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발탄' 거장 유현목 감독 10주기를 추모하며 돌이켜 본 '그때 그 인터뷰'
'오발탄' 거장 유현목 감독 10주기를 추모하며 돌이켜 본 '그때 그 인터뷰'
  • 장석용 영화평론가
  • 승인 2019.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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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미학의 개척자 유현목 감독

[인터뷰365 편집자주] 올해로 <오발탄>의 거장 유현목 감독이 타계한지 10주년을 맞이했다. 최근 한옥희 원로 평론가가 소셜미디어에서 “리얼리즘 영화의 거장 유현목 감독의 타계 10주년을 맞이해 뜻 깊은 한국영화 100주년 기념행사와 더불어 유현목 감독의 추모전도 한국영상자료원 등에서 관심 깊게 기획 주최되기를 기대한다”는 글을 올렸다.

<인터뷰365>는 유현목 감독 생전에 작품 활동을 하는 유 감독 가까이에서 가장 밀접한 친분을 나눈 장석용 영화평론가(한국예술평론가협회 회장)가 인터뷰365에 올린 유현목 감독 인터뷰 기사를 되살려 10주기 기념으로 소개한다. 이 인터뷰는 2000년 8월에 진행됐다. 장석용 영화평론가가 당시 유현목 감독이 건강했을 때인 76세 때 인터뷰한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영화미학의 개척자 유현목 감독

‘아베마리아’를 좋아하는 백발의 거장 / 장석용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틀니 하느라 치과 치료를 받고 있고, 그 외는 특별히 아픈 데는 없어요. 나이가 들어서인지 잠이 없어 밤에 맥주를 대여섯 병 마십니다. 맥주를 들면서 상념에 잠기면 과거사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릅니다.

밤 2~3시쯤 취침해서 오후 1시 30분경에 기상하죠. 생활습관을 바꿔야겠다 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네요. 그렇게 밤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요즈음 재개발 바람이 불어 살던 집도 허문다고 하니 더욱 안타깝습니다.

-평생을 영화와 함께 하셨는데 삶을 잠시 뒤돌아보시면 무엇부터 생각나세요? 어린 시절 이야기부터 회고해 주시죠.

9남매 중 다섯 번째로 태어났지만 위로는 어릴 때 죽고 5남매만 남게 되었지요. 나는 어릴 때 장작불에 빠진 이후로 ‘무서운 것’은 멀리하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자랐지요. 황해도 사리원에서 덕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1939년에 휘문중학교에 입학했지요.

이때는 발명가를 꿈꾸기도 하고, 화가, 바이올리니스트, 무용가, 건축가 등의 다양한 장래희망을 생각하다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심취해 희곡작가가 되기로 하고 동국대학교 국문학과에 입학했지요.

해방 후, 피에르 슈날 감독의 <죄와 벌>을 열네 번이나 보았어요. 대학 재학시 ‘극예술연구회’를 만들고 김기림 선생의 지도하에 대학 최초로 가난한 어촌을 무대로 한 <해풍>이란 45분짜리 영화를 만들었어요. 그때는 비디오도 없고 해서 극장에서 영화장면을 외울 정도로 공부했지요.

47년부터 7년 반 동안 조감독을 하다가 55년 <교차로>로 데뷔했습니다. 당시 신문평에는 ‘정열적인 테크니션’ 이라고 타이틀이 붙어 있더군요. 그 무렵 주 영화장르는 멜로드라마였고, 스토리텔링 위주의 배우 의존형 영화가 많았지요. 테크닉을 마스터한 다음 주제의식이 강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57년 <잃어버린 청춘>은 데뷔 후 처음으로 영평상ㆍ부산일보상ㆍ국제영화잡지상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은 작품이었어요. 이어 <오발탄> <잉여인간>과 같은 부조리 고발의 사회적 리얼리즘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지요.

후반에는 <순교자> <사람의 아들>에서 보듯 사회 문제를 떠나 인간의 내적세계와 종교를 생각하는 영화를 흥행을 떠나 고집스럽게 만들게 되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95년에 <말미잘>을 만들었습니다.

-연출하신 작품 중에는 만족을 느낀 작품도 있으실테고 반대로 실망감을 가진 작품도 있을 것 같습니다. 몇몇 작품을 분류하신다면 어떤 것입니까?

<잃어버린 청춘>(1957)과 <인생차압>(1958), <오발탄>(1960), <아낌없이 주련다>(1962), <김약국의 딸들>(1963), <잉여인간>(1964), <순교자>(1965), <恨>(1967), <카인의 후예>(1968), <분례기>(1971), <불꽃>(1975), <장마>(1979), <사람의 아들>(1980)은 아끼는 작품이고, 실망스런 작품이 있다면 <그대와 영원히>(1957), <몽땅 드릴까요>(1968), <악몽>(1968), <말미잘>(1995)을 들 수 있죠.
 

-6ㆍ25 당시 애환이 많으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가족분들 얘기를 들려주시지요.

부모님과 5남매, 모두 7명의 가족 중에서 아버지와 평양신학교에 다니던 바로 아랫동생은 피신해 있던 과수원에서 폭사 당했고, 둘째동생은 해주예술전문학교를 졸업했는데 전쟁이 나면서 징집되어 인민군군악대에서 일했다던데 지금은 소식을 알 길이 없어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머니와 가족 즉 누이, 막내동생이 1ㆍ4후퇴 때 월남했는데, 어머니는 막내동생을 중앙신학교에 보낼 정도로 신앙심이 강하셨죠.
 

-슬하에 자녀분이 없으신데 아쉬운 점은 없으신가요?

결혼 후 4~5년 지나도 아기가 없어서 병원에 가니까 수술성공률이 반 반 이라 하길래 수술을 포기했죠. 섭섭한 적은 없어요. 자식이 없어서 오히려 영화에 몰두할 수가 있었지요. 영화와 제자ㆍ후배들이 아이들인 셈이지요.

-사모님이 화가이신데 소문난 내조를 하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내 작품은 화면전체가 캔버스니까 우선 미술 쪽의 구도잡기와 같은 도움이 필요하지요. 그래서 영화작업에서도 많은 도움이 되었죠.

-영화 스승이신 <임자없는 나룻배>의 이규환 감독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조감독으로 마지막 꼬리를 뗀 것은 이규환 감독님 밑이었는데 약주를 즐기셨고, 촬영에 들어가면 술도 끊고 일찍 일어나셔서 묵상하시고, 엄격하게 조감독을 다스리는 편이었지요.

-작품에 등장했던 수많은 배우들 가운데 누가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습니까?

김진규, 최무룡, 문희, 신성일을 들 수 있는데 김진규 씨는 사색형의 철학적 얼굴이고, 최무룡 씨는 다양성의 얼굴, 문희 씨는 얼굴은 작지만 포토제닉한 얼굴이고 화면 전체를 채우는 힘이 있지요. 신성일 씨는 내 작품 <아낌없이 주련다>로 데뷔를 했지요.

-감독님은 스캔들이 없으신 걸로 유명한데, 비방이라도 있으십니까?

배우와 스캔들이 있으면 그 배우를 작품에 안 쓸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영화가 망가지는 것 아닙니까? 많은 전례가 있잖아요.

-많은 제자 감독을 배출하셨는데 조감독 중 생각나는 사람과 작품에 가장 많이 캐스팅한 배우들은 누구입니까?

감독으로 이성구, 김호선, 김사겸 등이 있죠. 배우로는 김진규, 최무룡, 신성일, 엄앵란, 윤정희, 문희, 남정임 등이 우선 생각나네요.

-평론가들도 가깝게 지낸 분들이 많지요?

임영, 이영일, 변인식, 장석용, 고인이 된 허창, 안병섭 같은 분들이 있죠.

-한창 작품 활동을 하실 때는 검열이 심했던 시대였지요? 그때 얘기 좀 해주시지요.

과거에는 10분 이상 검열에서 잘리는 작품이 많았어요. 그렇게 되면 스토리가 튀게 되죠. <오발탄>에서는 상이군인이 소외그룹으로 묘사되고, “가자! 가자!”라는 대사가 지향하는 곳이 어디냐가 문제가 되기도 했죠.

65년작 <춘몽>은 외설장면 시비로 기소되었지만 기소유예로 끝이 났죠. 당시 시대상황이 그랬고 남한 제도가 나빴던 것이죠. 이만희 감독의 <7인의 여포로>는 인민을 인간적으로 그렸다 해서 반공법상 문제가 되었죠. 66년 파리에 본부를 두고 있는 세계문화자유회의는 세미나에서 ‘은막의 자유’를 발표했습니다. 당시 나는 이 단체의 회원이었어요. 그런데 군사정권은 국시를 반공으로 삼았지요.

군사혁명 1조에 반공이 최우선이었는데 이만희 감독의 <7인의 여포로>에 옹호 입장이었던 나에게 <춘몽>을 우회적으로 걸어 온 것이죠. <춘몽>은 여배우가 계단을 내려 백화점의 마네킹 뒤에 숨는 장면이 검열에 문제가 된 것이죠. 내부가 백화점으로, 표현주의적으로 그린 작품이었어요. 표현주의적 세트였죠. 박암이 가운을 밟으면 여배우의 가운이 벗겨지는데 지금으로 치면 격세지감이죠. 나신 장면이 있으면 아예 검열에서 반려될 각오를 해야 되는 상황이라서 나중에 자진 삭제했죠. 촬영현장에는 살색 스타킹으로 국부를 가리고 촬영했죠.

그러나 담당검사는 이번에는 촬영현장에 몇 명이 있었느냐를 문제 삼았죠. 반면 배우 박수정은 검사 앞에서 겁에 질려 증인을 섰는데, ‘국부를 안 가렸다’라고 대답해서 벌금 3만원이 나왔지요. 상고해서 기소유예가 되었는데 지쳐서 다음 단계는 포기했습니다.

다른 작품은 문제될 것 없었죠. 초기에는 키스 장면도 못하게 했어요. 간접묘사를 한 것이지요. 우스꽝스런 예를 들면 세 사람이 옴니버스로 <女ㆍ女ㆍ女>를 만들었는데 검열당국이 여자를 세 번 쓰면 간통 姦(간)자가 된다고 해서 <女>로 바꿔 검열을 통과하도록 만들었고, 문공부 총무과에 있던 사람이 영화과로 오면 검열은 해야겠고 영화를 모르니까 이런 결과가 빚어진 것이겠죠. 그런 시대였습니다.

-영화와 관련해 연출뿐만 아니라 다방면에서 일을 하셨지요?

52년 정창화 감독의 시나리오 <최후의 유혹>을 쓴 적은 있는데, 다른 작품은 윤색을 많이 했죠. 또 연출은 기본이고, 8mm 촬영과 편집이지요. 음악은 배경을 말해주면 분위기를 아는 담당이 저와 함께 협의해서 준비하는 편이죠.

-영화작가로 불리워지시기를 좋아하십니까, 아니면 장인으로 불리워지길 좋아하십니까?

작가라는 말보다 장인이라는 말이 좋아요.

-인상 깊게 보신 다른 감독들의 작품은 어떤 작품들입니까?

이규환 감독의 <임자없는 나룻배>, <갈매기>, <춘향전> 등 민족과 역사, 고전적 정서와 서정성이 담긴 작품과 김기영 감독의 <십대의 반항>, 임권택 감독의 <만다라>, 신상옥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김수용 감독의 <안개> 등이 있죠.
 

-장르별로 어떤 작품에 매력이 있으십니까?

젊었을 때는 리얼리즘 계열의 <오발탄>, <잉여인간> 나중에는 안정되니까 종교문제를 다룬 <순교자>와 같은 작품을 만들었는데 영화 속에 ‘하나님이 없다’라는 장면이 있습니다. 교인들이 항의하고, 모 기독교 신문은 ‘유현목은 사탄이다’ 라고까지 기사를 쓰기도 했습니다. 전쟁시절, 처참한 폐허에 성령이 내려오고 있지 않다고 묘사한 것이었죠. 하나님의 종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저의 가정환경을 보더라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극단적으로 ‘하나님은 없다’ 라고 한 것은 어디까지나 극적 상황이죠. 진정한 테마는 사랑입니다.

-어느 때가 영화 만들기에 편하셨습니까? 그리고 최근 한국영화의 경향이 대부분 상업성에 치중하는데 그런 점을 어떻게 보십니까?

1980년 <사람의 아들>을 만들기 이전에는 제작비가 열악했습니다. 필름도 아껴야 하고 엑스트라 동원도 제약되었죠. 하지만 지금은 우리 때와 비교해서 정보와 기술 모든 면에서 월등하게 우수합니다. 우리 때는 이승만 정권 말기이지만 극장세를 전면 면제 해주어서 영화인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감독이 하고 싶으면 할 수 있었던 때였죠. 고로 작가주의적 경향의 작품이 많이 있었어요. 그래서 한편으로 이승만 정권 때의 전폭적인 지원이 그립기도 합니다.

요즘은 젊은 감독들의 감각적인 영화가 많이 보입니다. 관객의 대부분이 20대 초반인 점을 감안하면 이해가 되긴 합니다. 그 외 계층에는 극장에 가는 것이 큰 행사여서 주도 관객의 취향에 맞추다 보니 감각적인 영화가 양산된 거죠. 액션물도 많이 나옵니다. 즉 상업성을 앞세우는 영화가 압도적으로 많죠. 몇 편 정도는 관심을 둘 영화가 나오기는 하지만 아쉬운 점이 많죠.

-신인감독들에게 주실 말씀이나 또 독립영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신인감독들이 너무 상업적으로 흐르는 것은 여러 모로 바람직한 현상은 아닙니다. 젊은 감독들은 작가정신을 가져야 생명이 오래 갑니다. 몇몇 감독들 말고 제작비 때문에 영화를 만들고 싶어도 마음껏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합니다. 독립영화 프로덕션에 많은 기대를 합니다. 저예산으로 디지털영화를 만들 수도 있는 상황이 왔으니까 독립영화는 더욱 발전할 것입니다.

-남북간의 영화교류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데올로기 문제가 이상 없으면 상호교류가 될 것 같아요. 합작도 가능할 것 같고요. 북한영화를 테이프로 몇 작품 보았는데 대규모 엑스트라 동원만 빼면 남한에 비해 수준이 10년 정도는 뒤진 것 같아요.

-신상옥, 김기영 감독과 더불어 라이벌 관계로 당대의 대표 감독으로 보는 경우가 많은데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얘기지요. 서로들 자기 영역을 지키면서 선의의 경쟁을 한 것이지요.

-그동안 아주 많은 상을 타셨는데, 어떤 상이 가장 보람이 있었습니까?

<순교자>는 내가 제작 감독한 작품입니다. 촬영 등 모든 분야의 영화인들이 도와주셨기에 이때가 제일 즐거웠습니다. 오픈세트도 크게 짓고 열심히 만든 작품이었어요.

-영화자료가 많으신데 보관이나 정리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사를 가게 되면 본격적으로 정리해야겠죠. 스틸도 많이 있고, 내가 쓴 글들도 다 보관되어 있죠. 상태도 양호하니까, 테이프로 만들어서 보관도 할 겁니다. 창고에 있는 자료들을 모아 집사람은 기념관을 만들자고 하는데, 돈이 많이 드니까 선뜻 엄두가 나지 않네요.
 

-미녀 화가와 결혼에 이른 연애시절 얘기도 좀 들려주시지요.

서른셋에 결혼했는데, 멀리서 훔쳐보니까 얼굴도 예쁘고 손수 만든 핸드백이 인상적이었어요. 캔버스에 받친 천을 가지고 카바를 하고 스케치북과 붓을 꼽고 다니는 모습에 마음이 끌렸지요. 알고 보니까 장인어른이 박성삼이란 목공예 대가였고 서울대 미대생이었어요. 다행이 기록 보는 이경자 씨(편집기사)가 학교동창이 되어서 잘 연결되었지요.

-영화를 만드시다가 가장 곤혹스러운 부분은 어떤 것인가요?

도봉산 바위나 추운 겨울 야외에서 촬영할 때는 영화계를 떠나고 싶었어요. 그런 고생을 수없이 겪어서 인내심이 생겼지요. 자동차 사고가 나서 골반이 깨어진 적이 있는데, 제작자가 돈이 없어서 조그만 병원에 입원했었는데 20일 동안 고통스럽게 누워 있다보니 또 인내심이 생긴 것 같아요. 차사고 덕택으로 인생을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지요.

-가장 친한 친구는 어떤 분이신가요?

변인식 영화평론가와 가깝게 지냈습니다.


-아직 살아계셨으면 하는 감독은 어떤 분이신가요?

김기영, 이강천 등입니다.

-영화학회를 창설하셨는데 당시의 분위기를 말씀해 주시죠.

다른 분야에는 학회가 있는데 아쉬웠죠. 아카데믹한 분위기 속에서 이론가들이 모여 결속을 통해 영화이론의 정보를 제공하고 서적도 만들어서 지적 능력을 향상시키는데 목적이 있었죠. 지금 남산 한양녹음실 옆에 사무실이 있었죠.

-소형영화작가협회를 창설하셨죠?

8mm를 몇 편 보고 느낀 점이 많았죠. 대상을 일반으로 하고, 대중에 대한 기성영화인의 책임감과 영화인구의 저변확대를 위해 만들었습니다. 초창기에 기성영화인들이 다수 참가했는데, 변인식, 하길종, 박상호, 정일성 등이 모였고, 연기자는 없었습니다.
 

-동국대 교수시절도 회상해주시죠.

1976년에 나는 학위가 없지만, 이선근 총장이 휘문 선배(?)여서 엉뚱한 제의를 합디다. 학교에 후진을 양성하라 해서 죠교수, 부교수, 예술대학장, 명예교수로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힘이 닿는 한 동국대학교에는 나갈 작정입니다.

-제4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유현목 감독 회고전과 박근자 여사 그림 전시회를 함께 열었는데 참 흐뭇해 보이고 보기가 좋았습니다. 어떤 느낌을 받으셨는지요?

주최측에 우선 감사하고, 젊은이들에게 회고전을 통해 유현목을 재인식하게 해줌으로써 우리 영화사를 읽게 해준 데 의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제 아내까지 전시회 기회를 주셔서 고마울 따름이죠. 잊혀져 가는 원로 감독을 부활시켜준 계기가 되었죠.

-영화계에도 이분화되는 경향이 많아지는데 이에 대한 견해는 어떠십니까?

그 원인은 제도권에서 너무 안주한 측에 대한 불만이 표출되어서 그런거죠. 정당에도 여야가 있듯 선의의 경쟁으로 좋은 성과가 있어야겠습니다.

-정부는 영화를 위해 어떤 지원을 우선적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제작지원이 우선 중요하고, 그 다음 복지문제죠. 문광부에서 좀 신경을 써주셨으면 해요. 생각보다 가난한 영화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연세 드신 감독의 작품도 많이 나오는데 앞으로 만드시고 싶은 영화라면?

심리주의적이고 종교와 탐미적이며 우주를 관통하는 영화가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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