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세 영재 소년 김승주 등 아역 배우들이 주도하는 대형무대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오랜만에 재미있고 감동적인 뮤지컬을 만났다.
신시 컴퍼니가 시즌 4로 4월 12일 한남동 블루스퀘어 우리은행홀에서 개막한 ‘빌리 엘리어트’는 라이선스 작품인데도 소년의 성장 스토리에 얽힌 꿈과 열정, 가족애 등이 우리 정서와 맞아 재미에 더해 뭉클한 감동을 느꼈다.
한국 뮤지컬 시장이 커져 다양한 작품이 공연되고 있지만 아직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소년이 3시간 대형 공연의 80~90%를 끌어가는 작품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신시컴퍼니가 제작해 온 한국판 <빌리 엘리어트>는 아역 배우들과 성인들이 호흡을 맞춰 완성도 높은 무대를 보여주었다.
필자는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먼저 보았고, 몇 년 전 뉴욕에 갔을 때 브로드웨이에서 역시 스티븐 달드리 연출의 뮤지컬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뉴욕 무대는 언어의 벽도 있었지만 영국 탄광 노조의 투쟁에 맞춰져 좀 와닿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2막에서 펼쳐진 발레의 황홀감과 예술의 힘에 전율을 느꼈었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국내에서 비영어권 국가 중 최초로 2010년 서울 LG아트센터에서 초연된 후, 2017년과 2021년 세 차례 공연되었지만 필자는 뉴욕 관람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관심을 갖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난주 SBS ‘영재발굴단 인피니티’에 빌리 역으로 선발된 차세대 주인공 4명의 프로필과 연습 과정이 소개되면서 관극 욕구가 일었는데 다행히 첫 공을 볼 기회를 얻은 것이다.
영재발굴단이 공개한 주역 4명은 김승주 박지후 김우진 조윤우다. 11~13세의 이들은 발레는 물론 탭댄스, 노래, 연기까지 동시에 해내야 하는 고난도 연습을 1년 이상 이겨냈을 뿐 아니라 어리지만 뮤지컬 배우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했다. 아직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앳되기만 한 소년들이 자기 의지로 과정의 고통을 이겨내고 꿈을 실현해 가는 모습이 대견해 보였다.
처음 접한 한국판 ‘빌리 엘리어트’는 외국인 전문 스태프들이 참여했음에도 한국적인 정서가 물씬해 이해가 쉽고 친근감 있게 다가왔다.
어려서 엄마를 여읜 빌리는 탄광촌에서 광부로 일하는 아버지와 형 토니가 파업에 나서 치매 할머니를 돌보며 외롭게 지낸다. 복싱 연습장에서 우연히 발레를 접한 빌리는 미세스 월킨슨 선생의 지도로 발레학교 입학을 꿈꾸게 된다.
이 같은 성장 서사 중심에 빌리(김승주)가 서고 아버지(조정근)와 형 토니(구준모), 할머니(박정자), 죽은 엄마(김명희)가 가족으로 에워싼다. 발레 선생 월킨슨(최정원), 피아노를 치는 브레이스웨이트(윤보경), 성인 빌리(김명윤) 등이 코러스들과 어우러져 극을 이끈다.
여기에 빌리 김승주와 유쾌한 친구 마이클(이서준), 여자 친구 데비(김서윤)를 필두로 10세 전후 소녀들로 구성된 발레 수업 학생들이 성인 뺨치는 군무와 연기 앙상블로 극에 재미와 감동을 더하는 주체로 활약한다.
뮤지컬 경력이 있다는 빌리 역 김승주는 발레의 동작이 유연하고 탭댄스에 능할 뿐 아니라 노래도 잘하고 특히 연기에서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어떻게 13세 소년이 이 3시간 대형 공연의 주역을 맡아 만석 관중 앞에서 흔들림 없이 기량을 완벽에 가깝게 해낼 수 있을까,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안정된 개인기에 다른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는 앙상블까지 보여주었다.
빌리의 절친으로 나오는 마이클 역 이서준 배우는 작은 체구에서 솟구치는 신선한 에너지로 유쾌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성인 배우도 하기 힘든 명랑 코믹한 캐릭터를 재기발랄하게 해냈다.
빌리 여친인 데비 역 김서윤 배우는 예쁘고 깜찍한 연기로 무대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성인 배우 중 필자의 눈길을 끈 캐릭터는 80대인 박정자 대배우로 젊은이 뺨치는 열정이 대단했다. 빌리의 할머니 역을 맡은 그는 랩 수준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뮤지컬 넘버 한 곡을 완전체로 불렀다. 특히 커튼콜 때는 발레 타이즈 차림으로 등장해 각선미(?)를 뽐내는 끼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 뮤지컬에서 빌리 다음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역할은 단연 발레 선생 미세스 왈킨슨 역의 최정원 배우였다. 필자는 1990년대 초 그의 화려한 데뷔 과정을 지켜보았는데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시원한 가창력과 파워플한 춤 솜씨는 여전했고, 무엇보다 관록에서 나오는 포즈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특히 아역 배우와의 호흡이 매끄러워 색다른 케미를 보여주었다.
아버지 역을 맡은 조정근 배우는 아들이 발레를 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절대 후원자가 되는 털털하면서도 부정(父情)이 넘치는 성격 연기를 잘 해냈다. 빌리 형 토니 역의 구준모 배우도 노동자로서의 격정 연기와 가족 사랑을 에너지 넘치게 보여주었다. 피아노 반주자 역을 맡은 윤보경 배우의 깜짝 연기 변신도 애교로 볼만 했다.
이번 시즌 4에서 한국적인 정서로 관객을 울리는 장면은 빌리 김승주가 윌킨슨 선생, 데드맘과 편지를 읽고 노래할 때이다. 1막에서 빌리가 윌킨슨 역 최정원 배우와 엄마의 편지 내용을 주고받을 때, 2막 마지막에 죽은 엄마 역 김명희 배우와 모정을 나눌 때 관객들도 함께 가슴으로 울었다.
이번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시즌 4를 보면서 흐뭇했던 점은 한국 뮤지컬 제작 수준의 괄목할 발전이었다. 필자가 ‘뮤지컬 보기운동’을 펼쳤던 1990년대 초반만 해도 뮤지컬 전문 배우가 많지 않았고, 와이어리스 마이크도 자주 말썽을 피웠다. 그런데 지금은 음악 편곡과 연주. 군무 등 안무. 무대 세트와 조명, 의상 등이 세계적이고, 배우들 기량도 본고장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특히 ‘빌리 엘리어트’가 시즌 4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된 배경에는 신시컴퍼니의 박명성 총괄 프로듀서의 역할이 컸다. 이미 라이센스 뮤지컬 ‘시카고’와 ‘맘마미아’를 국내 흥행시킨 그는 2010년 ‘빌리 엘리어트’ 판권을 확보하여 이제는 국내 스태프진으로 제작할 수 있는 역량을 가졌다.
SBS ‘영재발굴단’에서 보여주었듯이 아역을 선발하는 대규모 오디션 시스템을 구축, 장기간 트레이닝으로 제작까지 이르는 방식을 정착시키는데 박명성 대표의 역할이 컸다고 본다. 이처럼 외국 뮤지컬도 신시컴퍼니처럼 우리 정서에 맞게 제작을 주도한다면 흥행도 호조를 보이리라고 생각한다.
관객들이 이해하기 쉬운 성장 서사에 가족 간의 사랑, 시골 선생의 열정이 더해지고 다채로운 무대 전환과 스펙터클한 군무에 관객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특히 2막 초반에 소년 빌리가 성인 빌리와 차이코프스키 ‘백조의 호수’ 정경 음악에 맞춰 2인무를 추는 장면은 무아지경의 예술적 감동을 안겨주었다.
김승주 배우가 와이어에 매달려 공중을 나는 고난도 연기에 객석에서 탄성이 터졌다. 소년의 꿈이 창공에 펼쳐지는 이 공중 발레는 이번 공연의 압권이었다.
‘빌리 엘리어트’를 영화로 만들어 세계적으로 히트시키고, 이를 뮤지컬로 재창작하여 연출한 스티븐 달드리 감독이 한국을 처음 방문, 12일 프리뷰 무대에서 한국 관객을 만난 것도 한국 뮤지컬의 위상을 말해주는 깜짝 이벤트였다.
달드리 감독은 “AI시대라고 하지만 공연예술은 절대 대체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의 이 같은 확신이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를 전 세계 누적 관객 1000만 명을 넘어서게 한 저력이라고 본다. 한국 배우 중심으로 안정된 프로덕션을 보여준 이번 시즌 4 무대를 본 달드리 연출의 소감이 궁금하다.
커튼콜은 또 하나의 공연이라고 할 만큼 볼거리가 풍성했다. 3시간 가까이 숨죽여 무대에 몰입하던 관객들은 대단원의 막이 내리자 일제히 기립해 갈채를 보냈다. 그 박수에 끌려 배우들은 다시 무대로 나와 관객들과 뜨겁게 감정을 교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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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극단생활 대표.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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