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문화비평가와 출판전문가들의 커뮤니티인 '비평연대'에서는 숏폼 콘텐츠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500자 내외의 '매우 짧은 연대 서평'의 형식을 고안했습니다. 2030세대 지식인 특유의 빛나는 감각으로 제시되는 다양한 책들을 통해 지식의 최전선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편집자주]
■ 1939년 명성아파트 (무경 지음, 래빗홀, 2026)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나는 주로 공포나 스릴러를 찾는다. 책에서는 추리소설을 사실 가장 좋아한다. 사건의 시작과 원인, 전개를 따라가며 트릭과 퍼즐이 들어맞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좋지만, 동시에 나 스스로 그 트릭을 상상하며 맞추어 가는 재미. 추리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는 관객이 아니라 참여자가 된다. 이 소설은 그 참여의 재미를 제대로 아는 작가의 책이었다.
무대는 1939년 명성아파트. 영화 촬영으로 모처럼 활기가 돌던 건물에서 사람이 죽고, 방에는 붉은 글씨가 나타난다. 그 순간 아파트는 주거 공간에서 사건 현장으로, 이웃은 용의자로 바뀐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열두 살 입분을 이야기의 주역으로 세운 것이다. 글을 겨우 배워 가는 아이. 어른들의 세계에서 가장 낮고 보이지 않는 자리. 그런데 모두가 비밀을 숨기고 있는 아파트에서, 그 자리야말로 사람들을 바라보기에 가장 적합한 위치가 아닐까. 입분의 눈을 따라가며 나는 계속 상상하게 됐다. 이 사람은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을까. 저 사람이 범인은 아닐까. 아이의 시선이 독자를 추리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인다.
이야기의 끝에서 나는 그만 탄성을 질렀다. 그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깨닫는 순간, 같은 단어가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입분의 눈높이에서 이야기를 따라왔기에 가능한 놀라움이었다.
나는 이 무대에 오래 머물렀다. 아파트는 이상한 건축이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타인의 삶이 겹겹이 쌓여 있지만,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다. 가장 가까이 살면서 가장 모르는, 각자의 비밀을 숨긴 채 잠드는 사람들의 건물. 1939년의 아파트와 지금의 아파트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가깝다.(김재훈 / 건축·문화 비평가)
■ 미술관에서 노년을 만났습니다 (주지현 지음, 혜윰터, 2026)
노년학자 주지현의 신작 '미술관에서 노년을 만났습니다'에는 '자기방임'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다. 누군가가 나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방치함으로써 서서히 죽음으로 미끄러져 가는 상태란다. 저자에 따르면 자기방임은 주로 사회적 관계로부터 고립된 노인들에게 나타나며, 외부의 개입을 거부하는 특성 탓에 비극이 벌어진 뒤에야 세상에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현대 사회의 특성처럼 보이는 이 사회적 현상을 130여 년 전 빈센트 반 고흐가 마치 예언처럼 캔버스에 옮겨 놓았단다. 고흐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그린 '영원의 문 앞에서 At Eternity's Gate'(1890년, 81㎝×65㎝, 네덜란드 크뢸러 뮐러 미술관 소장)다. 저자는 이 그림을 이렇게 읽는다. "노인이 입은 차가운 푸른색 옷은 극한의 고독을 상징하는 듯하고, 노란색 배경은 빛으로 보이지만 노인은 그 빛을 누릴 의지조차 상실한 사람처럼 얼굴을 가린 채 웅크리고 있다." 이어서 "이 유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노인의 발치 뒤로 붉게 타오르는 난로가 보이는데, 노인은 그 따뜻한 난로를 마주하지 않고 비스듬히 돌아앉은 채 얼굴을 파묻고 있다"면서, 저자는 바로 이 지점이 '자기방임의 가장 가슴 아픈 구석'이라고 말한다. "물리적인 온기가 더는 의미를 갖지 못하는 상태, 살아갈 의지가 식어 버린 마음의 온도"를 표현한 장면이라는 것이다.
악당의 죽음은 마치 하늘의 선물처럼 반갑다. 그런데 죽음은 벌일까? 실패일까? 그렇지 않다. 악당이든 선한 사람이든, 실은 죽음이란 삶의 맨 마지막에 놓여 삶을 완성하는 최종의 순서일 뿐이다. 저자는 이 오래된 통찰을 미술관에서 확인한다. 렘브란트와 고야, 모네와 프리다 칼로의 화폭에서 노화와 돌봄, 상실의 기억과 죽음을 읽어내며, 살아 있는 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모두가 늙지도 죽지도 않을 것처럼 살아가는 얼빠진 세상을 향해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죽음을 실로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고 생각해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김성신 / 출판평론가 비평연대)
■ 달러 연금 수업 (최혜실 지음, 지음미디어, 2026)
‘돈을 왜 버는가’라는 질문에 명확한 답을 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당연히 많을수록 좋지!“, ”적어도 돈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싶진 않아“라는 대답이 일반론이지 않을까. 우리가 돈을 원하는 이유는 삶에서 돈이 주는 선택지의 확장, 안정감 때문일 거다. 결국 돈의 필요는 여유에 대한 갈망으로 수렴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아하고 여유로운 인생을 위한' 『달러 연금 수업』은 돈을 대하는 욕망의 본질에 집중한다.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는 내 통장에 있는 원화의 크기가 커지는 것에만 집중하기 쉽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은 통장에 찍히는 0 개수의 증가가 아니다. 이 책은 돈 걱정 없는 노후와 자유로운 현금흐름을 위해선 기축통화 ‘달러’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매일 마시는 커피 한잔의 원두도, 가족들과 함께 먹는 국산 삼겹살의 옥수수 사료도, 출근 전 주유하는 석유도, 모두 달러를 주고 사오는 것. 달러는 보이지 않게 우리 삶의 전반을 지배한다.
“당신은 당신의 인생을 사세요. 돈 버는 건, 달러한테 맡기고.”
이 책이 가장 매력적인 이유는 한 번의 달러 시스템 세팅으로 복잡한 차트 매매의 피로감을 없애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잘 살기 위해 돈을 버는 것이지, 돈을 벌려고 사는 게 아니니까. 매일 오르내리는 주가 등락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내 삶에 집중하는 것을 권하는 재테크 책이 필요하다. 각자의 경제 상황과 투자 성향에 맞게 치밀하게 설계된 시스템을 도입하는 순간, 우아하고 여유로운 인생을 위한 한 걸음이 시작된다.(서민서 / 출판 마케터·비평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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