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다룰 용기'가 아닌 '진실을 마주할 용기'...연극 '비평가'
'진실을 다룰 용기'가 아닌 '진실을 마주할 용기'...연극 '비평가'
  • 주하영
  • 승인 2018.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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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후안 마요르가(Juan Mayorga)의 연극 '비평가 : 내가 노래할 줄 알면 나를 구원할 텐데'
연극 '비평가' 콘셉트 컷. 극작가 스카르파(왼쪽, 김신록)와 비평가 볼로디아(오른쪽, 백현주)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예술에 있어 비평은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비평가와 예술가의 관계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인도의 ‘댄 브라운’이라 불리는 베스트셀러 작가 애쉬윈 상이는 “비평가와 작가의 관계는 비둘기와 조각상, 혹은 개와 가로등의 관계와 같다”고 말한다.

영국의 극작가 아놀드 웨스커는 입센의 ‘인형의 집‘이 초연되었을 당시 혹평을 쏟아냈던 비평가들을 언급하며 “비평가들의 이론은 항상 극작가들에 비해 10년 정도 뒤처지기 마련”이라고 말한다.

반면 ‘뉴요커‘의 기고가이자 작가인 다니엘 멘델존은 비평 역시 다른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재능이 필요한 장르”이며, 모든 비평은 지식과 취향이 반영된 “의미 있는 판단”이라고 말한다.

그는 비평가의 중요한 기능은 “분석하고픈 충동, 설명하고 가르치며 의미 있는 것들을 찾아내고 판단하고픈 충동”에 있으며, 무엇보다 “작품과 관객 혹은 독자 사이에서 지적이고 분석적이며 통찰력 있는 고민”을 함으로써 그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의미’를 전달하는 사람이라고 강조한다.

 연극 '비평가' 공연 장면. 스카르파(왼쪽, 김신록)는 볼로디아(오른쪽, 백현주)에게 평론을 직접 쓰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요청한다./사진=K아트플래닛

최근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는 스페인 출신의 극작가 후안 마요르가의 2012년 연극 ‘비평가‘가 공연됐다. 

마요르가는 1997년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에 대한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극작가로 그의 작품에는 벤야민의 예술에 대한 철학이 상당부분 반영되어 있다.

독문학자 문광훈은 ‘가면들의 병기창‘에서 “벤야민의 사유공간은 세상과 대결하기 위해 예술이라는 무기를 벼리는 곳이고, 예술의 저항적 가능성을 탐색하는 병기창”이라 설명한다.

그는 벤야민의 사유에 따르면 “예술은 현실의 가면을 드러내는 인간의 가면”임과 동시에 “현실을 가면의 껍질로 드러내는 반성적 무기”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예술의 폭로와 저항적 성격은 마요르가 역시 동의하고 있는 부분으로 보인다. 그는 해외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예술가의 기본 자질은 다른 사람들이 외면하는 것을 바라보는 용기를 갖추는 것”이며, “연극은 갈등이 일어나게 할 재료를 던져 주어 관객들의 마음에 문제를 일으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연극 '비평가' 포스터 컷.  스카르파(왼쪽, 김신록)와 볼로디아(오른쪽, 백현주). '내가 노래할 줄 알면 나를 구원할 텐데'는 극중 '여인'의 대사임과 동시에 극의 '부제'이기도 하다./사진=K아트플래닛

연극 ‘비평가‘의 구성과 사유는 복잡하지만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극작가 스카르파는 자신의 새 작품이 15분 동안 끊이지 않는 관객들의 박수 세례를 받으며 화려하게 성공한 날 밤, 10년 전 자신의 데뷔작을 혹독하게 비평했던 비평가 볼로디아의 집을 찾아온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불편해 보이는 표정으로 평론을 쓰려던 볼로디아는 갑자기 불쑥 자신의 집에 나타나 평론을 쓰는 모습을 지켜보겠다는 스카르파의 요구에 황당해한다.

볼로디아는 공연이 있는 날이면 매일 밤 12시에 편집실에서 전화가 와 평론을 불러달라고 하니 다음 날 신문으로 받아보라고 말하지만 스카르파는 막무가내이다.

결국 볼로디아는 작품에 대한 평론을 써서 보여주고, 평론에 분개한 스카르파는 이를 반박하기 위해 자신의 작품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다.

그의 연극은 2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막은 타우베스라는 권투사범과 에릭이라는 권투선수의 훈련과정에서 드러나는 갈등과 욕망을 다루고 있고, 2막은 에릭과 우연히 만나게 된 타우베스의 아내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연극 '비평가' 공연 장면. 평론은 다음날 아침 신문을 통해 볼 것을 권하며 나가줄 것을 요청하는 볼로디아(오른쪽, 백현주)/사진=K아트플래닛

연극 ‘비평가‘의 흥미로운 점은 관객들이 실제로 극작가 스카르파의 연극을 본 적이 없음에도 스카르파가 자신의 극을 볼로디아에게 설명하는 과정에서 읽어 내려가는 대사들과 그가 볼로디아를 대역으로 연기하며 펼쳐 보이는 장면들로 인해 대부분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다.

또한, 극중극의 형태로 전달되는 희곡이 어떻게 연기되고 연출되어야 하는지를 스카르파의 입을 통해 듣게 됨으로써 관객들이 연극의 장면을 직접 머릿속에 그리게 되기 때문에 연극이 연극에 대해 이야기하는 메타적 속성을 지님과 동시에 관객들로 하여금 타우베스와 에릭의 관계를 볼로디아와 스카르파의 관계에 자연스럽게 대입하도록 만드는 탁월함을 발휘한다.

권투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타우베스는 어느 날 권투 선수가 되겠다며 찾아온 에릭의 숨겨진 자질을 한 눈에 꿰뚫어본다.

2년이란 세월이 지난 후 경기에서 승리를 거둔 에릭은 자신이 선수 자격증을 딸 준비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타우베스는 경기 중 5회전까지는 자신의 가르침을 따랐지만 6회전부터 관중을 의식하며 그들의 소리를 듣기 시작한 에릭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질타한다.

아직 패배의 쓴 맛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는 타우베스에게 에릭은 충분히 준비가 되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전 질 생각이 없어요!”

결국 두 사람은 자신의 말을 증명하기 위해 권투시합을 펼친다. 스카르파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강펀치를 날리는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권투시합 중계에 귀를 기울이듯 관객들을 집중하도록 만든다.

아무리 애를 써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 나이 든 사범과 승리에 대한 확신으로 에너지가 넘치는 젊은 선수... 링에서 펼쳐지는 구타와 고통, 흐르는 피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관객이 원하면 진짜가 된다”는 스카르파의 말처럼 모든 장면이 상상 속에 ‘진짜’가 된다.

관객들은 에릭이 찢어놓은 타우베스의 한 쪽 눈썹에서 피가 솟구치는 것을 본 듯 느끼며, 펀치를 맞을 때마다 커지는 자신을 향한 ‘분노’ 만큼이나 제자를 향한 ‘자부심’ 또한 커져가는 타우베스의 알 수 없는 마음을 이해한다.

또한 의기양양하게 더 큰 승리를 하겠다고 눈을 번쩍이며 강펀치를 날리던 에릭이 갑작스러운 타우베스의 펀치 한방에 나가떨어질 때 그가 느꼈을 충격과 절망 역시 느낄 수 있게 된다.

 연극 '비평가' 공연 장면. 자신의 극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스카르파(김신록, 뒤쪽)와 말없이 듣고 있는 볼로디아(백현주, 앞쪽)/사진=K아트플래닛

두 사람의 경기장면은 볼로디아와 스카르파의 연극을 둘러싼 ‘시합’의 양상과 같다. 연극 작품을 놓고 벌이는 두 사람의 ‘보이지 않는 경기’는 타우베스와 에릭의 권투시합만큼이나 강렬하고 치열하다.

10년 전 볼로디아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성공을 거둔 스카르파는 자신이 단순히 돈이나 명예를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더 진지한 것을 추구한다는 점을 예리하게 꼬집어 본 그의 평론에 집착한다.

그는 자신의 작품 뿐 아니라 다른 작품에 대한 볼로디아의 평론조차 모두 찾아 읽으며 그 안에 숨겨진 메시지를 읽어내고 자신을 단련한다.

반면에 “그 어떤 의도도 가지지 않은 진공상태”에서 연극에 대한 순수한 철학만을 가지고 정직한 방식으로 진실만을 말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볼로디아는 자신이 10년 전 스카르파에게서 “다듬어지지 않은 무언가”를 발견했음을 인정한다.

그는 유독 가혹하게 혹평함으로써 스카르파의 재능을 가늠하고 시험해왔으며 나름의 방식대로 자신의 평론에 귀를 기울이는 그를 위해 가르침을 전달해왔다고 생각한다.

스카르파를 통해 세상의 ‘가면’을 벗기고 ‘진실’을 설파해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연극을 완성하는 ‘꿈’을 꾸었다는 볼로디아는 오늘 밤 자신이 완전히 실패했음을 깨달았다며 진실 대신 관객들의 흥미에 맞춘 ‘성공’을 택한 스카르파를 비난한다.

“작은 인간들이 작은 신들을 섬기는 신전”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볼로디아에게 스카르파는 이렇게 외친다.

“그 오랜 세월동안 연극은 절대 그 누구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그걸 만드는 사람들조차 변화시키지 못했어요. 용맹함을 연기하는 배우들은 실제 삶에서는 완벽한 겁쟁이들이고, 무대에서 자유를 외치는 연출들은 실제 삶에서는 끔찍한 폭군이예요. ... 연극은 절대 그 누구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바뀌었나요? 스승님!”

 연극 '비평가' 공연 장면/사진=K아트플래닛

사실상 연극 ‘비평가‘의 모든 질문은 이것으로 수렴된다. 거짓과 진실, 허상과 현실, 거짓된 삶과 진실된 삶,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우리 자신... 스카르파의 연극이 2막으로 구성되었듯 연극 ‘비평가‘ 역시 두 갈래의 주제를 부각시킨다.

극은 단순히 극작가와 비평가의 자존심 대결이나 서로를 향한 엇갈린 바램, 철학의 대립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타인의 삶을 규정하고 평가하며 자신의 가치를 강요하는 사회 속에 얽매인 개인의 속박된 ‘삶’, 그리고 자신이 예상치 못한 진실과 마주했을 때 두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볼 수 있는 ‘용기’의 문제를 지적한다.

볼로디아는 2막에 등장한 여성인물의 ‘언어’와 인물의 ‘거짓됨’을 혹평한다. 그는 스카르파가 여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여성의 언어’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며, 주체가 다른 주체의 깊은 속에 닿을 수 있는 경지의 사랑을 나누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관객들의 ‘감정’만을 자극하고 ‘감성’을 담지 못하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극은 볼로디아가 그토록 거짓이며 환상이라 주장하는 그 여인이 다름 아닌 실제 그의 ‘아내’의 이야기를 그대로 담은 인물임이 밝혀질 때 정점에 이른다.

 연극 '비평가' 공연 장면. 스카르파(오른쪽, 김신록)가 자신의 극 2막에 등장한 '여인'을 연기하며 맨발로 그녀의 대사를 읊고 있다. 여성인물의 '거짓됨'을 주장하는 볼로디아(왼쪽, 백현주)는 뒤돌아 서 있다./사진=K아트플래닛

‘여인’의 존재는 이 극의 핵심이다. 관객들은 여인의 모습을 실제로 볼 수 없으며 그 ‘여인‘을 설명하는 스카르파의 언어와 연기를 통해서만 그녀를 그려낼 수 있다.

무대 위에 ‘여인‘은 부재한다. 사랑하는 남자 곁에서 매일 밤 잠들지 못한 채 맨발로 지붕 위에 올라가 다른 여인들을 만나는 여인...

그들 안에서 현실에서 부여받은 모든 옷을 벗어던진 채 그 누구의 잣대로도 구속되지 않고 머물다 동이 틀 무렵이면 다시 남자 곁으로 돌아와 자신의 두 발을 감추고 미소를 띠어야 하는 ‘여인’의 이야기는 환상인지 현실인지조차 판단하기 어려울 만큼 모호하지만 상징적이다.

자신이 언젠가는 추락할지 모르며 노래하는 여자들만이 결국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여인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노래할 줄 알면 나를 구원할 텐데!”

왜 ‘노래’일까? 노래는 우리의 생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하지만 노래는 때로 삶을 기쁘게, 슬프게, 아름답게 몰고 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사람들은 노래로 하나가 되고, 전혀 모르는 누군가에게 위로를 전달하며, 눈물을 흘리고, 숨겨진 감정을 깨닫는다.

노래는 지극히 감정적인 영역이며, 자유로운 영역이고, 서로가 귀 기울이고 함께 느낄 수 있는 공감의 영역이다. 이 때문에 노래는 자유와 감성이며 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재능이자 기회이다.

하지만 ‘여인’은 자신의 남자에게 어떻게 노래를 전달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그녀가 아직 완전한 자신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며, 자신의 진실을 제대로 담아낼 수 있는 노래를, 자신을 있는 그대로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극 '비평가' 공연 장면/사진=K아트플래닛

그런 ‘진실’을 보지 못하는 볼로디아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다고 말하던 여인의 ‘허상’만을 붙든 채 그녀의 ‘노래’를 듣지 못한다.

어쩌면 그녀가 노래할 수 없어서가 아닌지도 모른다. 눈앞에 진실을 두고도 ‘거짓’이라 외치는 그가 끊임없이 진실을 보지 않고 고개를 돌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가 작은 소리에도 귀 기울일 수 있는 감수성과 예민함, 타인을 돌보는 배려와 관대함, 그리고 진실을 마주할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는 그녀 뿐 아니라 자신을 구원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2017년에 초연된 후 올해 재공연을 선보인 연극 ‘비평가‘의 가장 독특한 점은 이 복잡한 구성의 메타드라마를 두 여성배우가 연기한다는 사실이다.

볼로디아와 스카르파, 타우베스와 에릭 모두 남성 인물인 가운데 유일하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여성 인물의 ‘존재’와 ‘목소리’를 관객들이 느끼도록 만들기 위해 이영석 연출은 “여성배우의 남성 캐릭터 연기”를 선택했다.

상대적으로 배재되어왔던 여성의 목소리를 전면에 배치하겠다는 연출의 의도는 적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언어는 하나의 몸을 가지고, 몸은 하나의 언어를 가진다”는 벤야민의 진술처럼 여성배우의 몸은 ‘하나의 언어’를 가지고 그들이 연기하는 남성 인물과 그 인물이 연기하는 여성 인물 사이의 ‘행간’을 읽어낸다.

여성 인물을 그려내는 남성 작가의 시선과 평가는 관객들의 눈에 보이는 여성 배우의 모습과 그 배우가 실제 여성으로서 인지하고 있는 여성 인물이 느꼈을 억압과 잣대, 정체성을 찾을 수 없는 고통과 혼란, 두려움과 공포, 슬픔과 절망과 같은 감정들을 은연중에 드러내게 되기 때문에 언어로만은 전달될 수 없는 그 무언가, 연기와 실제 사이에 작용하는 그 무언가를 작동하도록 만든다.

연극 '비평가' 무대/사진=K아트플래닛

경험하지 않은 것들은 마음으로 느낄 수가 없다.

실제 그 깊이까지 가보지 않고서는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연극은 그러한 세상을, 삶을 가늠해보도록 만든다.

동시에 그 속에서 펼쳐지는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에 나를 빗대고, 내 삶을 빗대어 때로는 위로를, 치유를, 안식을 얻도록 만든다.

아직 겪지 않은 사람에게는 언젠가는 앓게 될 홍역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이미 겪은 이에게는 자신과 같은 길을 지나온 사람이 있다는 위로를 전달하기 위해 연극은 필요하다.

물론 영국의 극작가 에드워드 본드의 말처럼 “연극이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 아니라 세상을 고칠 수 있는 스패너를 손에 쥐어주는 것”이면 더욱 좋겠지만 연극이 그러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어쩌면 극작가의 ‘진실을 다룰 용기’가 아니라 관객들의 ‘진실을 직면할 용기’일지도 모른다.

거울을 들이대는 일은 연극이 할 수 있지만 그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수정하는 일은 결국 관객들 ‘자신’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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