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영석·이다해·이채윤·이기복 배우 4인의 앙상블 빛나
- 8월 1일까지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나는 갈매기예요!”
니나의 절규가 처연한 울림을 준 김낙형 연출의 체호프의 ‘갈매기’는 순백색 갈매기였다.
충북도립극단이 국립극단과 공동기획으로 7월 24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한 안톤 체호프 작, 김낙형 각색 연출의 ‘갈매기’는 백색 무대에 연출이 의도한 등장인물들의 삶과 의식을 선명하게 부각시킨 인생의 축도(縮圖)였다.
필자는 2025년 청주에서 공연한 김낙형 연출의 ‘환도열차’를 원정 관람했는데 그 당시의 공립극단 여건과 이번에 국립과 제휴한 무대와는 편차가 컸다. 최근의 국립극단은 제작 수준이 엄청 업그레이드 되었는데, 이번 충북도립의 ‘갈매기’도 무대디자인, 의상, 조명, 소품의 완성도가 높았다.
체호프의 ‘갈매기’, ‘벚꽃동산’, ‘바냐아저씨’는 매년 국공립은 물론 일반 극단과 기획공연들이 경쟁하듯 올려지고 있다. 하지만 만족할만한 무대를 만나기는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다. 연출의 해석과 시도가 좋으면 배우나 무대가 이를 따르지 못하고, 적역 위주의 캐스팅으로 최상의 앙상블을 이뤄낸 공연도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갈매기’는 연도는 기억나지 않지만 예술의전당 토월극장과 강남의 LG아트센터 공연이었다. 두 편 모두 본토 연출가를 초빙한 것으로 기억되는데 무대에 물을 사용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토월극장 공연은 너른 무대에 수심이 얕은 인공호수를 만들었다. 배우들이 그곳을 거닐며 물수제비 뜨던 모습이 선명하다. LG아트센터 무대는 수조를 만들어 배우들이 물속을 걷거나 물을 튀기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상징성이 강했었다.
김낙형의 백색 갈매기에 호수는 없었다. 공연이 시작되면 배우들이 무대 끝에 걸터앉아 포즈를 취하는 모습은 수년 전 외국 연출가가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한 ‘갈매기’ 때와 비슷했다.
무대(디자인 민병구, 손호성)는 자작나무 흰 기둥을 비롯해 벽도 바닥도 소도구들도 온통 백색이었다. 자료를 찾아보면 백색은 순수와 이상, 공허와 침묵, 죽음과 상실 등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필자의 느낌에는 흰 도화지 같기도 했다.
김낙형 연출은 76극단에서 시작해 혜화동1번지 3기 동인, 죽죽무대 창단으로 이어졌다. 자료를 보면 그는 “대담한 해체와 표현”으로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맥베드’, ‘붉은 매미’, ‘관객 모독’ 등 연출작의 스펙트럼도 넓은 편이다.
2024년 7월 창단된 충북도립극단의 예술감독인 김낙형 연출은 시즌 단원이 주축인 배우들의 맨파워를 최대한 끌어올려 대작에 도전했다. 다행히도 배우들의 연기력이 그의 의도를 어느 수준까지 살려주었다고 본다.
백색의 도화지에 그리고 싶어 한 그의 의도는 무엇일까?
연출의 글을 보면 “체호프만큼 인간적 주제라 할 수 있는 시간과 운명 그 흐름과 어긋남을 잘 표현한 작가는 드물다. 그리고 사랑마저도 변하는 삶, 또 그 사랑의 기억과 변화의 의지로서의 불꽃같은 순간을 주인공들의 몸짓으로 그려낸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했다.
연출은 “고독 속에서 타인에게 가닿지 못할 행위와 감정을 쏟아내는 것, 이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어 인정받고 또 스스로 존재를 확인해야 하는 인간 조건이며 현대인들의 숙제이자 고뇌의 모습들”임에 주목했다.
김낙형 연출은 원작의 텍스트에 충실하면서 핵심이 되는 주요 장면을 배우들의 대화(화술과 연기력)로 극명하게 부각시키는데 역점을 두었다.
1막 호숫가 무대에서 꼬스짜가 펼치는 연극에서 니나의 독백, 2막 니나와 뜨리고린의 열정적 대화, 3막 아르까지나의 활화산 같은 욕망, 그리고 4막 니나와 꼬스짜의 재회 장면...
오영석 배우의 꼬스짜는 시대의 변화를 몸으로 겪고 사랑으로 앓는 청년의 캐릭터로 젊고 힘이 있었다. 니나 역의 이다해 배우는 1막에서 호수를 나는 갈매기처럼 생동했고 발랄했다.
‘갈매기’의 중심 인물인 아르까지나 역의 이채윤 배우는 어느 여배우도 해내기 힘든 배역을 탄탄한 연기 내공으로 자신만의 스타일로 형상화해냈다.
필자는 시인이자 이 작품의 핵심 인물인 뜨리고린 역에 주목했다.
이 배역을 맡은 이기복 배우를 원로연극인들의 모임인 대학로연극인광장이 성남시와 합동공연했던 ‘소작지’에서 만나 대연장이 선정하는 2025 ‘박정자 연기상’ 수상자로 추천한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뜨리고린은 매력이 있어야 한다. 갈매기처럼 싱그럽던 니나의 순정을 꺾어버리고 아르까지나와의 질긴 연을 이어가려면 그만한 매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백색 갈매기 무대에 선 이기복의 뜨리고린은 유려한 대사와 정열적인 연기로 두 여자를 매혹시킬만 했다고 보았다.
필자는 4막의 재회 장면을 가장 아끼고 기대하는 편이다.
갈매기처럼 생생하던 니나는 뜨리고린과 헤어져 지방극장을 유랑하는 삼류배우가 되어 지친 몸을 이끌고 작가가 된 꼬스짜와 짧지만 격정적이고 가슴 저린 재회를 하는 장면은 언제보아도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해마다 ‘갈매기’를 접하지만 이 대목에 만족한 무대는 거의 만나지 못했다. 세월의 무게로 심신이 만신창이가 된 니나에 오매불망 그를 잊지 못한 꼬스짜 역시 숙성된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이다.
오영석 이다해 배우의 조합은 숙성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백색의 무대에서 붉은 선혈같은 강렬한 케미로 관객의 가슴을 저리게 했다. 첫사랑 연인 앞에서 자신을 꽃처럼 꺾어버린 뜨리고린을 여전히 사랑한다고 말할 때, 꼬스짜는 이미 권총으로 머리를 쏘았을 것이다.
이번 청주도립의 ‘갈매기’ 무대에서 첫 장면부터 일렉트릭 기타로 생음악을 선보였는데 그것이 김낙형 연출의 ‘동시대적인 감각’인지 모르겠으나 호불호는 갈렸을 것 같다.
하지만 최대 강점은 14명의 전 배역을 시즌 단원들이 맡아 연기가 일정 수준 이상이었다는 것이다.
의사 도른 역의 문창완 배우가 무대에서 돋보였고 아르까지나의 오빠 쏘린 역의 성홍일, 올가 역 정수현, 사무라예프 역 신태희, 야코프 역 류명한 배우 등 중견들이 캐릭터를 잘 소화했다고 본다.
이번 명동예술극장에서 국립극단과 공동기획한 충북도립극단의 ‘갈매기’는 지역의 공립단체가 이만한 무대를 만들 수 있다는 자존감과 역량을 보여준 무대였다. 이런 시도가 타 시도로 이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은 8월 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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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극단생활 대표.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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