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을 통해 삶을 구원하는 '복수의 리허설'...연극 '햄릿–디 액터'
'연극'을 통해 삶을 구원하는 '복수의 리허설'...연극 '햄릿–디 액터'
  • 주하영
  • 승인 2018.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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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최무열 프로듀서, 성천모 각색·연출 'HAMLET-The Actor'
최무열 프로듀서, 성천모 각색·연출의 연극 ‘햄릿–디 액터‘ 포스터. 이 연극은 2012년에 초연된 이후 2013년 ‘한국셰익스피어학회’의 창립 5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했던 세계 석학들의 극찬을 얻어낸 작품이다. 미국 MIT 공대 인문학 강의의 공식 연구 자료로 선정되는 쾌거도 올렸다./출처=하모니컴퍼니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햄릿’이라는 이름의 무게는 무겁다.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을 이름, 무언가를 결정하고도 쉽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지나치게 깊은 사유만 하는 사람을 빗대어 부르는 이름, ‘햄릿’. 

분명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라 할 수 있는 ‘햄릿‘은 친숙하다. 하지만 셰익스피어 사후 400년이 넘도록 ‘햄릿‘에 관한 수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왔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햄릿’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가 왜 그토록 ‘사유’에 집착했는지, 왜 그토록 ‘복수’를 유예하고 망설였는지, 왜 인간을 혐오하고 ‘광기’를 가장했는지, 어렴풋이 짐작만 할 뿐 우리는 정확히 햄릿의 우울함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셰익스피어의 어려움은 분명 이 지점에 있다. 해석의 다양성과 애매모호함은 T.S.엘리엇의 표현처럼 “모나리자와 같은 작품”인 ‘햄릿‘이 얀 코트가 명시하듯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의 전화번호부 두께의 두 배에 달하는 햄릿 연구서 목록들”을 낳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햄릿‘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 ‘모나리자‘의 미소처럼 알 듯 말 듯 숨겨진 코드들이 가득하고, 답을 찾도록 끊임없이 요구되는 질문들이 가득하다.

이 때문에 ‘햄릿‘은 어렵고 무겁지만 충분히 도전적이고, 지루하고 답답하지만 충분히 매력적이다. 무엇보다 ‘햄릿‘은 대부분의 관객들이 흥미를 느끼는 복수의 비극이며, 비극은 언제나 그렇듯 죽음과 삶에 대해, 존재에 대해 생각할 여지를 남기고, 우리의 삶을 다시 한 번 돌아보도록 만든다.

 연극 ‘햄릿–디 액터‘ 콘셉트 컷 

최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비극‘이라는 부제와 함께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을 오직 단 세 명의 배우에 의해 풀어낸 흥미로운 연극 ‘햄릿–디 액터‘가 공연됐다.

제 1회 대한민국 예술문화인 대상을 수상했을 뿐 아니라 제 1회 셰익스피어 어워즈 젊은 연출가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햄릿-디 액터‘는 지난 2012년에 초연된 이후 2013년 ‘한국셰익스피어학회’의 창립 5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했던 세계 석학들의 극찬으로 인해 해외 디지털 아카이브 웹사이트에 공연대본 및 녹화자료가 콘텐츠로 등재될 기회를 얻었다. 또한, 미국 MIT 공대 인문학 강의의 공식 연구 자료로 선정되는 쾌거를 이룩했다.

프로그램에 따르면, 연구자료 선정에 까다로운 MIT 공대가 ‘햄릿-디 액터‘를 선택한 이유는 “원작에 대한 전에 없이 신선하고 색다른 해석과 깊이 있는 이해“ 때문이다.

실제로 ‘햄릿-디 액터‘는 제대로 공연한다면 4시간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텍스트를 110분이라는 비교적 짧은 시간에 담아내면서도 마치 강렬하게 몰입된 ‘햄릿 설명서’를 읽은 듯 충실함을 선사한다.

각색과 연출을 맡은 성천모는 원작 텍스트에 대한 세심한 이해와 분석을 바탕으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더해 ‘복수를 지연시키는 햄릿’에 대해 나름의 정당한 이유를 제공한다.

프로듀서를 맡은 최무열은 ‘햄릿-디 액터‘의 기획의도에 대해 “공연은 살아있는 사람이 행하는, 환경에 따라 그때그때 바뀔 수 있는 시간 예술이며, 관객과 배우의 조화 속에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연극 ‘햄릿-The Actor‘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이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고 말한다.

일단 시작되고 나면 죽음이 올 때까지 멈출 수 없는 삶처럼,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포물선을 그리며 겨냥된 목적지 근처 어딘가에 도달하듯, 배우이자 인물, 사람인 햄릿은 극이 시작됨과 동시에 자신만의 길을 떠난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을 오직 단 세 명의 배우에 의해 풀어낸
‘햄릿-디 액터‘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을 오직 단 세 명의 배우에 의해 풀어낸다. 사진은 ‘햄릿‘역을 맡은 배우 류지완(왼쪽), 이호협(오른쪽) 

‘햄릿-디 액터‘의 차별성은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며 홀로 아지트에서 시간을 보내던 햄릿이 아버지의 혼령과 마주하고 복수할 것을 결심한 순간, 때마침 찾아온 두 배우 캠벨과 사라와 함께 하는 ‘복수의 리허설‘을 통해 어떻게 복수할 것인가를 ‘연극’으로 펼쳐 보인다는 데 있다.

관객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무대를 통해 햄릿의 비극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햄릿의 복수를 위한 리허설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 것이며,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인지를 지켜보게 된다.

이 때문에 이 ‘비극’은 재미있다. 그리고 설득력이 있다. 자신의 어머니와 재혼한 숙부 클로디어스가 왕을 독살한 범인이라는 사실을 사라와 캠벨에게 확인시키기 위해 벌이는 극중극 ‘곤자고의 암살‘도, 그로 인해 입증된 클로디어스의 죄를 응징하고 제대로 된 복수를 하기 위해 연극이라는 형식의 ‘리허설’을 한다는 설정도 관객들에게는 흥미롭고 재미있다.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닌 환상이며, 클로디어스의 범죄 외에 그 어떤 비극도 아직 발생한 바가 없기 때문이다.

‘햄릿‘에 있어 대부분의 관객들이 가장 답답함을 느끼는 부분은 극 중 햄릿이 클로디어스가 아버지를 살해한 범인임을 확인하고도 참회의 기도를 하는 클로디어스를 향해 칼을 찌르지 못하고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그냥 놓쳐버린다는 점이다.

비극은 사실상 이 지점에서부터 출발한다. 어머니를 향해 비난을 퍼붓고 분노하던 햄릿이 자신을 엿보던 폴로니어스를 충동적으로 찔러 죽이게 되는 비극도, 그로 인해 미쳐버린 오필리아가 결국 물에 빠져 죽음에 이르게 되는 비극도, 아버지와 여동생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수에게 복수하려는 레어티즈와의 검술시합이 독주와 독을 바른 검으로 인해 어머니 거트루드와 레어티즈, 햄릿 자신의 죽음을 불러오는 비극도, 모두 그가 ‘행동해야 할 순간에 행동하지 못함’에서 연유한다.

그가 보여주는 ‘사고와 행동 사이의 간극’은 관객들에게는 ‘행동하지 못하는 햄릿’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의문을 남긴다.

 연극 ‘햄릿–디 액터‘ 콘셉트 컷. 이 연극은 햄릿이 아버지의 혼령과 마주하고 복수할 것을 결심한 순간, 때마침 찾아온 두 배우 캠벨과 사라와 함께 하는 ‘복수의 리허설‘을 통해 어떻게 복수할 것인가를 ‘연극’으로 펼쳐 보인다. 

‘햄릿-디 액터‘는 셰익스피어의 원작 텍스트를 해체하고 다시 조합하여 재배열한다. 극은 정확히 극중극을 관람하던 클로디어스가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해 뛰쳐나가고 그로 인해 화가 난 어머니가 햄릿을 방으로 부르기 직전, 바로 그 시점에 멈춰있다.

아직 햄릿은 ‘죄악의 악취‘가 하늘을 찌름에 괴로워하며 형제를 죽인 카인의 범죄를 저지른 비열한 자신이 용서조차 구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있는 클로디어스의 참회의 기도를 목격하지 못했다.

극은 이성보다는 감성의 지배를 받아 결과에 대한 생각 없이 상대를 향해 칼날을 들이대는 충동의 순간에 일시정지 된 채 앞으로 일어날 경우의 수를 미리보기라도 하듯 원작 텍스트의 중요한 장면들을 오직 두 배우와 햄릿의 ‘연극 리허설’의 형태로 선보인다.

이 때문에 사라와 캠벨, 햄릿은 각기 1인 다역을 소화해내며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환상’을 펼쳐 보인다.

사라는 말한다. “이런 때는 오히려 현실을 뛰어넘는 환상적인 연극을 보는 게 중요하죠...연극은 때때로 우리가 몰랐던 사실을 무대를 통해 드러냅니다.”

햄릿은 대답한다.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더러운 죄악은 눈에 보이질 않으니 세상 사람들의 눈이 읽을 수 있도록 연극이 도울 책임이 있겠군... 지금부터 우리는 한 편의 연극을 만들게 될 거야. 이 연극은 세상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서 예쁘고 좋은 것 뿐 아니라 끔직하고 잔인한 것의 무게를 볼 수 있게 만들어 줄 수 있어!”

사실 복수는 말처럼 쉽지 않다. 상대를 찌르는 일은 자신을 찌르는 일을 동반하게 마련이며, ‘나’를 희생하지 않고 ‘타인’을 해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햄릿의 망설임과 주저는 상당히 현실적이다. 복수를 하자니 겁이 나고, 안 하자니 견딜 수 없는 복잡한 마음은 ‘사유’를 불러오고, ‘사유’는 ‘죽음’의 의미를 따지도록 만든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두 달도 되지 않아 숙부와 재혼한 어머니 곁에서 아버지의 살해범으로 숙부를 의심하는 자의 사유란 더 복잡할 수 있다.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라!”는 대사로 표출되는 어머니를 향한 분노는 사랑하던 여인 오필리아를 향해 “무슨 일이든 저지를 수 있는 게 인간이야. 인간을 낳아서 뭐해? 수녀원으로 가!... 그럼에도 그대가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면 내가 저주를 퍼부어주지!”라는 독설을 던지는 여성 혐오로 번진다.

자신의 존재가 수치스럽고, 아버지를 향해 굽실거리던 대신들이 한 순간 방향을 바꿔 숙부를 향하는 것이 허망하며, 한낱 ‘먼지’로 변한 육체가 구더기들의 밥이 되고 그 구더기를 먹고 자란 생선을 양분으로 생명을 이어나가는 인간이 혐오스럽다.

그의 혐오는 자신 역시 인간이라는 사실에 좌절하고, 주변의 모든 상황이 명백함에도 “죽은 뒤의 세상에 대한 불안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염려”로 인해 결심이 흔들리는 인간의 이성, 즉 ‘분별’을 비난한다.

 연극 ‘햄릿–디 액터‘ 콘셉트 컷/사진=하모니컴퍼니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는 잠드는 것일 뿐인 죽음이 그 다음에 불러올 악몽을 두려워해 삶 속에서의 모든 횡포와 모욕, 고통을 참도록 만든다는 인식에 이른다.

그는 외친다. “이만하면 복수를 위해 이성과 정열이 터져 나와야 한다. 그런데 왜 아직 결심을 못하고 이런 연극만 계속 하고 있는 것인가? 내 마음아, 이제부터 잔인해져야 한다!”

복수, 그 근간에는 ‘정의’를 세우고픈 마음이, ‘진실’을 밝히고픈 간절함이 존재한다. 하지만 정의와 진실이 아닌 ’죽음’이 목표가 되어버린 복수는 더 많은 고통과 비극, 죽음을 불러온다.

결국 복수를 위한 햄릿의 행보가 불러오는 부수적인 피해는 오필리아를 강타한다. 3층 객석 높이까지 곧게 뻗은 가파른 계단에 거꾸로 매달린 채 물에 빠져 죽음에 이른 가련한 오필리아를 향해 쏟아져 내리는 아름다운 꽃잎들은 처절하고 아프다.

붉은 ‘피’를 상징하는 꽃잎은 복수의 소용돌이 속에서 각기 다른 욕망을 추구하며 행보를 이어나가던 인물들, 즉 자신의 딸을 정치적 목적을 위해 상품처럼 거래하던 폴로니어스와 자신을 의심하는 햄릿의 ‘광기’의 진상을 밝히려던 클로디어스에 의해 ‘희생된 제물’인 오필리아를 강조한다.

“제발 그만해! 내가 원한 건 이런 이야기가 아니야!”라고 외치며, 고통스러워하는 햄릿에게 사라가 말한다.

“어떤 이야기를 원하십니까? 한 번에 복수하는 연극? 신이 하듯 완벽하게 왕을 암살하는 연극? 당신이 원하는 연극은 도대체 어떤 연극입니까? 비극은 우리의 의지대로 흐르지 않는 운명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결국 ‘더러운 음모의 끝은 지옥이란 교훈을 남겨야 하는 비극‘을 연기하는 배우인 햄릿은 과거가 현재를 설명하고 현재가 미래를 결정하는 삶의 논리에 맞춰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치닫는 ‘복수의 리허설’의 끝을 향해 나아간다.

혼자서 레어티즈와의 결투장면을 연기하겠다는 햄릿은 말한다.

“연극만큼 잔인한 것이 또 있을까? 우리가 만든 연극이지만 한번 시작되면 우리의 의지를 배신하고 현실보다 더 잔인하게 흐른다. 연극이 ‘환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연극일 뿐이라는 ‘안도’ 때문이다.”

그렇다. 환상은 현실이 아니라는 안도를 준다. 하지만 개연성이라는 논리적 흐름 속에 연극은 삶과 다르지 않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라는 측면에서 같은 선상에 있는 레어티즈와 햄릿을 둘 다 연기한다. 서로를 향해 겨누는 칼은 결국 자신을 겨눈 ‘죽음’이 된다.

사이먼 크리츨리와 제이미슨 웹스터는 ‘햄릿‘은 카메라의 암상자가 거꾸로 맺힌 상을 통해 세상의 모습을 구현하듯 ’최악의 상태의 인간’이라는 환상을 보여줌으로써 현실을 구원한다고 말한다.

연극이라는 환상은 산만하고 혼란한 세상 속에서 불편한 진실들과 마주하고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기회를 얻도록 만든다. 결국 환상은 행위를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으로 우리의 삶에 작용한다.

‘복수의 리허설’을 마친 햄릿은 현실 속에서 어떤 선택을 했을까? 참회하며 기도하던 숙부를 향해 복수의 칼날을 뽑아들었을까? 아니면 폴로니어스와 오필리아, 레어티즈를 구원하고 어머니를 되돌릴 수 있는 다른 방법을 간구했을까? 우리의 삶 속에도 복수하고픈 순간이 찾아온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햄릿의 말처럼, 비극의 교훈은 하나이다. “음모의 끝은 지옥일 뿐”, 삶에는 “나사가 풀어져 엉망진창인 세상”에 여전히 정의의 필요성이 살아있음을 알리는 ’연극’이라는 환상이 필요하다. 연극은 삶을 위한 ‘리허설’이다.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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