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인희 작, 김성환 연출 ‘작은할머니-그 여자의 소설’ 서 남편 역 다시 맡아
- 한국 정서 살아 숨 쉬는 가부장 시대의 남편 상 보여줘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올해 만 80세가 되는 공호석 배우가 제11회 늘푸른연극제에 선정되어 7월 9~12일 삼선교 서울연극창작센터에서 엄인희 작, 김성환 연출의 ‘작은할머니-그 여자의 소설’을 공연한다.
배우 공호석은 1973년 극단 민예 창단 공연 ‘고려인 떡쇠’(허규 연출)로 데뷔하여 53년 동안 ‘서울 말뚝이’ ‘물도리동’ ‘다시라기’ ‘그것은 목탁구멍 속에 작은 어둠이었습니다’ 등에 출연, 한국적 정서가 살아 숨 쉬고 삶의 깊이가 묻어나는 연기 내공을 보여왔다.
공호석 배우는 ‘전통극의 현대화’를 내건 극단 민예의 창단 동인이자 대표를 역임하며 우리 연극의 정체성을 찾는 작업에 참여해 왔다. 연극뿐 아니라 영화, 드라마 등 180여 편의 작품에 출연하며 한국인의 질박한 심성을 특유의 몸짓과 표정으로 표현하는 탄탄한 연기력을 보여왔다.
원로 연극인 대상의 늘푸른연극제에 선정된 공호석 배우가 이 작품을 택한 것은 1995년 강영걸 연출로 제19회 서울연극제에 참가하여 남자연기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당시 제목은 ‘그 여자의 소설’이었다. 엄인희 작가(1955~2001)가 쓴 이 작품의 원제는 ‘작은 할머니’이다.
강영걸 연출이 이 작품을 초연하면서 ‘그 여자의 소설’이란 제목을 붙였고, 내용도 일부 각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이 작품은 ‘작은 할머니’ 또는 ‘그 여자의 소설’로 매년 공연될만큼 널리 알려졌고 관객의 공감을 자아냈다.
엄인희 작가는 1995년 6월 문예회관 소극장 공연 당시 이 작품의 원제는 ‘작은 할머니’이며 1989년 ‘또 하나의 문화’라는 여성 문화단체가 낸 책에 실은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작품에 대해 “아들을 못 낳은 여자의 삶이면서 남편을 독립운동에 바치고 자신은 씨받이가 된 여자의 삶”이라고 말했다.
배우 공호석, 31년 만 다시 밟은 ‘작은할머니-그 여자의 소설’
공호석 배우는 고향인 극단 민예와 함께 이 작품을 올리면서 김성환 연출에게 맡겨 변화를 꾀했다. 김 연출은 두 개의 제목을 합쳐 ‘작은 할머니-그 여자의 소설’로 했고, 엄인희 초기 원작에 비중을 두어 내용 일부도 각색했다고 들었다.
9일 관람한 첫공의 내용은 필자가 그간 보아 온 10여 차례의 공연과 같은 듯 달랐다. 필자는 생활연극협회와 극단 생활에서 두 차례 강영걸 연출의 ‘작은 할머니’를 공연해 스토리와 대사를 거의 욀 정도인데, 이번 김성환 연출의 버전은 기존 작품과 등장인물도 적고, 특히 후반부와 결말은 파격적이라고 할 만큼 내용도 달랐지만 다른 만큼 예상 밖의 참신함을 안겨주었다.
늘푸른연극제 선정 연극인으로 무대에 선 공호석 배우는 기호(畿湖) 지방 특유의 깐깐하면서도 가부장적 기질을 타고난 듯한 남성상을 보여주었다. 이 작품의 시대 배경은 일제 강점기에서 시작해 6.25 전쟁을 거쳐 1960년대에 이르는 격동의 근현대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축접(蓄妾)제도가 있었다.
공호석 배우가 맡은 남편 역은 조강지처(큰댁)가 아들을 못 낳는다는 이유로 작은댁을 씨받이로 들여 두 여자를 끼고 살면서도 매질하고 구박하는 전형적 가부장 캐릭터였다. 초연 당시 그는 이 캐릭터를 실제 인물에 가장 근접하게 연기해 내 상을 받았다. 그는 30여 년 만에 다시 선 이번 무대에서도 그런 깐깐하며 권위적인 남편상(像)을 간지(일본어에서 비롯된 것으로 ‘멋있다’ 또는 ‘스타일이 살아있다’는 의미) 나게 해냈다.
이번 작품에서 작은댁은 김순이, 큰댁은 백경희, 작은댁의 전남편 조춘 아버지는 최승일, 귀분네는 이혜연, 조춘이는 박인아 배우가 맡아 선정 연극인 공호석 배우를 탄탄하게 받쳐주었다.
기존 작품에는 아들 진범이가 나오고, 강영걸 연출 버전에는 ‘작은 할머니’와 손녀가 나오는데 이번 무대에서 등장인물을 6명으로 집약했다.
인고(忍苦)의 삶을 살아온 작은댁은 여배우들이 선호하는 배역인데, 이를 실험극장 출신의 김순이 배우가 맡아 여린 듯 강한 캐릭터로 설정하여 젊은 시절부터 노역까지를 유연한 연기로 펼쳐냈다. 특히 말년에는 당하기만 해온 수동적 캐릭터에서 벗어나 남편을 제압하며 응징하는 강한 면모도 보여 관객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었다.
큰댁 일을 도맡아 하며 작은댁을 돕는 귀분네 역의 이혜연 배우(극단 민에 대표)는 최근 두 차례 영등포아트홀에서 공연한 강영걸 연출의 ‘작은 할머니’에서 타이틀롤을 맡았었다. 이번에는 개성이 강한 귀분네 역을 맡아 오지랖이 넓으면서도 인정이 넘치는 수더분한 캐릭터를 보여주었다.
필자와는 오랜만에 무대에서 만난 큰댁 역의 백경희 배우는 속은 곪아 터질 지경이지만 윗사람의 기품을 잃지 않는, 그러면서도 같은 여자로서 작은댁을 감싸는 전형적 여인상을 보여주었다.
독립군으로 활동하다 다리를 다친 채 고향에 돌아와 만삭의 전처를 만나는 조춘아버지 역 최승일 배우는 어서 장가가라는 아내의 말에 “착한 사람”이라는 명대사로 관객을 울컥하게 했다.
조춘이 역은 극단 민예의 미래 기대주인 박인아 배우가 맡았다. 어릴 때부터 식모살이 하다 혼인을 앞두고 친엄마를 찾은 딸이 큰절을 하는 장면은 볼 때마다 눈물이 났는데, 박인아 배우도 이 대목의 핵심을 놓치지 않고 가련한 모정 연기로 객석을 울렸다.
김성환 연출은 엄인희 작가의 희곡이 지닌 대사의 당위성을 배우들의 호흡으로 잘 살려냈다.
특히 이번 공연에서 연출의 작품 해석과 각색이 돋보였다. 두 차례나 제작했지만 엄인희 작가의 원작을 접하지 못한 필자는 어디까지 살리고 축약했는지 알 수 없지만 ‘작은 할머니’의 장인(匠人)으로 꼽히는 강영걸 연출 버전과 다른 부분은 분명히 짚어낼 수 있었다.
귀분네의 중매로 큰댁과 작은댁이 맞선보는 첫 장면부터 온 가족의 벚꽃 나들이, 전남편과 작은댁의 만남, 전쟁통에 미군들에게 몸을 더렵혀 목매 죽은 큰댁의 장례까지는 대체로 비슷했다. 갈대로 만든 발을 활용한 가림막과 대형 평상으로 심플하면서도 시대의 아우라를 살린 무대(민병구)와 함께 김성환의 깔끔한 연출이 ‘현대적인 작은할머니’의 신선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런데 절에 들어가 공양이나 바치겠다고 했던 작은댁이 석탑이 있는 마당을 쓸고 있을 때 귀분네가 찾아오는 장면은 (원작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생경하게 다가왔다. 쪽진 머리로 일관하던 두 여성 캐릭터가 파마머리로 나오는 것도 그랬지만, 배 아파 낳은 아들 진범이가 빚을 지고 도망다닌다는 내용도 이해는 되면서도 낯설기만 했다.
마지막 장면은 김성환 버전의 하이라이트였다. 기존의 작품들이 인고의 삶을 살아온 작은댁이 치매 걸린 남편을 구박하는 정도에서 극을 끝낸 반면 이 작품에서는 똥오줌 못 가리는 남편을 수발하러 다시 왔는데도 욕설과 매질을 멈추지 않는 남편을 작은댁이 응징하는 장면이 나와 답답했던 관객들의 속을 펑 뚫어준 것이다.
“모난(못난) 어미가 잘난 여감(영감)을 때리 주어따. 어미다(어미가) 이제 사람 가트다(같다).”
글을 배운 작은댁이 딸 조춘이에게 보낸 편지의 한 토막이다.
인권운동가이기도 했던 엄인희 작가는 자신이 눈으로 보아온 가부장제 남편들에게 집을 나가는 ‘인형의 집’의 로라처럼 한 방을 먹인 것인지도 모른다(이 부분의 원작도 궁금하다).
엄인희 작가의 ‘작은할머니’가 품은 또 다른 면모들을 접하게 해준 김성환 연출의 ‘작은할머니-그 여자의 소설’은 원작의 탐구와 해석으로 늘푸른연극제의 기풍을 새롭게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컸다. 막간의 암전들이 좀 긴 데다 음악이 극의 분위기를 좀 더 살려냈으면 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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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극단생활 대표.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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