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1회 여성연극제' 의의 살린 개막작 '이민선'
- 김자림 작, 류근혜 연출..1세대 극작가 김자림 선생 탄생 100주년
- 1960년대 정서 그려내...브라질 이민에 얽힌 당시 시대상 담아
- 20대부터 70대까지 23명 배우 총 출동...각 캐릭터들 개성 넘치게 소화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제11회 여성연극제에 축사하러 참석했다가 우연히 보게 된 개막작 '이민선(移民船)'은 필자의 개인사와도 얽혀 웃으며 보다가 가슴이 저리는 아픔과 함께 극의 아우라가 주는 당시 추억에서 눈물이 났다.
올해는 1세대 극작가로 꼽히는 김자림 선생의 탄생 100주년.
한국여성연극협회(이사장 강선숙)가 폭염 속에서 제11회 여성연극제를 개막하며 김자림 극작가의 대표작 '이민선'을 류근혜 연출에게 맡겨 개막작으로 올린 것은 청량제 같은 한 수였다.
본명이 김정숙인 김자림 작가는 평양사범 출신으로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돌개바람'이 당선되어 극작가로 데뷔해 희곡집 '이민선'(1971), '하늘의 포도밭'(1988) 등을 남겼다.
1세대 희곡작가로 활동한 김자림 선생은 수필, 소설, 콩트뿐 아니라 당시 인기가 높던 방송 드라마 작가로도 필명을 날렸다. 양명문 시인과 부부였던 김자림 선생은 희곡 제목처럼 아들이 사는 미국으로 이민, 1994년 작고했다. 차남 양성우 씨가 어머니 공연을 보러 한국에 왔다고 한다.
'이민선'은 1966년 명동국립극장(현 명동예술극장)에서 전세권(작고) 연출로 초연, 이번에 60년 만에 다시 올려진 것이다. 1980년대 극단 광장에서 데뷔한 류근혜 연출은 이 작품의 당시 시대상과 정서를 살릴 수 있는 적임자여서 더욱 의미가 컸다.
1966년은 필자가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며 연극에 막 입문했던 시기이다.
김자림 선생의 '이민선'을 본 기억은 희미하지만, 명동국립극장 앞 대형 선전탑의 포스터는 아련히 떠오른다. 당시만 해도 봄가을 시즌에만 공연을 볼 수 있던 명동국립극장은 연극애호가에게 성지(聖地)였으며, 특히 창작극에는 당시의 독특한 아우라(공연 스타일)가 있었다.
큰 무대를 꽉 채우는 사실적인 무대에 극적인 반전이 있는 스토리(가족 이야기가 많았다), 배우들의 화술과 연기가 신기하면서도 몽환적이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해랑 이진순 연출, 장종선 미술, 김동원 백성희 장민호 등 국립 배우들과 함께 이순재 신구 박근형 등 젊은 배우들도 인기를 모았다.
6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명동 시절 같은 추억의 연극은 사라졌다. 극단 형식도 달라졌지만 많은 배우들을 한 무대에 세우기가 어려운 풍토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사실적인 무대미술도, 가슴을 울리던 음악과 조명도. 무엇보다 배우들의 ‘연극적인 연기’마저 추억 속에 묻혀버린 것이다.
그런데 올해 여성연극제에서 중진 류근혜 연출이 당시의 감성이 물씬 풍기는 김자림 작가의 '이민선'을 23명의 배우를 등장시켜 무대에 재현한 것이다. 물론 시대가 달라진 만큼 현대적인 요소가 가미됐지만, 연출(류근혜)과 드라마트루그(전성희)뿐 아니라 무대미술(김민섭 최근영), 조명(이상근), 사운드 디자인(박한경은), 소품(손현석) 등에서도 명동 시절의 독특했던 분위기를 살려낸 것이다.
젊은 관객들은 어떻게 보았는지 모르지만, 필자는 배우들의 연기에서도 옛 추억과 옛 배우들의 체취가 묻어나는 것 같아 가슴이 뭉클했다. 70대부터 20대 배우까지 전 세대가 어우러졌는데 무대에 흐르는 복고풍의 기류가 무대미술과 조명, 음악과 더불어 향수를 느끼게 해준 것이다.
이야기가 방대해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이민선'은 한국전쟁 후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하자 정부가 1962년 이민법을 제정, 브라질 영농이민을 시행했는데 당시 그 상황을 지켜본 김자림 작가가 이를 희곡으로 창작한 것이다.
브라질로 떠나기 전 부산 항구의 한 호텔에 대기하던 이민자들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여러 가지 사건들이 펼쳐진다. 이민을 떠나는 사람들(가족들)은 저마다 푸른 꿈을 품고있지만 이민선이 향하는 곳은 결코 신천지 낙원은 아니었다.
김자림 작가는 당시 정부의 이민 정책을 신랄히 비판하면서도 가족마다 불가피한 사연과 사건들을 갈등과 반전의 정공법으로 엮어냈다.
고창수 가족은 아버지 고창수(마흥식), 창수댁(변은영), 아들 만세(김상우), 딸 소라(이승은) 처남 문덕보(은성준) 등이다. 피양댁(강선숙) 가족은 이민을 위해 급조됐다. 보비(박리진)는 친딸이지만 영감 정민락(이윤상)은 복덕방을 했고, 아들 물개(정시윤)는 범법자다. 최득찬 가족은 득찬(김동현), 득찬댁(박새슬), 그리고 노망이 난 득찬 부(윤관용) 등이다.
연기파 강희영 배우가 수선공으로, 황정원은 여관집 주인 차씨, 구자환은 형사, 이연주는 술집 여자 계월, 김기범은 우편배달부 등 멀티, 김다영은 호텔 종업원 미스 김, 권일심은 종업원 미스터 장 역할로 출연했다.
이 많은 배우들이 극을 이끌어가면서 자신의 캐릭터들을 저마다 개성 넘치게 소화해 이야기 전달이 잘 됐을 뿐 아니라 가족 간의 앙상블 구성이 재미있었다. 그중에서 고창수네와 피양댁네가 이야기의 큰 축을 이루었다.
고창식 역 마흥식 배우는 1970~80년대 정서를 지녀 이 작품에 어울렸는데 빚보증 잘못 서 사탕수수 농사로 부자를 꿈꾸는 브라질 이민이 좌초될 위기에 처한다. 변은영 배우가 맡은 창수댁은 해방되자 중국에서 귀국한 추억을 소중히 간직한 채 남편을 따라나섰으나 백치라고 놀림받으며 원숭이 인형의 고향을 찾아가려는 딸 소라(이승은)가 물개(정시윤)에게 당하고 자살하자 정신 줄을 놓아버리는 그 과정의 연기를 가슴 저리도록 실감 나게 잘 해냈다.
강선숙 배우가 맡은 피양댁도 극에 활력과 웃음을 불어넣는 캐릭터로 무대를 휘몰았다. 고흥출신이지만 평안도 사투리로 좌중을 휘어잡으며 팬티 속에 현금을 감추는 등 억척 연기를 펼쳐 여성의 강한 캐릭터를 보여주었다. 급조된 남편 이윤상 배우도 옛 배우의 체취를 물씬 풍기며 희극 연기를 흥이 나게 해냈다.
김상우 배우의 만세와 박리진 배우의 보비가 왕년의 러브라인으로 추억을 불러일으켰고, 은성준의 트럼펫 연주도 관객의 심금을 울렸다. 대연장 회원인 윤관용 배우의 치매 연기도 이민선을 풍자하는데 맞춤형 같았다.
강희영 배우의 구두 수선공 역할은 비중은 크지 않아도 ‘본향(本鄕)’이라는 작가의 메시지를 전하는 묵직한 맛을 풍겼다. 이민 가는 투숙객들의 온갖 궂은일들을 지켜보는 호텔 주인 차 씨 역의 황정원 배우의 연기도 넉넉해 좋았다.
김동현 배우의 최득찬과 박새슬 배우의 득찬댁 부부 호흡도 잘 맞았고, 물개 역의 정시윤 배우는 욕망과 폭력으로 얼룩진 악인 캐릭터를 액션을 곁들여 실감나게 연기했다.
필자는 '이민선'을 보면서 남달리 감성에 젖었고 눈물도 여러 번 흘렸다.
이 연극의 배경이 되는 부산항에서 1970년 월남전 참전 부대의 일원으로 출항하는 뱃머리에서 목 놓아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또 하나는 1992년인가, 브라질 이민 30주년 공연을 위한 연예인 위문단에 기자로 동참해 상파울루에 가서 브라질 이민 1세대들의 애환을 취재했기 때문에 연극 ‘이민선’이 주는 의미가 남달랐던 것이다.
1960~70년대 한국 연극은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우리들의 이야기를 우리의 정서로 무대에 올려 아직껏 진한 향수로 남아있는데, 여성연극제 개막작인 ‘이민선’이 그 향수에 젖게 하여 오랜만에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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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극단생활 대표.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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