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무거움을 일깨우는 사람...연극 '애도하는 사람'
존재의 무거움을 일깨우는 사람...연극 '애도하는 사람'
  • 주하영
  • 승인 2018.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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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텐도 아라타의 '애도하는 사람(悼む人)' 원작, 오오모리 스미오 각본·김재엽 연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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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애도하는 사람' 시즈토와 유키요 캐릭터컷/사진=두산아트센터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존재의 무게를 잴 수 있을까? 존재의 무게를 느낀다는 건 인생에 단 한번 뿐인 삶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는 뜻일까? 아니면 어떤 삶이든 죽음에 이르고 망각된다는 점에서 그 가벼움을 허무로 받아들인다는 뜻일까?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 육체와 영혼, 우연과 필연에 대한 성찰을 이어온 체코출신의 소설가 밀란 쿤데라는 “인생을 짓누르는 공허함의 억압적인 가벼움”, 즉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삶에 대해 무력감을 느끼도록 만들고 그 무력감이 커질수록 인간은 “존재의 가벼움에 점점 더 짓눌리게 된다”고 말한다.

그는 ‘웃음과 망각의 책‘에서 “뱃속의 공허한 느낌, 그 참을 수 없는 무게의 결핍”이 어느 순간 무시무시한 ‘가벼움의 짐’이 되고 더는 한 순간도 그 가벼움을 지탱할 수 없는 순간이 온다는 점을 묘사한다.

지난 6월 12일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는 2009년 나오키상을 수상한 일본 작가 텐도 아라타의 소설을 오오모리 스미오가 각색한 연극 ‘애도하는 사람‘(6.12~7.7)의 막이 올랐다.

연극 '애도하는 사람' 콘셉트 컷/사진=두산아트센터

전국을 떠돌며 죽음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모든 사람을 ‘애도’하려는 한 남자 시즈토를 중심으로 삶과 죽음,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해 깊은 철학적 접근을 시도한 ‘애도하는 사람‘은 나오키상 심사위원이었던 소설가 이노우에 히사시로부터 “도스토옙스키에 견줄만한 문학적 모험”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평범한 의료기기제조회사 영업사원이었던 청년 사카츠키 시즈토는 어느 날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얼굴도 모르는 타인들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직장생활을 하며 모아둔 돈을 아껴 쓰며 신문, 라디오, 잡지를 통해 접할 수 있는 모든 이들의 사망기사와 부고(訃告)를 점검하고 ‘죽음’이 지나간 자리라면 어디라도 찾아가 애도한 후 죽은 이의 ‘생전의 삶’을 자신의 ‘기억’에 새기는 이 남자는 벌써 5년째 이 일을 계속해오고 있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마저 일상이라는 삶 속에 파묻히고 흐르는 시간과 함께 망각되는 삭막함 속에 타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사람’이라니 그 숭고함에 감사와 존경을 표해 마땅할 테지만 세상은 그에게 그리 관대하지 않다.

사람들은 모든 죽음의 무게를 똑같이 인식하며, 고인의 삶에 대한 명확한 지식도 없이 자신이 기억할 수 있는 방식대로 나름의 규칙을 정해 ‘애도’라는 행위를 이어나가는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죽음’의 언저리를 떠도는 그를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들은 함부로 타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고, ‘애도할 가치’를 따지지 않는 일은 옳지 않다고 비난한다.

그가 죽은 이를 애도함에 있어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오직 세 가지 뿐이다.

“당신은 누구에게 사랑을 받았으며, 누구를 사랑했고, 어떤 일로 사람들에게 감사를 받았습니까?”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기사들로 잡지의 지면을 채우며 인간에 대한 혐오, 세상에 대한 불신을 키워 온 주간지 기자 마키노 코우타로는 극 초반부터 관객들을 향해 핵심적인 질문을 던진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과 생판 모르는 타인의 죽음, 사람의 죽음이란 그렇게 나뉘게 마련이야. 크나큰 공헌을 한 사람의 죽음과 극악무도한 자의 죽음, 사고로 죽은 아이와 집단자살에 동참한 아이의 죽음이 어떻게 같을 수 있지? 애도할 가치가 있는 죽음, 그렇지 않은 죽음, 삶이 제각각이라면 죽음도 제각각이어야지!”

연극 '애도하는 사람' 공연 장면. 어느 날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얼굴도 모르는 타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여행을 떠난 청년 사카츠키 시즈토는 5년 째 죽은 이의 생전의 삶을 자신의 기억에 새기는 일을 하고 있다. /사진=두산아트센터

시즈토처럼 죽음에 차이를 두지 않고 애도한다면, 자신과 같은 기자들의 밥줄은 끊기고 말거라 외치는 마키노는 죽은 이를 애도함에 있어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보다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초점을 맞춰 좋은 기억만을 남기려는 시즈토를 맹렬히 비난한다.

“그건 전부 자네 혼자만의 생각이잖아? 재밌어? 이게 다야?”라고 몰아붙이는 마키오를 향해 시즈토가 말한다. “어차피 처음부터 제 마음대로 하는 일이었습니다. 폐가 될까요?”

한쪽 무릎을 꿇고 오른손은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렸다가 가슴 앞에 모으고, 왼손을 지면에 대었다가 가슴으로 가져가 두 손을 포개고는 “당신이 이 세상에 살아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겠습니다!”라고 속삭이는 남자 시즈토를 사람들은 ‘애도하는 사람’이라 부른다.

죽은 이에 대해 주변 사람들에게 묻고 다니거나 일반적이지 않은 ‘애도’의 행위로 의심을 사 종종 경찰로부터 신원확인을 요청받는 시즈토에게는 위암 말기로 호스피스 케어를 선택한 어머니 준코와 수상쩍은 여행을 하는 오빠를 둔 탓에 약혼자로부터 버림받은 여동생 미시오가 있다.

연극 '애도하는 사람' 공연 장면. 시즈토와 그의 어머니 준코, 여동생 미시오/사진=두산아트센터

처음 몇 년을 제외하고는 집으로 되돌아가지 않았던 시즈토는 어머니를 향해 무섭게 다가오는 죽음과 여동생을 향해 새롭게 다가오는 생명의 탄생에 무지한 채 오늘도 잊혀져가는 수많은 타인의 ‘죽음’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죽음을 가슴에 새기기 위해, 아니 가능한 더 많은 사람들의 삶을 기억하기 위해 그는 내일도 모레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애도의 여정’을 이어나간다.

‘애도’란 ‘사람의 죽음을 슬퍼함’을 뜻한다. 연극 ‘애도하는 사람‘의 드라마터그인 이시카와 쥬리에 따르면, 일본어의 ‘애도’(悼む)의 독음 ‘이타므’는 ‘통증을 느끼다, 아프다’는 뜻의 痛む와 ‘물건이나 음식이 상하다’는 뜻의 傷む의 경우에도 같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일본어로 ‘이타므’라는 말은 자연스레 어원이 같은 동사들의 모든 뜻을 합해 “누군가의 죽음을 아파하고 마음이 상한다”는 의미를 담는다고 할 수 있다.

영어의 경우에도 ‘애도’는 ‘Mourning’과 ‘Grief’를 혼용해서 쓰는 경향이 있다. ‘Grief’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슬퍼하는 감정, 때로는 ‘무감각’하고 ‘분노’와 ‘후회’에 시달리며, 폐부 깊숙한 곳을 내리누르듯 하나로 뭉쳐져 한 곳에 쌓이는 고통, 그리고 가슴이 뻥 뚫린 것과 같은 ‘허전함’과 ‘공허함’을 의미한다. ‘Mourning’은 그러한 감정들을 가슴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어떻게든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연극 '애도하는 사람' 공연 장면/사진=두산아트센터

상실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을 치료하는 심리전문가들은 말한다. 애도에 진심을 다한 사람은 ‘치유’를 경험할 수 있으며, 죽은 이가 남긴 사랑의 가치와 기억을 가슴에 소중히 간직한 채 다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이다.

단, ‘애도의 여정’은 각자 자신의 속도와 단계, 보조에 맞춰 움직여져야 하고,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모습과 형태로 이어져야 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애도의 여정’에는 필요한 몇 가지 과정들이 있다.

먼저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상실의 고통’을 인정하는 과정, 자신이 죽은 이를 기억할 수 있는 일종의 기념 혹은 상징, 즉 ‘메멘토’(memento)가 될 수 있음을 인지하는 과정, 그리고 ‘새로운 의미’를 찾아 ‘새로운 자아’를 발전시키는 과정이 바로 그것이다. 죽음에 대해 말하는 일은 계속될 수 있지만 슬픔을 극복해야 한다거나 견뎌야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또한, 애도하는 자신과 같은 무게와 감정으로 타인 역시 애도할거라는 기대를 가져서는 안 된다. 죽은 이를 기억하기 위한 자신만의 ‘미션’을 수행하되 시간의 흐름 속에 무뎌지는 자신을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치유는 천천히 온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애도하는 사람’ 시즈토는 이 모든 과정을 자신만의 방식대로, 자신만의 속도에 맞추어 실행한다. 하지만 그가 끝까지 놓지 못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 속에 무뎌지는 자신, 삶 속에서 망각되는 죽은 이에 대한 ‘기억’이다.

연극 '애도하는 사람' 공연 장면. 마키노 코우타는 시즈토에게 죽음의 경중을 따지지 않는 애도의 불합리함을 지적하며 비난한다./사진=두산아트센터

그는 망각으로 사라지는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견딜 수 없어하며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끝까지 애도할 수 없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

그에게 애도는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견딜 수 있는 무거움’으로 만드는 행위이며, ‘죽음‘이 아닌 ‘삶‘을, 존재를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죽음을 애도함으로써 ‘삶’의 실루엣을 기억하는 시즈토는 죽음을 피하려 하지만 함께할 수밖에 없어 좌절하거나 고통 받는 인물들과 대척점에 서있다.

 연극 '애도하는 사람' 공연 장면. 시즈토와 그를 따르는 여인 유키요. 죽은 이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애도 여행'을 하고 있다는 시즈토에게 유키요는 자신이 동행해도 되냐고 묻는다./사진=두산아트센터 

사랑하는 이에게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죽음’을 선물하고 그 죽음의 실루엣에 사로잡혀 벗어나지 못하는 나기 유키요, 수많은 살해의 기사들을 써오며 인간의 잔인함과 냉소, 무관심과 무책임에 지쳐 죽음과 직면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임종을 끝까지 거부하는 마키오.

그리고 위암 말기로 점점 더 심해지는 육체의 고통에 몸부림치며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딸이 출산할 때까지, 끝없이 죽음이 유예되기만을 기대하는 준코, 자신의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만이라도 엄마의 죽음이 다가오지 않기를 기도하며 집에서 출산하겠다는 결심을 굳히는 미시오, 그리고 애도의 여정 속에서 시즈토가 만난 수많은 ‘죽음’과 사연으로 연결된 사람들...

죽음을 향해 흐르는 삶 속에서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상실’을 통해 끝없는 후회와 상처, 그리움, 혹은 분노와 원망, 아픔에 노출된다.

죽음은 상대의 ‘끝’ 뿐만 아니라 나의 ‘끝’ 또한 인식시킨다. 나의 끝이 어떻게 읽힐지, 나의 모든 것이 어떻게 사라져갈지, 나의 삶이 어떤 의미를 남길 것인지, 죽음은 그렇게 나의 ‘사후‘를 설명한다.

이 때문에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삶은 ‘기억’을 의미하고, 죽은 이의 기억이 아닌 남은 이의 기억만이 그의 삶을 설명한다는 사실을 인식시킨다.

두 사람이 함께 공유했던 기쁨과 슬픔, 아픔만이 그 삶을 지속시킨다는 사실은 가르침을 남긴다. 내가 떠난 자리에 남겨지게 될 흔적, 나를 두고 추억하게 될 사람들의 기억과 마음, 그러한 것들의 소중함을 깨달을 때 삶은 전혀 다르게 읽힌다. 삶은, 즉 존재는 ‘의미’로 귀결된다.

연극 '애도하는 사람' 공연 장면. 자신이 남편 코우즈미 사쿠야의 살해범임을 고백하는 유키요/사진=두산아트센터

그리고 우리는 소중한 사람들과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기쁨으로 충만한 기억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게 된다. 죽음은 그렇게 다른 이에게 교훈을, 다른 삶을 남긴다.

이 때문에 자신의 죽음을 애도해줄 사람이 단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외로운 사람들에게, 상처입고 버림받은 아픈 사람들에게 ‘애도하는 사람’의 존재는 엄청난 위로가 된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으며, 누구에게 사랑받고, 누구에게 감사를 받았는지 기억해 줄 세상의 단 한 사람, 내가 이 땅에 존재했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사람, 어쩌면 정말로 죽은 사람들은 자신을 애도해 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불멸이 되기 위해, 그의 가슴 속에 살아 숨쉬기 위해서 말이다.

원작 소설의 내밀함은 담지 못할지 모른다. 죽음을 경시하는 사회와 언론, 사람들의 무감각한 삶과 사랑·연민의 부족, 폭력이 폭력을 부르는 비극, 존재에 대한 무거운 고민과 같은 원작의 많은 문제들을 제시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연극 ‘애도하는 사람‘은 가장 핵심적인 질문을 던진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타인의 죽음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모든 존재에게 연민을 느끼며, 한없이 가벼운 존재의 무게를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기꺼이 ‘애도의 길’을 떠나는 누군가, 바로 그 ‘애도하는 사람’이 아닐까?

만약 모든 사람이 서로에게 ‘애도하는 사람’이 되어줄 수 있다면, 세상은 그제야 비로소 존재의 무게를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의 존재가 ‘위로’가 된다고 느낀다면 다른 누군가에게 ‘애도하는 사람’이 되어주면 어떨까?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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