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문화비평가와 출판전문가들의 커뮤니티인 '비평연대'에서는 숏폼 콘텐츠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500자 내외의 '매우 짧은 연대 서평'의 형식을 고안했습니다. 2030세대 지식인 특유의 빛나는 감각으로 제시되는 다양한 책들을 통해 지식의 최전선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편집자주]
■ 콘크리트 유토피아 (박해천 지음, 자음과모음, 2011)
서울은 어디를 가든 아파트를 짓고 있다. 아파트를 짓지 않은 곳이 있다면, 그곳은 마치 섬처럼 주위 아파트 단지들에 둘러싸이게 된다. 나는 한 번도 아파트에 살아본 적이 없지만, 창밖으로 빽빽하게 들어선 성냥갑 같은 단지를 볼 때면 저 네모 칸 안에 담긴 수많은 삶의 모양을 상상하곤 한다. 우리가 매일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이 사각형의 공간은 대체 언제부터 지금의 형태가 되었을까.
박해천 교수의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아파트'가 한국인의 생활상과 세계관을 어떻게 바꿨는지 보여준 책이다. 동명의 영화 역시 이 책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것이라 한다. 영화가 생존을 건 스펙터클한 재난을 다루었다면, 책이 그리는 디스토피아는 조용하고 일상적이다. 하루아침에 건물이 무너지는 비극이 아니라, '내 집 마련'과 '자산 증식'이라는 목표 아래 평범한 사람들의 욕망이 어떻게 콘크리트처럼 굳어지고 규격화되었는지를 파헤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상적 재난을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전개 방식부터 흥미로운 접근을 취한다. 구성이 특이한데, 1부에선 픽션, 2부에선 팩트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에서 가상의 화자들을 내세워 아파트를 둘러싼 내밀한 서사를 문학적으로 그려낸다면, 후반부에선 경제 지표와 통계를 통해 한국 자본주의와 중산층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논증한다. 앞선 가상의 서사가 뒤이은 통계 지표들을 만나 현실로 환원되는 셈이다.
사실 업무에 필요한 참고자료로 훑기 시작한 책이지만, 다 읽고 나면 한국의 아파트에 관해 단 한 권을 읽어야 한다면 주저 없이 이 책을 꼽게 된다. 현재 책이 절판되어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는데, 빨리 새롭게 출간되었으면 좋겠다.(맹준혁 / 출판편집자·콘텐츠기획자)
■ 고통 구경하는 사회 (김인정, 웨일북, 2023)
SNS나 포털에 걸린 기사에서 폭력과 살인, 자살과 사고는 늘 구체적인 서사를 담을수록 높은 조회수를 받는다. 눈살이 찌푸려지면서도 궁금할 때도 있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이건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책임감을 애써 장착할 때도 있다. 독자인 나도 누군가의 불행을 흥미진진한 콘텐츠로서 소비하지 않기 위해 신경 쓰는데 저널리스트 본인들은 또 얼마나 고민할까.
'고통 구경하는 사회'는 뉴스에서 사고 현장을 어느 정도의 수위로 보여줘야 하는가, 많은 사람이 공감할 만한 사건에만 보도가 치우치는 것이 마땅한가 등 저널리즘이 타인의 고통을 다룰 때 봉착하는 여러 딜레마를 다룬다. 이 책의 훌륭한 점은 저자 본인이 저널리스트로서의 윤리성을 돌아보는 동시에 그것을 소비하는 독자의 시선을 돌아보게 한다는 것이다. 기자의 본위가 흥미로워 보이도록 사건을 편집하는 것이 아닌 사실에 기반하여 사회의 문제를 알리는 것이라면, 독자의 책임은 이에 대하여 ‘구경꾼’이 아닌 ‘목격자’가 되는 것이다. 목격자는 사건을 방임하지 않을 책임이 있다.
우리는 뉴스와 기사를 통해 막을 수 있었을 재난을, 갈취하는 자와 빼앗기는 자가 확연한 불평등을, 혐오에서 오는 폭력을 마주한다. 때때로 그 소식은 이 문제에 진작에 관심을 가졌어야 했다는, 이제야 알았다는 일말의 가책과 함께 찾아온다. 보도의 윤리성을 끊임없이 반성하는 김인정이라는 저널리스트 맞은편에서 목격한 타인의 불행을 피하지 않고 자책하는 독자가 되고 싶다.(유희선 / 출판마케터, 비평연대)
■ 테세우스 패러독스 (이경희, 안전가옥, 2025)
“온 우주가 우리 인간의 손가락 끝에 놓일 때까지”
신인류로의 도약을 꿈꾸는 이들에게 인간의 육체란 “갑갑하고 원시적인” 것에 불과해 보인다. 그러므로 언제나 인간의 궁극적 욕망은 ‘죽음’을 극복하는 것으로 이어지곤 한다. '테세우스 패러독스' 역시 그처럼 망가진 신체를 기계로 대체하고, 죽은 자를 되살리는 기술이 태동하기 시작하는 근미래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소설의 중심축은 국내 최대의 밀리테크 기업 ‘트라이플래닛’의 회장 진환과 그의 이복동생 미진이 벌이는 경영권 분쟁이다. 그러나 진환이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인해 전신을 기계 부품으로 교체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동일한 인물이 세 가지 형태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사이보그가 된 진환과, 수술 후 버려진 그의 살점을 재조립해 만든 진환, 그리고 유사시를 대비해 저장해 둔 진환의 의식 데이터로. 결국 극의 주축은 ‘누가 기업의 경영권을 차지할 것인가’가 아닌 ‘누가 진짜 진환이 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넘어간다.
지금까지의 인류는 세포와 유전자를 통해 개인을 고유하게 식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육신을 버린 인류에게는 자신을 정의할 새로운 지문이 필요하다. 세 명의 진환 중 가장 먼저 패배하는 것이 ‘기존의 살점으로 빚은 진환’이라는 점은 그렇기에 상징적이다. 기술의 발전 앞에서는 육체의 정보가 더 이상 개인을 증명하는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음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짜 진환은 누구였는지를 마지막까지도 자문하고 마는 여울의 모습은, 앞으로의 미래 인류가 될 독자의 앞에 ‘인간의 고유성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고민을 오래도록 남겨둔다.(김도경 / 출판편집자, 비평연대)
■ 릴리와 호지 (이본 스카곤 지음, 장은수 옮김, 문학동네, 2007)
'릴리와 호지'는 두 마리 고양이를 그린 작은 화집처럼 보이지만, 실은 인간의 삶과 가치에 대해 사려 깊게 묻는 책이다. 이본 스카곤은 릴리와 호지를 검고 단정한 목판화 선으로 새긴다. 창가에 나란히 앉은 뒷모습, 서로 기대어 잠든 몸, 먹이에 몰두한 자세만으로도 우정과 애정, 평온과 자존심이 또렷하다. 여기에 “모든 지적 진보는 한가로움에서 비롯된다”, “별것 아닌 것에 심취하다보면 불행은 날아가고 행복이 찾아온다” 같은 문장이 더해지면 고양이의 하루는 곧 삶의 철학이 된다.
특히 고양이와 ‘사전편찬자’를 나란히 둔 점이 인상 깊다. 이는 새뮤얼 존슨을 호출하는 장치로, 언어를 정리한 위대한 지성도 결국 고양이를 사랑한 한 인간이었음을 보여준다.
생산성과 속도를 숭배하는 시대에 이 책은 빈둥거림, 함께 있음, 작은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능력이야말로 삶을 지탱한다고 말한다. 책장을 덮고 나면 더 단순하고 다정하게 살아갈 수 있다.(김미향 / 출판평론가·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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