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용재 시인이 예술감독으로 참여한 오대산 예술축제
- 박정자·서이숙·김상중 등 함께 축제 즐겨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평창) = 2026 오대산 예술법석 월정(月精) ‘달을 쓿다’가 5월 10일 오후 6시 30분 월정사 대법륜전 앞마당에서 열렸다.
오대산의 인문 정신과 예술적 영성이 만나는 종합예술제 형식의 이 시와 예술법석 축제는 오대산 월정사와 율곡국학진흥원이 주최하고, 박용재 예술감독을 중심으로 여러 아티스트들이 함께 펼친 시와 음악의 향연이었다.
5월의 태양이 월정사 서쪽으로 넘어가는 것을 기다려 오후 6시 30분이 되자 음악감독인 민경인 재즈 피아니스트가 산사의 정적을 흔드는 영롱한 피아노 선율로 예술법석의 막을 열었다.
사회는 흰색의 롱드레스로 선녀 같은 자태를 뽐낸 박정자 대배우가 맡았다. 그는 쌀쌀한 산사의 대기도 아랑곳없이 소녀처럼 마냥 들떠 신나 하는 표정이었다.
필자가 오래 보아왔지만 박정자 대배우는 무대 위의 연기 못지않게 이색적인 장소에서 뜻 맞는 예술인들과 함께하는 특별행사를 사랑하고 적극 참여해 왔다.
“무대를 성전(聖殿)처럼 여기며 60여 년간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은 한국 연극계의 거대한 심장"(박용재 시인) 박정자 대배우는 이번 오대산 월정사 예술법석의 취지를 연극 대사 하듯 들려주었다.
“종교적 경계를 넘어 인간 본연의 생명 가치를 탐구하는 장을 마련하여 현대인에게 필요한 예술적 위로를 전달합니다."
전통을 ‘힙(Hip)’하게 해석하는 ‘뉴트로(New-tro)’ 트렌드를 반영하고, 미디어아트를 통한 공간 연출로 새로운 불교문화 이미지를 창출하는 목적도 있다고 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본사 월정사의 정념 주지는 ”‘쓿다’라는 말은 곡식의 껍질을 벗겨내어 그 속의 하얀 알곡을 드러내는 정성스러운 과정“이라며 ”‘달을 쓿다’는 우리 마음을 가리고 있는 집착의 껍질을 한 꺼풀씩 벗겨내는 수행의 과정“이라고 설법했다.
월정사 예술법석은 종교의 문턱을 넘어 인간이 가진 가장 고결한 정신인 ‘예술적 영성’을 통해 우리 삶을 정화하는 자리라고 했다.
율곡국학진흥원 박원재 원장은 1부 ‘시(詩)로 만나는 오대의 봄날’의 배경을 들려주었다.
”예로부터 오대산은 동서남북과 중대, 다섯 봉우리에 수많은 도량이 자리해 있던 한국 불교의 중심이자 시인 묵객의 자취가 스며 있어요. 고려 말 나옹선사를 비롯하여 매월당(김시습)과 율곡(이이), 교산(허균), 추사(김정희)의 발자취가 고즈넉이 깃들어 있지요. 오늘 이 오대산의 자연과 인문을 ‘물, 달, 꽃, 나무, 님’이라는 다섯 가지 상징으로 엮어 자연과 인간의 공존과 존재의 의미를 묻고자 합니다.“
1경(景)은 서쪽으로 ‘물과 생명’의 노래였다. 연극과 매체를 넘나들며 활동하는 서이숙 배우가 김시습의 시를 낭랑하게 낭독하자 관객들은 봄의 정취에 취하기 시작했다.
2경은 중앙으로 ‘꽃과 세계’가 주제였다. 문화인류학자 이희수 교수가 인도의 민화(民畵)인 낭골리에 대한 체험담을 들려주었고, 튀르키예에서 동쪽으로 온 시인 아타세벤 파덴이 낭골리 주제의 시를 낭송하면서 분위기는 고조되었다.
3경은 북쪽으로 ‘나무와 치유’가 화두였다. 중견 곽효환 시인이 나와 율곡과 허균의 시를 고풍스럽게 들려주었다.
4경은 동쪽으로 ‘달과 고요’가 주제였다. 연기자이자 교양 프로그램 진행자이기도 한 김상중 배우가 ‘중’이 들어간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스님들을 풍자하자 장내는 폭소가 터졌다. 그는 금강경의 오가해와 달의 시를 낭송했다.
마지막 5경은 남쪽으로 화두는 ”님과 깨달음“이었다. 뮤지컬 가수, 영화감독, 작곡가이자 시인이기도 한 다재다능한 예인 유준상 배우가 게스트로 나와 “광운대에 신설된 우주와 예술 연구소 소장을 맡았다”며 끝이 없는 창의력을 자랑했다. 그는 한국화가 소산 박대성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들려주었고, 나옹선사의 시도 낭송했다.
2부 오대산 예술법석은 박용재 시인이 오대와 월정에 헌정한 시들을 8명의 아티스트들이 노래로 창작한 콘서트로 꾸며졌다.
올해 1월부터 합을 맞췄다는 8명의 아티스트는 재즈 피아니스트 민경인, 베이시스트 최진배, 아코디어니스트 정태호, 재즈 보컬리스트 남예지, 크로스오버 테너 박완, 바이올리니스트 이혜림, 생황 연주자 김효영, 공후 연주자 조보연 등이다.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공후와 생황 연주로 들려준 '님을 부르다'였다. 이 곡은 1,300년 전에 조성된 상원사 동종에 주조된 비천상(飛天像)을 소재로 창작된 것이다.
국보인 상원사 동종에는 공후를 켜는 여인과 생황을 부는 여인이 하늘을 오르는 조각이 새겨져 있다. '님을 부르다'는 이 조각상의 여인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축제 현장으로 불러내는 ’과거와 현재의 예술적 승화‘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서양의 하프처럼 생긴 공후(箜篌)는 박정자 대배우도 처음 보았다고 할 만큼 생소한 악기였고, 관악기인 생황(笙篁) 역시 아악에서나 볼 수 있는 희귀 악기다. 이날 공후는 조보연, 생황은 김효영이 연주했는데, 두 악기가 빚어내는 화음은 산사의 밤공기와 어우러져 너무도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과거의 장인(匠人)과 현재의 예술가가 만나 시공간을 초월한 감동을 안겨준 것이다.
크로스오버 테너인 박완은 ’물의 노래‘(민경인 곡), ’달에게‘(최진배 곡), ’꽃을 들고 춤추자‘(정태호 곡)를 맑고 정감 있는 목소리로 들려주었다.
재즈 보컬리스트 남예지는 ’꽃대‘(정태호 곡), ’나무의 노래‘(남예지 곡), ’꽃바칠래‘(남예지 곡)를 재즈풍으로 불러 산사의 밤을 낭만으로 물들였다. 특히 ’꽃바칠래‘는 객석의 합창을 유도, 한층 흥을 북돋웠다.
박완, 남예지가 ’님에게‘(민경인 곡)를 듀엣으로 불렀고, 아티스트 전원의 합주로 ’꿈속에서 만난 그대‘를 들려주며 산사의 봄밤 콘서트는 막을 내렸다.
이날 박용재 시인의 노랫말로 지은 창작곡이 발표된 월정사 대법륜전 앞마당은 빛의 황홀경이 펼쳐졌다. 한국 사찰에 관심이 많은 이여운 영상디렉터가 월정사를 주제로 작업한 다채로운 영상을 장엄한 사찰 외벽에 투사해 고건축의 아름다움과 색채의 향연을 만끽하게 해주었다.
시와 음악과 영상, 그리고 자연의 바람과 달빛이 어우러진 봄날의 산사 음악회는 밤이 깊도록 열려 전국에서 모인 시인과 예술 애호가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이날 ’달을 쓿다‘를 기획한 예술감독 박용재 시인은 강원도 강릉 태생으로 현재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초빙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다. 필자와는 1990년 스포츠조선 창간 때 만나 함께 일했다. 당시 문학과 연극을 담당했던 박용재 기자는 현장을 누비며 많은 문인과 연극인들과 교류해 왔다.
이날 월정사 예술법석에 함께 한 박정자, 서이숙, 김상중, 유준상 배우도 박용재 기자와의 친분이 두텁다. 강릉 바닷가에 작업실을 두고 서울과 강릉을 오가며 문화예술 이벤트를 열어온 박용재 시인은 특히 박정자, 손숙, 윤석화(작고)와 각별한 인연으로 그들을 기리고 후원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예술감독으로서 그는 이번 산사 예술제를 이렇게 설명했다.
“오래전부터 오대산과 산사를 다니면서 오대를 달(東), 물(西), 님(南), 나무(北), 꽃(中)으로 상징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예술 콘서트를 만들고 싶었어요. 달의 정령을 불러 산벚꽃나무와 돌배나무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풍경 소리를 타고 흐르는 불타의 말씀을 전하면서 특히 국보 36호 상원사 동종(銅鐘) 속 주악비천상의 공후 여인과 생황 여인에게 살아있는 예술적 생명력을 불어넣고 싶었어요.”
박용재 시인은 연초부터 민경인 음악감독과 7인의 아티스트들과 만나 자신이 오대산과 월정사에 헌정한 시에 곡을 입히고 노래를 만드는 창작 작업을 함께 했다.
이 신곡의 발표를 겸한 예술축제를 신록이 우거진 5월의 월정사 경내에서 갖기로 하고 김기영 연출감독, 이여운 영상감독과 특별한 무대를 협의했다.
그리고 월정사 정념 주지와 율곡국학진흥원의 전적인 지원으로 2026 오대산 예술법석 <달을 쓿다>를 성사시킨 것이다. 여기에 박용재 시인과 친밀한 관계인 박정자, 서이숙, 김상중, 유준상 배우가 바쁜 스케줄을 마다하고 한걸음에 달려온 것이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연등이 내걸린 이날 대법륜전 앞마당에는 전국에서 모인 시인들과 예술 애호가들로 작은 잔치를 방불케 했다.
필자도 예술원 회원인 최동호 평론가와 시인 20여 명과 서울에서 내려왔고, 부산과 강릉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산사 예술제를 보러 모였다.
관객들은 시집을 한 권씩 들고 있었다. 지난 4월에 서정시학에서 발간한 박용재 시인의 시집 '동쪽 달을 베고 잠들다'로, 저자가 친필 서명까지 해주었다.
필자는 박용재 시인의 여러 시집 중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재즈를 마시며 와인을 듣다' 등을 애독했는데, 이번 시집 '동쪽 달을 베고 잠들다'의 시들이 특히 가슴에 와닿았다.
“당신이 그리운 그런 날에는 동쪽 달을 베고 잔다”
’한순간만이라도 다녀갔으면 좋겠다‘는 시의 일부인데, 시인의 인생 여정을 보아온 필자에게 '한순간만이라도 다녀갔으면 좋겠다'는 시구가 심금을 울렸다.
이번 봄나들이에 상원사에도 다시 올랐는데 층계 오르는 데 숨이 찼다. 폐 수술을 하기도 했지만 그런 나이가 됐는데도 이 예술법석에 감사히 참여한 것은 박용재 시인과 박정자 대배우가 하고자 하는 이벤트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기술의 발달로 인간 심성은 날로 삭막해 가고, 예술마저도 상업화해 가는 시점에서 시와 음악과 연극과 영상과 인문학이 어울리는 축제를, 그것도 오대산 정기가 흐르는 월정사 경내에서 연 것은 박용재 시인 같은 열정의 기획자가 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월정사에서 상원사에 오르는 계곡은 전나무 숲으로 덮여 참으로 아름다웠다. 이같은 자연이 있기에 달을 노래하고 법석을 떨 수 있다고 생각하니 불현듯 행복감이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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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극단생활 대표.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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