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묘하고 신선했던 총체극 ‘갈매기 날다’...B급 정서로 재해석한 체홉
참 묘하고 신선했던 총체극 ‘갈매기 날다’...B급 정서로 재해석한 체홉
  •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승인 2026.08.17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 배우 황미숙 작, 연출, 안무의 총체극
- 체홉의 ‘갈매기’ 에센스 뽑아 극화
- 원작의 틀 깨고 퍼포머 춤과 밴드, 영상 활용해 입체화
퍼포먼스그룹 153의 ‘갈매기 날다’ 포스터.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참 묘했다.

여러 연출가들이 해석한 안톤 체홉의 작품들을 매년 서너 편 이상씩 보면서 어딘가 성에 안 찼는데, 그런 필자의 속내를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독특하게 해석한 작품을 만났다.

2026년 8월 15일 국립중앙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개막한 퍼포먼스그룹 153의 ‘갈매기 날다’. 다양한 형식의 이 공연을 관람하며 누가 이 같은 작품을 무대에 올렸을까 호기심이 동했다. 왜냐하면 필자가 ‘갈매기’를 보며 가졌던 아쉬움을 종합 선물세트처럼 안겨주었고, 체홉의 캐릭터를 B급 정서로 풀면 막장 드라마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각색과 연출과 장르 간 융합이 참신하기는 했지만, 가끔은 퍼포먼스 간 벽을 만든 게 이해되지 않아 “이건 뭐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 달콤쌉싸름한 새로운 맛, 창의적 형식의 공연이기는 했다.

이 작품을 보게 된 것은 대학로의 신뢰할 수 있는 정아미 배우가 올여름 폭염 속에서 열정을 쏟고 있다는 소식에 초대를 자청해서다. 극장에 와서야 체홉의 ‘갈매기’를 배우이자 작가이며 안무가이자 연출가인 황미숙 퍼포먼스그룹 153 대표가 여러 요소들을 융합해 창작한 작품임을 알게 되었다.

황미숙 연출

황미숙 연출의 이름과 작업 방식을 듣고는 있었지만 작품을 심도 있게 관람한 기억은 없어 솔직히 잘 모르는 편이다.

리플렛과 자료를 참조해 보니 1970년생인 그는 MBC 22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연기자로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했고, 독립영화와 단편영화도 감독한 이력이 있다.

동덕여대 대학원에서 무용 전공 박사과정을 이수한 그는 2009년부터 안무 작업 중심의 융합공연 ‘운수 좋은 날’ ‘메밀꽃 필 무렵’ ‘봄의 제전’ 등을 무대에 올렸다.

2018년부터는 직접 글을 쓰거나 각색한 후 연극, 무용, 영상, 미술, 음악 등이 함께하는 총체극 공연을 해온 특이한 이력의 공연예술가다.

이번 ‘갈매기 날다’는 황미숙 연출이 추구해 온 총체극으로, 배우들이 출연하는 연극에 무용 전공의 퍼포머 6명으로 춤을 곁들였고, 첼리스트 박혜준과 이스트맨 밴드를 무대에 세워 라이브 음악까지 시도한 이색적인 무대였다.

공연 시작 훨씬 전부터 5명의 밴드 멤버들과 6명의 퍼포머들이 신나는 라이브 공연을 펼쳤다. 좀 낯선 풍경이었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이벤트가 펼쳐질 것 같다는 호기심을 유발했다.

퍼포머들이 객석으로 내려와 관객들을 극 속에 끌어들이려는 의도도 엿보였다.

공연이 진행되면서 눈에 확 띈 것은 큰 무대를 가로지른 대형 스크린에 투영된 동영상 바다였다. 실제 바다를 촬영한 영상에 끊임없이 파도가 밀려오고 갈매기 울음소리가 어우러져 실제 바닷가 같은 실감을 안겨주었다.

원작에서는 고요하고 정적인 호수가 등장하지만, 이 공연에서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동적인 바다로 배경을 옮겨 갈매기란 상징을 더 극대화했다.

커튼콜 무대에 오른 주역들./사진=정중헌

이 공연의 핵심은 연극이었다.

황미숙 연출은 원작의 재현이 아니라 체홉의 ‘갈매기’ 원전에서 자신이 부각시키고자 하는 핵심 요소들만 추려냈다.

원작에는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이 무대에는 5명의 캐릭터만 무대에 세웠다. 그중 한 명은 새로 설정한 캐릭터였다.

한때는 화려한 스타였으나 지금은 한물간 배우 갈지나(아르까지나), 시인에서 소설가로 캐릭터를 바꾼 작가 백곤(뜨리고린), 원작과 이름이 같은 배우지망생 니나, 니나와의 사랑은 멀어지고 세대가 다른 엄마 갈지나와 대립하는 아들 보인(뜨레블레프), 새로 등장시킨 정신과 의사 도민이 그들이다.

극 중 인물들의 캐릭터 역시 원작과 상통하는 점이 많다.

유명 배우 갈지나는 사라져가는 젊음과 명성에 연연해 하고, 소설가 백곤은 창작이라는 이름 아래 사랑과 욕망마저 작품의 소재로 삼으려 한다. 배우를 꿈꾸는 니나는 예술을 위해 사랑을 담보로 한 왜곡된 열정으로 그 세계에 뛰어들었다가 정신적 충격을 받고, 보인은 믿었던 사람들에게서 상실과 배신을 겪으며 자신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되고, 교통사고로 휠체어 신세를 져야 하는 도민은 니나와 갈지나의 정신적 고통을 상담해 준다.

이쯤에서 왜 리뷰 첫 줄에 “참 묘했다”는 표현을 썼는지 필자의 주관적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체홉이 100여 년 전에 쓴 ‘갈매기’는 ‘벚꽃동산’ ‘바냐아저씨’와 함께 많은 연출가들에 의해 현대에 재해석되고 있다. 하지만 체홉 연극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서로를 사랑하지만 끝내 이야기하지 못하고, 자유를 꿈꾸지만 욕망에 흔들리는 사람들”을 오늘의 우리 감정에 와닿게 그려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작품마다 아쉬움이 남았었다.

체홉은 ‘갈매기’에 인간의 욕망과 사랑, 상처, 좌절 등을 그려내며, 인간의 연약함과 욕망의 굴레를 물고 물리게 캐릭터를 설정했다. 원작에 충실한 버전에서는 이러한 감정들이 다 구축되지 않아 아쉬웠고, 해체나 재해석 버전에서는 자신의 주장을 앞세우다 원작과 멀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황미숙 연출은 체홉이 그려낸 인간의 욕망, 사랑, 좌절, 상처의 직접적 캐릭터만을 무대에 호출했다.

첫 장면 엄마 갈지나와 아들 보인의 갈등, 니나와 소설가 백곤의 사랑과 상처로 이어지는 만남, 갈지나와 백곤의 뜨거운 애증, 니나와 보인의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의 좌절, 그리고 갈매기처럼 바다를 떠도는 보인의 상실을 집중 조명했다. 감정 교류가 분명한 인물의 관계도로 등장인물을 압축한 것이다.

그런데 체홉이 그려낸 욕망, 사랑, 좌절, 상실은 인간의 본능적 감정이다. 이 감정의 골과 부딪힘을 인간적으로 화끈하게 보여준 버전이 많지 않았는데, 황미숙 연출은 이 부분만 꼭 집어내 일대일로 부딪히게 상황을 클로즈업해서 드라마틱하게 보여주었다.

사실 인간의 이런 감정은 원초적인 것이다.

지위나 체면을 빼고 감정만 추려내면 통속소설과 다를 바 없고, 막장 드라마가 되는 것이다.

황미숙 연출은 유일한 소도구인 침대를 무대에 놓고 거기서 남녀가 욕망과 사랑을 불태우게 했다. 여러 버전에서 이 장면은 야하게 끌어가는 척만 하다 그쳤지만, 이 무대에서는 노출만 피했지 적나라하게 욕정과 애증을 표현해냈다.

백곤과 니나, 니나와 보인, 보인과 갈지나의 부딪힘도 멜로 드라마나 영화처럼 배우들의 감정을 폭발시켜 훨씬 리얼하게 그려냈다.

그러고도 감정을 다 쏟아내지 못하는 여백을 갈매기로 설정한 퍼포머들의 강렬한 춤과 라이브 밴드의 강렬한 비트, 저음으로 심금을 울리는 첼로 즉흥 연주까지 참여시켜 채웠다.

그뿐 아니라 조명, 음향, 빛까지 가세하고 객석의 아우라까지 상호작용 시켜 절정을 체험케 하려 했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황미숙 연출이 끌어내려는 배우들의 캐릭터는 더 본능적이고 강한 에너지가 흘러야 하고, 욕망을 숨기기보다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폭발하고 밀어붙여야 했다.

일반적인 감정 연기로는 안 되는, 무대 배경에서 춤 동작 하나, 음악의 선율 한 자락까지 배우들의 감정과 객석의 호흡과 맞아야 하는 것이다. 이 같은 토탈씨어터는 관객들에게 충격적 체험을 안겨 줄 수 있는 방식이지만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황미숙 연출은 그 같은 총체극을 국립극장 무대에 실현코자 했다.

그러자면 배우들도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커튼콜 무대에서 정아미 배우./사진=정중헌

“배우의 변신은 무죄!”

좀 고리타분하지만 첫 등장하는 갈지나 역 정아미 배우를 보면서 이 말이 떠올랐다.

가발을 쓴 머리끝부터 하이힐의 화려한 구두까지 평소 무대에서 보아왔던 이미지와는 너무나 다른 파격적인 변신이었다. 연기 스타일도 다소 과격할 정도로 강하게 설정, 자신의 단점을 가리려는 직접 화법과 표현을 구사했다.

백곤 역의 최재호 배우도 원작의 캐릭터와 달리 자신의 목적과 욕망을 에너지 넘치게 폭발시켰다. 정아미 최재호 배우가 펼친 무대 위 침대 연기는 과감하고 대담하면서도 가식이 덜한 것 같아 공감이 갔다.

최재호 배우
커튼콜 무대에서 최재호 배우./사진=정중헌

니나 역 하민우 배우의 이미지는 청순하면서도 쓸쓸한 여운을 안겨주었다. 작가 백곤과의 듀엣 무대에서는 사랑과 욕망의 감정을 충실히 표현했으나, 상실과 상처를 안은 채 만난 보인과의 만남에서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감정 연기가 좀 약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필자는 체홉의 ‘갈매기’를 볼 때마다 4막의 니나와 뜨레블레프의 재회 장면을 가장 중시하는 편인데, 인생의 쓴맛을 체험하고 지역을 유랑하는 삼류 배우가 된 니나와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한 뜨레블레프의 절절하고 아린 클라이맥스를 기대하는데, 이 공연도 예외가 되지는 못했다.

필자는 보인 역 이율빈 배우가 홀로 바닷가에 섰을 때 파도가 출렁이고 갈매기 떼 울음이 요란했던 상황에서 보인이 원작에서처럼 총소리를 내는 것을 상상했다.

하지만 황미숙 연출은 원작의 제목 ‘갈매기’를 ‘갈매기 날다’로 바꿔 새로운 돌파구를 열고자 했다. ‘날다’의 의미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황 연출은 “‘날다’는 곧 ‘살아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했다.

"누군가는 사랑에 실패하고, 누군가는 예술에 좌절하고, 누군가는 타인의 시선 때문에 자신의 삶을 잃어버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다시 날아 오를 수 있다“는 쪽으로 결말을 끌어간 것이다.

‘날다’는 내가 진짜 원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 다시 나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필자는 이 공연을 보면서 어떤 부분은 신선하고, 어떤 부분은 매끄럽지 않다는 상충 되는 느낌을 받았지만, 한 예술가가 자기의 주관을 가지고 다양한 시도를 했다는 노력과 집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필자 개인적으로는 퍼포머들의 멋진 춤이 연극과 좀 더 자연스럽게 어우러졌으면 좋았겠고, 라이브 음악 역시 의도는 충분히 이해되나 이 또한 작품에 스몄으면 더 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희랍 극의 코러스처럼 작품과 일체가 되었으면 퍼포먼스그룹 153의 작업이 더욱 빛났을 것이다.

이번 공연에서 만족한 부분은 제목 ‘갈매기’의 실체와 상징을 실컷 접했고 만끽했다는 점이었다.

황미숙 연출은 ”우리 모두가 갈매기“라는 의미를 각인시켜 주었다.

근래 들어 총에 맞은 갈매기, 박제된 갈매기의 실체가 무대에 보이고는 있지만, ‘갈매기’ 공연에서 갈매기의 상징성을 제대로 느끼기 어려웠던 갈증을 이 공연이 한껏 풀어준 것이다.

정아미 배우와 필자<br>
정아미 배우와 필자

공연 관람 후 로비에서 정아미 배우는 만났는데 황미숙 연출은 보지 못했다.

그가 애써 만든 공연에 필자가 잔소리를 늘어 놓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지만, 이 창작가를 더 깊이 알고 싶고, 작품에 주목해보고 싶은 의도에서 필자의 생각을 피력한 것이다.

그 미안한 감정을 여러 인터뷰 등에서 황미숙 연출이 했던 말과 글로 대신하고자 한다.

작의(作意)에 대해 황 연출은 ”밀려드는 파도처럼 멈추지 않는 인간의 욕망과 상처, 그리고 시련을 뚫고 끝내 비상하려는 삶의 의지를 배우들의 신체 언어로 표현해 보고 싶었다“고 했다.

자신이 어떻게 남게 되기를 바라느냐는 질문에 황 연출은 ”무대 위 정형화된 언어를 비틀고, 감각의 생명을 일깨우는 연출가 황미숙이었으면 한다“고 답한 점도 인상에 남았다.

필자는 50대의 황미숙 대표가 ”늘 새로운 공연 언어를 탐구하는 예인. 타인의 시선에 마모되지 않고 자신만의 정직한 날갯짓으로 무대를 채워나가는 연출가“이기를 바라고 싶다.

황미숙 연출에게 갈매기는 무엇일까?

“‘갈매기’는 원작에서도 중요한 상징이지만 나에게는 단순히 한 인물을 상징하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꿈과 자유, 그리고 다시 살아가려는 의지를 상징한다.”

다양한 형식으로 체홉의 ‘갈매기’를 재창작한 그는 ‘갈매기 날다’를 통해 공연을 본 관객들이 역경을 헤치고 갈매기처럼 훨훨 날기를 바란다고 했다.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극단생활 대표.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관련기사


  • 서울특별시 구로구 신도림로19길 124 801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737
  • 등록일 : 2009-01-08
  • 창간일 : 2007-02-20
  • 명칭 : (주)인터뷰365
  • 제호 :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명예발행인 : 안성기
  • 발행인·편집인 : 김두호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문희
  • 대표전화 : 02-6082-2221
  • 팩스 : 02-2637-2221
  • 인터뷰365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6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ess@interview365.com
엔디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