스 단지로 조성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우리 농촌의 온실 원예농업은 기술이 제대로 도입, 활용되지 않은 때여서 제대로 사계절 채소재배 비닐하우스 단지가 등장하자 지역 주민과 농민들부터 농업기술의 경이로운 결과물로 관심을 드러냈다.”

- 하우스 작물 재배는 온도, 습도, 환기조절과 물 공급 등을 재배 조건에 맞게 유지해야 하는데 보온에 중요한 분사기와 수막시설물 등 다양한 하우스 농업기술을 처음으로 개발했다는데.

“미국에서 여름에 활용하는 수막시설물을 응용해 우리식 겨울 보온용 수막시설물을 내가 처음으로 개발, 활용했다. 양수기로 퍼 올린 물을 바가지로 고랑에 공급하는 비효율적인 노동을 하고 겨울이면 보온을 위해 볏짚 거적을 덮는 중노동을 했으나 구멍을 뚫은 전선관을 분사기로 개조, 겹으로 된 비닐 위에 분사하면서 영하 10℃일 때도 영상 5℃까지 보온이 가능해졌다.

지금도 딸기 하우스에서 활용되는 농사기술이다. 또 보온에 너무 치중하다 보면 낮에는 고온에 과다 습도 현상이 나타나 원예작물이 성장, 수정에 문제가 많아 온실 고추 같은 것은 불량 수확물이 많았으나 냉장고 온도감지기와 연결한 환풍기를 활용해 일정한 온도로 자동환기, 수확량을 40% 이상 올리기도 하였다. 가끔 기술적인 발견, 발명 결과로 특허 따위를 생각하며 욕심을 냈으면 그 방면으로 성공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 지금은 고소득 농가 대부분이 비닐하우스 영농으로 사계절을 두고 농산물 생산을 하는 농업인들이다.

“가끔 그 길, 한길로 가야 할 걸 하고 농사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다. 나의 비닐하우스 단지가 당시 진주농대(현 경상대) 원예과 실습농장으로 추천되었고 다른 대학에서도 견학 실습생과 하우스 농업인들이 수시로 찾아오는가 하면 신문 방송 기자들의 인터뷰까지 요청해와 내가 일을 하는데 어려움도 따랐다.”

- 그런데 어쩌다가 정치 쪽으로 발길을 옮겼는가?

“나에게 장래가 촉망되는 수재이면서 인품이 좋은 사촌 형님이 있다. 성장기에 우리 집에서 함께 자라 친 형님과 같은 김재천(1947∼전 국회의원) 형님이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 발 벗고 뒷바라지를 하면서 나의 운명은 팔자에도 없는 엉뚱한 곳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 김재천 전 국회의원은 어떤 분인가?

“서울법대 시절에는 3선개헌 반대 투쟁위원장을 한 운동권 리더였다. 졸업 후 정치 활동을 시작해 진주에서 총선에 출마했을 때 나는 하우스 단지에서 원예작물 온상재배에 대한 전문가로 지역 농업인들에게 강의도 하며 출마지역의 인맥이 넓은 유지였기 때문에 집안 형의 당선을 위해 힘을 보탤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시기에 불행한 사태가 터졌다. 어느 날 새벽에 농장에 불이 난 것이다. 소방서 조사 결과는 고의성 방화로 원인을 분석했지만, 그 사건은 나의 큰 재산을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사라지게 한 것으로 끝이 났다. 당시 큰 건물 두 채 정도를 살 수 있는 5천만 원이 투자된 농장이었다.”

눈물로 채운 빈 쌀독, 좌절 끝에 가출

 진주에서 맛집으로 소문난 삼계탕집 '석원'의 김재정 대표(사진 왼쪽) 부부.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10억 매출 맛집을 일궜다./사진=인터뷰365 

- 농업에서 손을 떼게 된 계기가 처절하다.

“결국 피땀 흘려 개간하고 시범 하우스 단지로 인정을 받았던 시설이 날아가고 토지 재산만 남게 되었는데 그 땅도 처분해가면서 선거 뒷바라지를 하는 동안 인생 최악의 생활고를 겪는 사태까지 추락했다. 쌀독이 비어 쌀 대신 눈물이 채워질 때가 찾아왔다. 내가 가장 아끼던 재산인 인켈 전축도 팔았고, 아이들 돌 반지까지 팔아가며 가족 외에는 모든 것을 잃었다.”

- 형이 진주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시기도 있지 않았는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내가 보좌관을 했지만, 우리 형님은 일체의 부정한 청탁을 받거나 정당하지 않은 돈을 받은 적이 없다. 항상 가난했다. 이익을 위해 어떤 흥정을 해오는 사람을 경계했고 썩은 정치인을 가장 싫어했다.

재도전에서 당선되었을 때 첫 봉급(세비)을 어린 시절 자신을 키워준 우리 선친의 묘소에 얹어 놓고 눈물로 고마움을 표하고 나의 아내에게 건네준 것이 우리 가족에 대한 처음이자 마지막 사례 봉투였다.”

- 쌀독이 비어 있을 때를 어떻게 극복했는가?

“극복이 힘들어 떠나려고 한 때가 있었다. 나 스스로가 살아갈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고 싫었다. 2000년 정월 대보름날 새벽이었다. 불면에 시달리다가 노끈을 챙겨 들고 집을 나가 진주 청곡사가 있는 월아산을 숨 가쁘게 올라갔다. 걸을 때마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9부 능선쯤 갔을 때 눈앞에 알 수 없는 괴물체가 덮쳐 오는 것을 느꼈다. 공포감에 몸을 떨며 주저앉았다. 잔뜩 겁에 질려 막대기로 땅바닥을 두드리며 나도 모르게 노래를 불렀다. 그 순간 청곡사에서 예불 목탁 소리가 들려왔고 그와 함께 나는 괴이한 현장에서 탈출해 정신없이 하산했다. 내려와 보니 신발 한 짝이 벗겨져 나가고 없었다. 죽기로 하고 갔던 길에 저승사자일지도 모르는 괴물이 나를 되돌려 보낸 것 같은 이상한 체험도 했다.”

 美유학파 원예농업전문가→보좌관→요식업 대표

- 현재로 이야기를 돌려보자. 도대체 요리나 음식점 사업과 무관하게 살다가 삼계탕집으로 성공하게 된 동기가 궁금하다.

“힘들 때 고향 진주를 떠날 생각도 했다. 미국으로 이민을 생각하며 유학 시절 농장 대표에게 전화도 했는데 이미 고인이 된 것을 알았다. 그런 시기에 아내가 다니던 절의 스님이 삼계탕 요식업을 권했다. 엉뚱한 말씀이었지만 우리 부부의 미래를 이끌어 줄 어떤 운명적인 영감으로 새 직종을 예시해 준 것으로 느껴졌다.

그걸 하면 지나가는 바람도 도와줄 것이라고 한 말씀도 마음에 꽂혀 우리 부부는 그로부터 ‘삼계탕 원조’의 뿌리를 찾아 공부를 하며 개업 준비를 해나갔다.

나는 조선 시대 요리역사와 전래 전통 원조 삼계탕 요리법을 뒤져보며 온갖 지식을 섭렵해가고 아내는 전국 대도시의 대표적인 삼계탕집을 찾아다니며 노력 봉사를 자청, 주는 대로 품삯을 받고 주방 일도 하며 세세하게 조리법을 익혔다. 나도 연세 많은 할머니를 찾아다니며 전통 삼계탕 요리법 기록을 모으고 아내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가장 핵심을 둔 일은 좋은 식자재를 공급받기 위해 농업진흥원 등 관련 기관을 찾아다니면서 우수한 토종닭을 어디에서 어떻게 공급받을 수 있는지 생산지를 파악하는 일이었다. 전국 50여 곳의 양계장을 돌면서 공급처를 확보하는 임무가 나의 일상이었다. 지금은 치킨 시대지만 우리나라에 대규모 양계장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미군 부대가 큰 소비처가 되면서였다.”

 진주에서 맛집으로 소문난 삼계탕집 '석원'의 김재정 대표(사진 왼쪽) 부부. 김 대표는 절망의 시절에도 힘이 되어준 아내에게 고마움을 전했다./사진=인터뷰365

- ‘음식의 승부는 맛에 있다. 그러나 맛을 내는 데는 조미료를 쓰지 않고 요리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 비결도 독창적으로 개발한 것인가?

“2001년 5월 지금의 삼계탕집 ‘석원’을 개업했다. 삼계탕은 육질이 좋은 닭을 골라 대추 찹쌀 인삼 밤 등을 기본 첨가 식품으로 넣어 푹 삶아 뼈까지 대부분 먹는 보양식이다. 그 육수가 매우 중요한 맛을 좌우한다. 우리 집 요리 맛의 원천은 개업한 날로부터 22년간 식지 않게 끓이는 물에서 비롯된다.”

- 한옥으로 지은 음식점 건물이 크고 특이하다. 기와집 외부구조와 내부 시설, 여러 개의 방과 식탁 배치도 특색이 있지만, 옥외 정원의 조경 풍경이 전통 한옥의 깊은 멋을 나타내고 있다.

“나는 비닐하우스 안에서 사계절을 두고 온갖 작물을 혁신 농업기술로 재배 생산하는 전문가이다. 팔자에도 없는 삼계탕집을 준비할 때도 창의적인 시각으로 내 생각을 설계에 반영하고 아이디어를 창출했다.

운이 맞아떨어지느라고 금융기관의 지인이 찾아와 대출을 주선해주고 마침 강원도 산림청에 근무하는 친구가 산불 화제로 산더미처럼 쌓여 처분이 힘든 소나무 목재를 싼값에 살 수 있다는 정보를 전해와 좋은 목재를 골라 건축을 할 수 있었다.

또 한옥은 건축 시공 기간에 비가 오면 기와지붕 축조에 지장이 많은데 스님 말씀처럼 바람도 도와주었는지 우기가 비켜갔다.”

김재정 대표와 딸 경화 씨./사진=인터뷰365

- 연 매출이 어느 정도인가?

“평균 연 10억대 매출을 유지하다가 코로나 사태 시기 이후 7억 대 정도를 유지하고 있다. 지방 도시의 음식점 매출 규모로 보면 큰 음식점으로 꼽힌다.”

- 직종이 다른 세상을 살아온 지난 삶을 통해 참다운 인생이 어떤 것인지, 미래의 주인공인 청소년들에게 들려줄 삶의 지혜가 될 말씀을 들려달라.

“우리 선친이 서울법대에 합격한 형과 나를 앉혀놓고 하신 말씀이 있다. 법을 배운 사람이 법을 악용하고 권력과 재물을 탐하면 과중 처벌을 받아야 하고 음식을 만지는 사람이 음식 가지고 장난을 치면 다른 사람에게 독을 주는 것이니 이 또한 과중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하셨다. 어쩌다 내가 음식점을 하게 되었는데 손님들에게 약속을 지키고 신용을 지키는 것을 의무로 생각하며 살고 있다.

지금 세태가 걱정스러운 것은 자기 이익과 자기 권리, 자기편 이익과 자기편 권리만 생각하고 정치를 하는 지도자들이 판을 쳐 곧 주인공이 될 청소년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한때 정치 쪽에 몸담았던 사람으로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사람이 국가를 구성하는 요소인데 내 인생만 앞세우며 살다 보니 출산율이 떨어져 인구가 감소하는 시대로 접어드는 것도 미래의 불확실성 중 하나가 되고 있다. 좋은 세상, 좋은 나라로 가는 길이 자꾸 헝클어지고 좁아지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 인생은 자신이 생각지 않았던 길로 접어들어 예기치 않은 불행을 맞기도 한다. 굴곡이 많았던 지난 삶에서 가장 고마운 사람을 꼽자면?

“지금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장남 병준, 딸 경화, 막내아들 범수 3남매를 당당하게 키워내고 쌀독이 비어 있던 절망의 시절에도 한마디 불만 없이 남편과 가족을 뒷바라지하며 한결같이 남편의 재기를 도와주고 일으켜 세운 아내(인정은 / 1952∼ )에게 지금의 행복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 싶다.”  

김두호

㈜인터뷰365 창간발행인, 서울신문사 스포츠서울편집부국장, 굿데이신문 편집국장 및 전무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장, 88서울올림픽 공식영화제작전문위원, 국회보 편집자문위원, 제5대 서울신문사우회 회장 역임. 현재 대한언론인회 부회장, 서울영상위 이사,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

김두호
김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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