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문화비평가와 출판전문가들의 커뮤니티인 '비평연대'에서는 숏폼 콘텐츠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500자 내외의 '매우 짧은 연대 서평'의 형식을 고안했습니다. 2030세대 지식인 특유의 빛나는 감각으로 제시되는 다양한 책들을 통해 지식의 최전선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편집자주]
■ 연매장 (팡팡 지음, 문현선 옮김, 문학동네, 2025)
오답 노트를 열심히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연매장'은 중국의 토지개혁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주인공 딩쯔타오는 토지개혁 때문에 모든 가족을 잃었다. 기억을 잃은 뒤의 남편인 우자밍 역시 토지개혁으로 인해 가족을 잃었다. 하지만 류진위안 정치위원은 높은 명예를 가진다. 류진위안을 만난 리둥수이는 그의 인정 한 번에 오랜 설움이 녹아내린다.
누군가는 가족을 잃고, 누군가는 영웅으로 칭송받는다. 한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정반대이다.
"진실은, 칭린은 냉소를 지었다, 진실이 어떻게 언어와 글로 표현될 수 있겠니? 세상의 어떤 일도 진정한 진실을 가질 수 없는데."(444p)
이렇듯 사건을 객관적으로 기록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이 소설 역시 토지개혁을 특별히 비판하거나, 특별히 옹호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토지개혁의 묘사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렇게까지 해야 했나?' 라는 의문이 들게 하는 것이다. 동시에 '피해자가 살기 위해 잊은 기억을 끄집어내야 하나?'라는 생각을 끄집어내려 했다.
하지만 작가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따라서 나는 그들이 망각할 수 있다고 본다. 단, 사회 엘리트들은 응당 이 일을 기록해 두어야 한다. 한 사회의 중요 사건을, 시간의 흐름 속에 연매장 해 버릴 수는 없다. 개인은 기억이 필요 없다고 할 수 있으나 역사와 민족에게는 필요하다. 기록의 목적은 역사가 거울이 되어, 향후에 도래할 사회 진보를 위해 참조할 문본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등장인물 룽중융이 말한다.
"누군가는 망각을 선택하고 누군가는 기록을 선택해. 우리는 각자의 선택에 따라 살아가면 되는 거야."(444p)
(황수현 / 칼럼니스트·비평연대)
■ 남아 있는 모든 것(수 블랙 지음, 김소영 옮김, 밤의 책, 2022)
누구나 죽는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어렸을 때는 크게 와닿지 않았다. 그런데 20대 후반이 되고, 집안 어르신들이 한 분씩 세상을 떠나시니 새삼 깨닫게 되었다.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세상을 떠난다는 것을.
죽음은 언제나 인간에게 미지의 영역이다. 극복하려 해도 늦출 뿐이고, 우연과 비극으로 점철되기도 한다. 그리고 빈민이나 부자, 청년이나 노인에게 모두 평등한, 인류 탄생 이래 가장 무서운 존재이기도 하다.
법의학자는 이러한 죽음, 특히 의문에 싸인 죽음의 실체에 한 걸음 다가가는 사람이다. 역설적으로 죽음을 가까이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유난히 죽음을 잘 포착하는 것 같다는 생각은 착각일까. 해부학자이자 법인류학자인 수 블랙은 자신의 일생이나 마주한 죽음에 대한 독특한 기억을 세밀하게 풀어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독자를 하나의 생각으로 이끌 것이다.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어떤 모습으로 마지막을 맞을 것인가. 삶의 영역도 미지이지만, 그보다 더 알 수 없는 죽음의 세계로 어떻게 걸어 들어갈 것인지, 진지하지만 마냥 무겁지 않은 고민을 준다.
역설적으로 이 책을 읽으며 ‘죽음’을 생각하다 보니, 하나의 목적지가 보인다. 죽음이 나를 찾아오기 전에, 그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기쁨과 슬픔은 오직 살아 있을 삶 속에서 느낄 수 있다는 사실. 축복도 비극도 아닌 삶을 살아가며 맺는 수많은 관계와 사건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기억될까. 그 삶을 위해 어떻게 살아갈까.(윤인혁 / 문화예술평론가·문화기획자·비평연대)
■ 내면의 작은 방(정용실 지음, 찌판사, 2026)
서울로 이사 온 후부터, 건강을 위해 달리기를 시작했다. 뛰다 보니 일상의 루틴이 되었고, 꽤 진심이 되어 페이스 경신을 위해 훈련처럼 달렸다. 좋아지는 기록을 볼 때마다 희열을 느끼곤 했다. 그렇게 1년 정도 달렸을까, 무릎 안쪽에 약간의 통증이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엔 멈추는 기간이 아까워 통증을 무시하고 계속 달렸다. 그러다 통증은 더 심해졌고, 결국 가만히 앉아 있어도 무릎이 아픈 지경에 이르러서야 병원에 방문했다. 거의 한 달간 달리기는커녕 계단 오르내리기도 자제해야만 했다. 체력은 버텨주어도, 무릎을 지탱할 근력이 부족했던 것이었다. 나에겐 기록 경신에 대한 집착보다 자기 이해와 돌봄에 기반한 지속이 무엇보다 필요했다.
열정은 꽤 자주 외부의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 된다. 보이지 않던 다음 단계가 보이고, 어느 순간 달성이 목적인 도전이 반복된다. 이런 도전들은 종종 자신을 잊게 하거나 망가뜨린다. 내가 무릎의 안위를 무시하고 달렸던 것처럼 말이다. KBS 아나운서이자 감정연구가인 정용실 작가는 저작 '내면의 작은 방'을 통해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한 이해를 다룬다. 아이를 대하듯 나의 몸을 다루고, 내면의 감정들에 대한 솔직한 탐험을 통해 진정한 자기 이해를 실현할 수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타인의 아픔을 헤아릴 순 있어도, 나에게 충실한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작가는 자신과 주변의 경험, 몸과 마음에 대한 여러 인용을 통해 나에게 충실할 방법에 대해 안내한다. 내가 이 책을 조금만 더 일찍 읽고 몸을 관찰했더라면,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됐었을까?
다시 시작한 달리기는 이전과 꽤 달라졌다. 근력 운동을 병행한다. 조금이라도 시큰거리면 중단하고 걷는다. 페이스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러자 달리는 행위 자체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내가 몰랐던 자세와 호흡에 대해 점검할 수 있게 됐다. 이젠 기록 경신에 대한 희열보다 달리기 자체를 즐기게 됐다. 달리기가 온전히 내 것이 되었다.(설명문 / 건축 및 공간디자이너·문화평론가·비평연대)
■ 어느 멋진 도망(나상천 지음, 오리지널스, 2026)
잠시 멀어져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어느 멋진 도망'은 각기 다른 사연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던 사람들이 산티아고 순례길 위에서 자신만의 속도로 삶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는 이야기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방향을 잃어가는 크리에이터,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뒤 딸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요시라, “대중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번번이 외면받는 싱어송라이터, 그리고 어떤 사건을 뒤로한 채 길 위에 오른 대학생까지. 서로 다른 이유로 길을 선택한 이들은 함께 걷다가도 다시 홀로 걸으며, 각자의 방식으로 순례를 이어간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도망’이라는 단어를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흔히 도망친다는 말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만, 이 책은 오히려 그 시간을 자신을 지키기 위한 잠시의 후퇴이자, 삶을 다시 바라보기 위한 여백처럼 그려낸다. 인물들은 순례길 위에서 끊임없이 흔들리고 갈등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잊고 지냈던 감정과 오래 외면해왔던 마음을 천천히 마주하게 된다. 그 여정을 따라가다보면, 복잡한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살아온 나에게도 어쩌면 이런 '도망'의 시간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끝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느 멋진 도망'은 때로는 잠시 길을 벗어나는 시간이 오히려 나 자신을 다시 발견하게 만드는 과정일 수 있다는 울림을 준다.(강민지 / 문화평론가·프롬레코드대표·비평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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