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문화비평가와 출판전문가들의 커뮤니티인 '비평연대'에서는 숏폼 콘텐츠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500자 내외의 '매우 짧은 연대 서평'의 형식을 고안했습니다. 2030세대 지식인 특유의 빛나는 감각으로 제시되는 다양한 책들을 통해 지식의 최전선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편집자주]
■ 오만한 자들의 황야(하지은 지음, 황금가지, 2023)
서부, 황야를 말하면 총과 결투를 빼놓을 수 없다. 인물들은 틈만 나면 결투하고, 총을 쏜다. 싸움은 멈추지 않고 사람은 죽는다. 하지만 저마다 총을 쏘는 이유가 다르다. 누구는 복수를 위해, 누구는 지키기 위해, 누구는 사랑을 위해. 무기를 맞대고 싸우는 것은 곧 본인의 이야기와 신념이 부딪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무법자의 도시 그라노스에는 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원한과 상처를 품고 복수만을 목적으로 살아간다. 복수의 끝에 남는 게 무엇인지, 그건 중요하지 않다는 듯 움직인다. 결국 복수는 복수를 낳고, 폭력 뒤엔 폭력이 이어진다. 강한 힘과 강한 무기는 그 무엇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 증오가 반복된다. 하지만 이런 세상에서도 주인공 라신은 용서를 이야기한다. 폭력을 대화 수단으로 삼는 세상에서 용서와 자비 또한 대화 방법이 될 수 있을까?
증오의 연쇄를 끊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이해일 것이다. 서로를 이해하면 용서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다면 자비를 베풀 수 있다. 폭력은 사람을 오만하게 만들 뿐, 근본적인 해결을 선물하지 않는다. 오만함에 빠진 사람은 본인에게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하나의 목적에 목을 매달기 마련이다. 작가는 주인공을 통해 폭력이 가득한 세계 속에서 이해를 끌어낸다. 용서와 자비가 폭력을 끊는 방법이라고 이야기한다. 폭력이 멈추지 않는 세상에 사는 우리 역시 그렇게 느낄 수 있을까? 주인공 라신과 오만한 자들의 이야기 속에서 용서와 자비를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황수현 / 칼럼니스트·비평연대)
■ 다섯 발자국 숲 : 황금곰팡이(이승연 지음, 국립현대미술관, 2024)
하늘을 가릴 만큼 커다란 나무들이 가득 찬 숲길을 걸어본 적 있는가? 침엽수가 높게 뻗은 숲길에서 우리의 세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공간을 느껴본 적이 있다. 상쾌하면서도 축축한, 고요하면서도 온갖 소리가 들리는, 양자가 공존하는 특별한 세계 말이다.
굳이 커다란 숲이 아니더라도, 휴가철을 맞아 산과 계곡, 해변에 가면 우리는 나무만 바라본다. 그러나 진실로 숲을 만들고 분해하고 생명을 내리는 밑바닥의 이끼와 곰팡이(버섯 등)는 호기심이 많은 아이가 아니라면 지나치고 만다.
작가 개인의 경험과 감상에서 시작한 곰팡이의 숲은 참으로 놀라움의 연속이다.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숲의 이면, 실제로 숲을 이루는 가장 근본적인 생물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래서 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는 우리에게 작가가 그려낸 이면의 숲은 독특한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아마도 그 ‘무언가’는 일단(一端)의 삼각형 위에 서있는, 불안정하지만 계속 이어지는 우리의 세계이다. 우리가 듣고 보지 못하는, 그래서 놓치고 있는 거대한 순환을 작가는 세밀한 판화로 구현했다. 식견이 짧아 작가의 시선을 그대로 따라가진 못하지만, 적어도 판화 속에서 사각사각 자라나는 ‘황금곰팡이’의 움직임이 조금 보일 뿐이다.(윤인혁 / 문화예술평론가·문화기획자·비평연대)
■ 멸종 위기의 사고(에릭 샤댕 지음, 헤이북스, 2026)
생성형 AI가 일상이 된 시대에 '멸종 위기의 사고'는 조금은 불편한 이야기를 꺼낸다. AI가 얼마나 편리한지보다, 그 편리함 속에서 인간의 사고는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먼저 돌아보게 만든다.
책은 AI를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판단과 사회의 구조까지 영향을 미치는 존재로 바라보며, 기술의 장점과 단점만을 따지는 논의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AI가 만들어내는 경제적 구조와 그 안에 담긴 세계관, 그리고 앞으로 인간이 맡게 될 역할까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알고리즘이 만들어내는 '필터 버블'은 우리가 다양한 관점을 접하기보다 익숙한 정보만 반복해서 소비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책 전반의 시각은 AI에 대해 다소 비판적이지만, 그렇다고 기술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는 의미로 읽히지는 않았다. 오히려 AI를 맹목적으로 신뢰하거나 무조건 거부하기보다,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 기술인지 이해하고 스스로 판단하며 활용하는 태도가 더욱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AI 시대에 필요한 것은 새로운 기술을 빠르게 익히는 능력만이 아니라, 그 기술 앞에서도 자신의 사고를 잃지 않는 힘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책이다.(강민지 / 문화평론가·프롬레코드대표·비평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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