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문화비평가와 출판전문가들의 커뮤니티인 '비평연대'에서는 숏폼 콘텐츠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500자 내외의 '매우 짧은 연대 서평'의 형식을 고안했습니다. 2030세대 지식인 특유의 빛나는 감각으로 제시되는 다양한 책들을 통해 지식의 최전선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편집자주]
■ 인간 지성에 관한 탐구(데이비드 흄 지음, 김병재 옮김, 아카넷, 2026)
친구가 이 책이 갑자기 팔린다고 해서 읽어보았다. 솔직히 말하면, 애초에 의도적인 오독을 염두에 두고 펼친 책이다. 출판사의 보도자료는 이 책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우리는 왜 내일도 해가 뜰 것이라고 생각할까? 오늘날 우리는 천문학적 지식을 통해 이유를 설명한다. 하지만 이런 지식이 없던 시절에도 인류는 내일에도 또 해가 뜰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안다고 말하는 것일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안다고 말하는 것일까?" 내 마음을 끈 것은 이 질문이었다. 미신처럼 들리겠지만, 태양이 뜨는 자연 법칙이 아니더라도 인생에는 기어코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한 사람의 절대적인 삶 속에서도 마치 내일 해가 뜨는 것만큼이나 필연적인 사건이 존재하지 않을까. 흄은 이를 '필연'이 아니라 단순한 '습관'이라고 일축한다(아니, 이런 삶의 확신 같은 건 습관도 아니고, 흄에겐 그냥 미신일 것 같다). 하지만 철학 책에서 이런 건조한 결론을 마주할 때면 늘 이런 의문이 뒤따른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현실의 인간을 어떤 길로 가게 하는가.'
그래도 이런 책은 저자의 결론을 정답으로 수용하기보다, 나만의 질문을 던지며 오독해 나가는 과정 자체에 의미가 있다. 모든 것이 그저 습관일 뿐이라는 철학자의 냉정한 논리를 마주하다 보면, 역설적으로 내 삶에서만큼은 필연이라고 믿고 싶은 것들이 무엇인지 스스로 되묻게 되기 때문이다.(아마 모든 철학 책을 대부분 이런 식으로 잘못 읽은 것 같다)(맹준혁 / 출판편집자·콘텐츠기획자)
■ 여름의 사실(전욱진 지음, 창비, 2022)
7월은 여름의 온 얼굴을 다 가진 계절이다. 관념적인 여름의 풍경은 환한 한낮이지만 7월은 여름의 상상을 배반하며 무시로 표정을 바꾼다. 긴 비를 예고하는 눅눅한 구름도 드문드문 고인 뜨듯한 웅덩이도 다 여름의 얼굴이다. 그러니 겉싸개에는 먹구름을, 표지에는 개구리울음 들릴 듯 어둑한 밤의 호수를 그린 이 시집이야말로 '여름의 사실'일 것이다.
시집과 동명인 표제작 '여름의 사실'의 화자는 초여름에서 한여름으로 건너오는 사이 '나를 두고 그대라고 부르는 사람을 / 나 또한 그대라고' 부른다. '너'도 아니고 '당신'도 아니고 그대. 누군가를 지칭하는 낱말 중에 '그대'만큼 축축한 습기를 머금은 단어가 있을까. 표제작으로 대표되는 이 시집에는 곁에 있어도 보고 싶은 진득한 그리움이 책장마다 젖어 있다. 뽀송뽀송한 여름 못지않게 깨끗한 사랑도 믿지 않겠다는 듯이.
어질어질한 여름밤에는 골똘히 잠겨 분석하기보다 흐린 눈으로 다음 행으로 옮겨 가기 좋은 시집을 골라야 한다. 다 이해하지 않아도 좋은 글 뭉치를 우리는 시라고 부르기로 했으니 가장 많은 불규칙과 오독을 허락하는 7월은 아무쪼록 시의 달이다. 발맞춰 '여름의 사실'을 펼치자. 그리고 '사랑이 주인 노릇을'하는 한여름에는 정신을 차리지 말자.(유희선 / 출판마케터·비평연대)
■ 우리는 모두 잊어버리네(오카자키 교코 지음, 오고원 옮김, 고트, 2026)
오카자키 교코의 만화 '리버스 에지'를 읽었던 때가 기억난다. 당시의 감상을 떠올려 보자면 이렇다. 부푼 욕망을 터질 듯 움킨 채 파멸로 달려가는 청춘의 모습에는 언제나 화마를 닮은 맹렬함이 있다는 인상. 그런데 이 만화는 어째서인지 처음부터 끝까지 내게 지독하게 공허하다는 느낌만을 남겼다는 별난 감상. 그 경험을 간직한 채 이야기집 '우리는 모두 잊어버리네'를 읽는다.
각 장의 화자는 바로 이 순간, 이곳의 ‘나’의 이야기를 낱낱이 기록한다. 장소가 바뀌거나 무의식이 다른 무의식으로 건너뛸 때의 틈새를 이어주는 친절한 연결고리 따위는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주 현실적이고도 지극히 개인적인 ‘지금’의 이야기니까. 누구든 모종의 주제나 물체, 냄새를 마주하며 불현듯 자신만의 상념에 잠긴 적이 있을 것이다. 대화 중에도 문득 수평이 맞지 않아 무게를 싣는 대로 흔들리는 카페 테이블에 의식을 집중하거나, 깨진 유리잔을 보며 부지불식간에 과거 어느 날의 기억을 길어 올리곤 하는 것처럼.
'우리는 모두 잊어버리네'의 인물들은 대체로 폭행, 살인, 자해, 다툼과 같이 극단적이고 극렬한 사건을 통과하면서도 그 외면적 상황과 늘 조금씩은 유리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그들의 독백이 타인과의 교집합을 찾아낼 수 없는 개인의 체험을 파고드는 일에 집중되어 있기에 그렇다. 나와 네가 만나 우리가 함께 건너온 사건이 있고, 그때 서로가 아무리 유사한 정동을 느꼈다고 한들 절대로 나눠 가질 수 없는 일면의 감각에 대해. 언제인가 작가의 작품을 보며 느낀 쓸쓸함과 진공 같은 공허감은 이와 같은 인간의 원초적인 고독을 집요하게 들여다보는 데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김도경 / 출판편집자·비평연대)
■ 어느 도시의 일요일(루카 토르톨리니 글, 알레산드라 라차린 그림, 정림·하나 옮김, 그림책공작소, 2026)
'어느 도시의 일요일'은 아이들이 친구들과 함께 도시를 누비며 보내는 하루를 담은 그림책이다. 지하철을 타고, 광장을 걷고, 공원에서 뛰놀고, 박물관을 둘러보는 평범한 여정 속에서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즐거움과 호기심을 발견한다.
이 책에는 거창한 사건도 특별한 교훈도 없다. 대신 코 파는 사람을 구경하고, 기린 모양 구름을 발견하고, 갖고 싶은 장난감 앞에서 발길을 멈추는 아이들의 시선이 가득하다.
알레산드라 라차린의 회화적인 그림은 도시의 소음과 활기, 노을이 내려앉은 저녁의 정취를 아름답게 담아내며, 독자를 자연스럽게 동심의 세계로 이끈다. 특히 해 질 무렵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아이들이 하루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 번도 본 적 없는 도시’를 상상하는 마지막 장면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도시를 배경으로 하지만 결국 이 책이 이야기하는 것은 우정과 상상력, 그리고 어린 시절만이 가진 자유로운 시선이다. 바쁘게 스쳐 지나가던 도시가 사실은 수많은 이야기와 만남으로 가득한 공간임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일요일 오후의 느긋한 산책처럼, 독자 역시 책장을 넘기며 주변의 평범한 풍경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에게도 도시를 사랑하는 법을 다시 가르쳐 주는 따뜻한 그림책이다.(김미향 / 출판평론가·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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