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체코의 문호(文豪) 보후밀 후라발 대표작
- 음악, 낭독과 연극이 어우러진 임야비 연출의 새 형식 관극 체험...묵직한 주제 전달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연기 경력 반세기가 넘는 망(望) 80의 중진 배우 정동환이 단테와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고전 작품에서 벗어나 체코의 현대 작가 보후밀 후라발(1914~1997)의 대표작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총체극단 여집합의 임야비 대표가 각색, 연출한 악독극으로 관객과 만났다.
7월 4일 대학로 SH홀에서 개막한 이 악독극은 뜻 그대로 음악과 낭독과 극적 연기가 합쳐진 총체극(Total Theater)이다.
배우는 큐시트에 따라 연기하며, 관객들은 배우의 연기를 눈에 담고 자막으로 흐르는 글을 읽으며 시벨리우스의 음악을 듣는 색다른 체험을 하게 된다.
이 작품의 주제는 종이, 그중에도 폐지(廢紙)다. 활자가 찍힌 종이는 지식의 보고인 책이거나 신문이 되기도 한다.
극장은 입구부터 폐지들이 널부러져 있다. 압착된 폐지뭉치에 인상주의 명화(名畫)가 붙어있기도 했다.
종이의 시대는 가고, 활자매체도 종언(終焉)을 고했다고 하지만 이 공연은 종이가 단순한 인쇄물이 아니라 기억과 사유를 담고 시대의 목소리를 전하는 매개체임을 일깨우고 있다.
종이 더미의 활자 매체에서 30여년간 일한 필자는 이 작품의 원작과 공연 형식, 정동환 배우에게 각별한 애정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35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공연은 정동환 배우의 이같은 독백 일성(一聲)으로 시작된다. 무대의 벽면에는 동시에 이 문장이 활자로 투사된다.
정동환이 맡은 주인공 한탸는 35년간 폐지 공장 지하에서 압착공으로 일하며 버려지는 책들을 탐독하고 지식을 흡수하는 괴짜 노인이다. 그의 유일한 낙은 폐지 속에서 명저들을 찾아내 읽으며 맥주 마시기와 상상하기다.
집과 공장을 오가는 시계추 같은 반복 인생이지만 그는 “이 일이야말로 나의 온전한 러브스토리”라고 할만큼 일에 푹 빠져있다.
사실 문학작품을 극화하기란 쉬운 작업은 아니다. 극본으로 각색해 온전히 극으로 보여주는 방법도 있지만 임야비 연출은 낭독극이란 방식을 택했다. 정동환이라는 무게 있는 배우가 보후밀 후라발의 작품을 낭독으로 전하되 음악을 매개로 “글에서 말이 들리고, 말에서 글이 읽히는” 악독극이란 형식을 개발한 것이다.
그럼에도 무대는 사실적으로 제작했다. 한편에 폐지를 넣으면 압착하는 구식 기계가 놓여있고, 천정에는 폐지를 쏟아내는 기구가 설치돼있다. 바닥에는 폐지와 뭉치들, 책장에는 그 폐지 속에서 한탸가 골라낸 책들이 꽂혀있고, 테이블에는 맥주통이 놓여있다. 빨강, 파랑 버튼의 구식 압착기는 실제로 가동하는 것처럼 움직이고, 천장에서는 폐지가 쏟아진다.
정동환 배우는 네명의 배우(곽소영 김동윤 최승언 원빈)와 함께 악독극을 이끌어간다. 한탸라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정동환 배우는 작업복을 입고 폐지를 모아 압착기에 넣고 뭉치를 만들다 힘들면 맥주를 마시는 단순 동작을 반복한다.
배우가 원작의 요체(要諦)를 낭독하면 이 문장이 동시에 타이포그래피로 벽면에 투사된다. 시벨리우스 음악 또한 배우처럼 상황에 맞춰 연기하듯 깔린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를 여행한 관객들은 이 작품의 내용을 이해하기가 훨씬 수월하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매혹적인 제목과 달리 사회주의 체제 아래서 살아갔던 사람들의 경험과 기억을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보헤미안으로 불리는 집시들이 등장하고, 가이드가 들려준 체코 현대사도 도움이 되는 것이다.
20세기 체코는 나치 점령과 전쟁, 공산주의 정권의 수립, 1968년 ‘프라하의 봄’ 이후 ‘정상화’ 시기까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살아야 했다. 검열은 일상이 되었고, 작가와 예술가들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었다. 금지된 책들은 몰래 복사되어 사람들 사이에 떠돌았다. 작가는 기억이 통제되고 언어가 왜곡된 시대의 기억들을 풍자와 은유로 서술해 냈다.
이 공연은 낭독극이지만 딱딱하거나 지루하지 않다. 정동환이 보여주는 한탸의 일상에 예수와 노자가 등장하고, 집시 여인들이 등장해 극중극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추우면 몸을 공처럼 말았던 여자, 연(鳶)이 자기를 하늘로 데려갈까 봐 무서워 했던 여자”와 함께 하는 서정적인 장면도 있다.
악독극을 보여 준 임야비 연출은 필자에게 생소하지만 총체극단 여집합의 대표로 문학, 연극, 음악, 미술, 철학 등 여러 예술 장르를 융합하는 '총체예술(Total Theater)'을 추구해왔다. 소설가이기도 한 그는 관객이 책을 읽듯 문자와 언어를 통해 대사를 인지시키고 음악을 통해 감정을 증폭시키는 악독극을 개발했다.
이 공연은 형식도 새롭지만 보후밀 후라발이 강조한 주제가 묵직하게 전달된다는 점이 매력이다. 작가는 폐허가 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인간의 이야기를 통해 “가장 고전적이면서 가장 미래지향적인 이야기”(드라마투르그 김경주)를 관객에게 전하고 있다.
종이신문에서 일한 필자는 이 공연을 보며 “활자가 사라져가는 마지작 시대를 우리게 압축적이면서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김경주 씨의 말에 공감했다.
읽어보지 못했던 보후밀 후라발의 명저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악독극으로 접했다는 것만으로도 티켓값이 아깝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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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극단생활 대표.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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