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으로서 '옳은 선택'이란 어떻게 결정되는가?...연극 '피와 씨앗'
인간으로서 '옳은 선택'이란 어떻게 결정되는가?...연극 '피와 씨앗'
  • 주하영
  • 승인 2018.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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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박사의 공연으로 보는 세상풍경] 롭 드러먼드(Rob Drummond)의 연극 'Grain in the Blood'
 연극 '피와 씨앗' 콘셉트 컷. 사진=두산아트센터
 연극 '피와 씨앗' 콘셉트 컷. 어텀(가운데), 소피아(왼쪽), 아이작(오른쪽)/사진=두산아트센터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인류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인간이 ‘선’이라고 믿는 것과 ‘악’이라고 믿는 것의 구분이 항상 일치했던 것은 아니었다.

인류는 문화마다 각기 다른 가치와 다른 삶의 방식을 ‘옳은 것’으로 주장했고, 그로 인한 갈등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는 전쟁의 원인이 되곤 했다. 인간은 늘 예상치 못한 ‘행동’을 통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은 자신이 믿는 바를 위해 상상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다른 누군가나 인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치기도 한다.

무엇이 인간을 ‘행동’하도록 만드는 것일까? 우리는 명확한 정의를 갖지도 못한 채 ‘인간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말을 내뱉는다. 대체 ‘인간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란 무엇을 기준으로 어떻게 규정되는 것일까?

 연극 '피와 씨앗' 콘셉트 컷/사진=두산아트센터

최근 두산아트센터 Space111에서는 2010년부터 2016년까지 ‘미스터 라이트 Mr. Write‘, ‘퀴즈 쇼 Quiz Show‘, ‘언캐니 밸리 Uncanny Valley‘와 같은 작품들로 세 번에 걸쳐 스코틀랜드 연극 비평가 대상을 수상한 영국 극작가 롭 드러먼드의 2016년 작품 ‘피와 씨앗(Grain in the Blood)‘의 막이 내렸다.

극작가이자 배우, 연출가로서 이미 영국 관객들에게 무대마다 놀라움을 안겨주며 ‘생각해 봐야 할 문제들’을 던지는 작가로 인식되고 있는 드러먼드는 트래버스 극장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지금 알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 있다. 때로는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 걱정스럽다. 평생 애를 써도 결국 다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명확하게 정의내릴 수 없는 애매한 영역들‘에 관심이 있다는 드러먼드는 자신조차 확신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극이 관객들에게 같은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훨씬 흥미롭고 극적이라고 말한다.

이 때문에 그의 극들은 플롯이 명확하지 않게 제시되는 경우가 많고, 관객들은 플롯과 인과관계를 맞추어 나가는 과정에서 많은 질문들을 스스로 생산하고 답을 찾으려 고민하게 된다.

그는 말한다. “사실 우리는 모두 인간으로서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애쓰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한 과정을 연극을 통해 하면 안 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12년 전 어느 날 밤, 위대한 희생의 외침 속에서 한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즉 어텀(Autumn)이라 불리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사람들은 해마다 추수기의 달이 뜰 때면 ‘밀알의 여신’께 바치는 ‘밀짚 인형’이라는 ‘희생제의’를 통해 건강과 행복을 기원했다.

거친 자연 속에서 밀농사를 통해 마을 사람들의 삶이 유지되는 공동체에서 ‘풍요’를 약속하는 민간의식이 생겨나고 그 주술적 힘을 믿는 기도문이 생겨난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부모로부터 정확한 의미도 모르는 기도문을 배웠고, 제의적 의식은 그 속에 담겨있는 폭력적 의미를 간과한 채 오랜 세월 해마다 반복되며 이어졌다.

공동체의 번영과 행복, 건강을 위해 살아있는 어린 여자아이의 피를 흘리게 해 그 피를 추수기 때 마지막 남은 밀로 만든 밀짚 인형의 배에 집어넣는 고대의 ‘희생제의’는 세대를 거치며 동물의 피로 바뀌었고, 어느 순간 “윤리적 진보”라는 이름하에 피를 상징하는 ‘잼(jam)’으로 변하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두려운 일이 생길 때면 밀알의 여신에게 바치는 기도문을 수없이 반복해서 외쳤던 섬머(Summer)는 아이작(Isaac)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임신하게 되자 다가오는 추수기에 태어날 아기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기 위해 고대의 ‘희생제의’를 실제로 실행한다.

살짝 손목을 그으려던 계획은 어긋나고 피를 흘리며 소리를 지르는 섬머를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패닉에 빠진 아이작은 그만 섬머를 향해 칼을 휘두르고 만다. 그날 밤, 어리고 무지한 부모에게 잉태된 씨앗 ‘어텀’은 비극 속에서도 피로 얼룩진 세상으로 ‘탄생’의 발을 내딛는다.

 연극 '피와 씨앗' 공연 장면./사진=두산아트센터<br>
 연극 '피와 씨앗'에서 어텀의 생일파티 장면/사진=두산아트센터

프랑스의 문학 평론가 르네 지라르는 고대의 신화와 제의의 분석을 통해 초기 인류가 일탈을 이끌어내는 ‘희생양’에게 폭력을 가함으로써 공동체 내부의 갈등을 제어하는 법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초석적 폭력’에 ‘성스러움’이란 옷을 입혀 ‘희생제의’라는 형식을 만들어냈음을 주장했다.

그는 “제의는 공동체 내부에 질서를 회복시킨 최초의 자연발생적인 사형의 되풀이”라 할 수 있으며, 희생물의 죽음이 공동체의 모든 불행을 안고 떠남으로써 공동체가 ‘정화’되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에서 폭력의 피해를 간과하고 치유책에 보다 중점을 둔 “종교적 예방책”으로 변모했음을 강조했다.

원시 사회부터 인간은 규율과 법칙, 보상과 처벌을 통한 통제와 믿음을 기반으로 한 종교 체제 안에서 인간의 규범과 가치를 결정하고 정당화했다.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의 말처럼, “종교를 창조한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고, 종교를 규정하는 것은 신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사회적 기능”이었던 것이다.

연극 ‘피와 씨앗‘은 이러한 종교와 사회, 제의와 믿음, 폭력과 윤리와 같은 문제들을 비극 속에서 탄생한 아이 어텀이 12년이 지나 마지막으로 생물학적 아버지인 아이작으로부터 ‘신장 이식’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고 벌이는 논쟁을 통해 구체화해 나간다.

12년 동안 수감생활을 해 온 아이작은 어머니 소피아(Sophia)의 요청으로 딸 어텀을 만나기 위해 집에 도착한다. 아이작은 단 한 번도 딸 어텀에 관한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 바이올렛(Violet)은 엄마와 아빠를 모두 잃은 어텀의 곁을 떠날 수 없기에 여동생을 죽인 살인범의 방에 기거하며 그의 어머니인 소피아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태어날 아기의 ‘건강’을 기원하던 ‘희생제의’의 무모함과 어리석음을 비난하기라도 하듯 어텀은 열 살이 되던 해부터 앓기 시작했다.

이모처럼 농부가 되고 싶었던 어텀은 처음엔 살고 싶어서, 아직은 삶을 끝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에, 할머니와 이모, 자기 자신을 위해 병과 싸우기로 마음먹었다. 두 번의 이식 수술과 거부반응으로 인해 이제는 고통으로 잠조차 이룰 수 없게 된 어텀 앞에 자신을 구원해줄지 모른다는 한 남자가 나타났다.

 연극 '피와 씨앗' 공연 장면. 자신의 딸과 처음 마주한 아이작(오른쪽)과 이를 지켜보는 보호감찰관 버트(왼쪽)/사진=두산아트센터

어텀은 직감한다. 그 남자가 자신이 다섯 살 되던 해부터 그토록 궁금해 하던 ‘아버지’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보호관찰관 버트(Burt)가 아이작을 데리고 소피아의 집에 도착한 날부터 어텀의 생일이자 추수기의 달이 뜨는 날까지 3일 동안 그들은 애써 묻어두었던 과거의 고통과 분노, 원망에 노출될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의무와 책임, 이해, 그리고 삶에 대한 ‘질문’과 ‘선택’의 순간에 놓이게 된다.

소피아는 온통 어텀을 살려야한다는 생각뿐이다. 그녀는 12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아들이 마주하게 될 트라우마나 생전 처음 딸을 만나게 되는 낯선 느낌 따위를 배려할 여유가 없다. 그녀는 오직 아버지로서 자식이 필요로 하는 ‘신장’을 제공해야 할 아이작의 ‘의무’를 강조한다.

그런 어머니를 향해 아이작은 말한다. “난 살려준다고 말한 적 없어요. 와서 만나본 다음 결정하겠다고 했지.”

집으로 돌아온 첫날 밤 환각에 사로잡혀 부엌에서 칼을 손에 든 채 기도문을 외치던 아이작은 버트에 의해 제지당한다. 버트는 말한다. “과거가 끔찍하다고 해서 미래도 그럴 필요는 없어!”

자신이 사랑했던 섬머와 똑같이 닮은 어텀과 마주한 아이작은 그동안 두려움 속에 외면해왔던 과거와 현재를 직시한다. 그는 자신이 잃어버린 삶이 무엇인지, 자신이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인식하기 시작한다.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라고 말하는 아이작은 이전의 ‘사랑하고 사랑받던 삶’을 되찾기 위해 어텀에게 신장을 이식하겠다고 말한다.

바이올렛은 여동생을 죽음에 이르게 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삶 또한 송두리째 망쳐버린 아이작을 향해 들끓는 ‘분노’를 가라앉힐 수가 없다. 오로지 어텀을 살리기 위해 아이작의 신장이 필요하다는 사실만이 그녀로 하여금 고통과 분노를 통제하도록 만든다.

 연극 '피와 씨앗' 공연 장면. 자신의 딸에게 신장이식을 하겠다는 결정을 빨리 내리지 못하는 아들을 향해 다그치는 소피아/사진=두산아트센터

하지만 어텀의 생일날, 아이작에게 다가간 어텀이 무언가를 귓속말로 속삭이고 난 후부터 아이작이 갑자기 딴소리를 하기 시작한다.

“엄마는 왜 나를 보러 오지 않았어요? 날 수치스러워했어. 날 위해 싸우지도 않았고. 그래서 내가 어텀에게 갈 수 없었던 거야. 모든 걸 가르쳐 준 건 엄마였잖아요. 엄마가 내 모든 걸 빼앗아 갔어. 이제 내가 엄마의 전부를 가져갈 거예요. 전부를 잃는다는 게 어떤 건지 한 번 느껴 봐요!”

이식을 하지 않겠다는 아이작을 향해 총을 겨눈 바이올렛이 외친다. “네가 옳은 선택을 하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할지 말했지?”

소피아는 결국 아들에게 마취제를 주사한다. 저녁식사를 하던 식탁 위에 의식을 잃어가는 아들을 눕히고 옷을 벗기며 아들의 배를 가르려는 소피아는 자신을 저지하는 버트를 향해 외친다.

“만일 버튼 하나로 당신이 구하지 못했던 죄수의 생명을 몇 년 줄이고, 살해당한 그 사람 딸을 다시 살아 돌아오게 할 수 있다면 그 버튼을 누를 건가요? 내가 어떻게 그 버튼을 안 누를 수가 있겠어요?”

의식을 잃어가는 아이작을 두고 수술을 감행하려는 소피아, 옳지 않은 방법이라면서 막아서는 버트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바이올렛, 그 혼란을 뒤로하고 ‘마지막 밤’을 보내는 어텀은 ‘밀알의 여신’에게 바치는 자신이 새롭게 고친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한다.

 연극 '피와 씨앗' 공연 장면. '밀알의 여신'에게 바치는 기도문을 외우는 어텀/사진=두산아트센터

그녀는 세상의 삶과 죽음이 인간의 의지대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른들의 무지함을 슬퍼한다. 세상에 ‘마법’과 같은 일은 없음에도 누군가가 지어낸 어리석은 이야기들을 ‘희망’으로 믿으며 비극을 만들고, 고통을 만들고, 서로를 미워하고 밀쳐내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자연 속에 발생하는 많은 일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그렇게 일어나고 때로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른들이 또 다시 어리석은 일을 벌이지 않기만을 바라는 어텀은 말한다.

“나는 내 가장 어두운 비밀을 차마 말할 수 없었어. 모두들 너무 희망에 차 있어서. 그래서 나는 대신 아버지에게만 말했어... ‘나는 더 이상 고쳐지길 원하지 않아. 나는 지쳤고 이제는 끝내기를 원해.’ 아버지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달았어. 그가 대신 그들의 마음을 무너뜨려야 했지. 어텀이 할 수는 없을 테니까. 아버지는 자신이 ‘희생양’이 되어야 했음을 이해했던 거야.”

삶, 선택, 의무와 책임, 고통과 분노, 그리고 그 모든 것 사이에서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향해 무조건 직진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일까?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도 삶은 소중한 것이니까 가족을 위해, 생명을 위해 모든 것을 인내해야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아들이 겪어 온 아픔이나 고통은 외면한 채 오로지 어린 손녀딸의 생명을 구할 가능성을 놓칠 수 없기에 아들의 신체 장기만을 탐하더라도 생명을 살리는 선택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아니면 어떤 선택이든 자신의 삶 속에서 주체적으로 행해져야 하고 그에 대한 책임 또한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므로 바이올렛이 총을 발사할 것을 알면서도 소피아를 막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 버트가 옳은 것일까? 이 모든 일에 과연 ‘정답’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드러먼드는 ‘피와 씨앗‘을 통해 관객들에게 묻는다.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움직여 온 인간들, 여전히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들... 하지만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들은 정말로 어떤 기준에 의해 정의된 것일까? 인간다운 행동, 인간다운 가치, 인간으로서의 의무란 도대체 어떤 기준에 의해 탄생하는 것일까?’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한국외국어대, 단국대, 가천대, 상지대 등의 대학교에 출강해오면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객원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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