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문화비평가와 출판전문가들의 커뮤니티인 '비평연대'에서는 숏폼 콘텐츠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500자 내외의 '매우 짧은 연대 서평'의 형식을 고안했습니다. 2030세대 지식인 특유의 빛나는 감각으로 제시되는 다양한 책들을 통해 지식의 최전선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편집자주]
■ 인류학자처럼 생각하는 법(매슈 엥글키 지음, 김재완 박영서 옮김, 오월의봄, 2026)
인문 교양 도서를 즐겨 읽는 독자에게 ‘인류학’은 이제 그리 낯선 학문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인류학자가 쓴 인간에 관한 굵직한 저작이나 특정 사회 현상을 파헤친 기록들을 숱하게 접해왔다. 비록 그것을 ‘인류학’이라고 정확히 의식하며 읽지 않았을지라도, 2026년을 살아가는 독자의 내면에는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인류학적 시선’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이 책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그래서 명확하다. 인류학의 ‘결과물’이 아닌, 세상을 읽어내는 ‘사고방식’ 자체를 다루기 때문이다. ‘인류학자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독자들의 숨은 니즈를 적확하게 짚어낸 셈이다.
가끔 생각하는 것인데, 인류학 책을 읽는 일은 어떤 면에서 문학을 읽는 행위와 결이 무척 닮아 있다. 납작한 상식의 틀을 깨고 ‘타자’를 그들만의 고유한 맥락 속에서 이해하며 상상력의 범위를 넓혀간다는 점은 꽤 비슷한 지적 쾌감을 선사한다. ‘친숙한 것을 낯설게, 낯선 것을 친숙하게’ 바라보려는 인류학적 감수성이 곧 문학의 오랜 관점과 맞닿아 있기 때문일 테다. 혹시 어딘가에 나처럼 평소 소설을 비롯한 문학 위주로 책을 골라잡는 독자가 있다면, 가끔은 인류학 책을 펼쳐보아도 좋겠다. 생각보다 두 세계는 꽤 비슷하면서도, 또 어느 정도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에 기분 좋은 자극이 될 것이다.(맹준혁 / 출판편집자·콘텐츠기획자)
■ 고상하고 천박하게 (김사월, 이훤 저, 열린책들, 2025)
지난달 모 매체에 서평을 실었다. 지독한 짝사랑을 다루는 희곡을 권하며 ‘당신들이 이 책 읽는 동안 나는 남편이랑 데이트하러 갈거지롱’ 뭐 이런 식으로 마무리했다. 인정한다. 서평을 빙자한 과시였다. 하지만 너무 야유하지는 말아달라. 절묘하게도 이런 과시를 주눅 들게 하는 책을 최근에 만났으니.
‘고상하고 천박하게’는 가수 김사월과 시인 이훤의 서간집, 무려 예술 하는 여사친-남사친의 교환 편지 모음집이다(앞 문장은 고상하게 뒤 문장은 천박하게 표현해 봤다). 이토록 우아하고 순도 높은 우정 편지라니. “이게 사랑 아니면 뭔데!” 어떤 친구 관계 앞에서는 이렇게 탄복하게 된다. 연애며 결혼이 뭐 그리 남다른 사랑이라고 약 올린 게 머쓱해질 정도로. 우정은 너무도 저평가된 사랑의 유형이다. 단 한 사람에게 바치는 사랑이 아니라서 그런 걸까? 혹은 이성애, 가족애의 신성성과 정상성이 과하게 높은 고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인 걸까. 김사월과 이훤 사이에 오가는 정확한 찬사와 곡진한 이해를 좇다 보면 우정의 격을 공손히 제자리에 올려놓게 된다.
이 책을 읽을 때는 메모지를 옆에 놓아도 좋겠다. 떠오르는 친구가 있다면 재빨리 적고, 하루가 가기 전에 사실 너를 무진장 좋아해 왔다 고백해 보는 것이다. 이 서간문은 독자를 좀 취하게 하고, 취기는 곧 용기와 같으니까. 해보자. 대부분의 사랑은 말과 글로 꺼내기 전까지 그게 얼마나 깊고 큰지 모른다. 우정도 예외는 아니다.(유희선 / 출판마케터, 비평연대)
■ 여름은 사랑의 천사 (최백규, 문학동네, 2025)
시집 ‘여름은 사랑의 천사’ 속 여름은 축제처럼 눈부시며 춤과 웃음이 영원히 존재할 것만 같은 계절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폭죽이 모두 터진 뒤의 적막과, 끝끝내 불발된 몇몇의 공허까지 온전히 견뎌내야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시인은 이처럼 사랑이 지닌 양가성을 여름이라는 생동의 계절로 은유한다. 화자에게 사랑이란 “너와 함께 있으면 내 삶이 다 망쳐질 것 같다는 예감”(‘사랑은 여름의 천사’)을 불러일으키면서도 바로 그 파멸의 예감이 ‘너를 사랑하는 이유’가 되는 모순을 품고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대상은 “너”를 넘어 화자의 삶 전반으로 번진다. 죽고 싶지 않아서 삶을 끌어안는 화자의 집에는 “쓰다 만 이력서와 마이너스 통장들”(‘영원한 침묵’)이 쌓여 있고, 결국 살아간다는 건 “손발에 상처를 입고 병들어”(‘꽃나무’) 가는 일과 다르지 않다.
사랑하는 동안 무너지고 깨지고 부르트는 화자의 모습을 여름으로 대변한 이 시집은 어째서 여름이 사랑의 천사일 수밖에 없는지를 보여준다. 여름은 마치 사랑의 천사처럼 한순간 화살로 가슴을 꿰뚫어 마음을 들끓게 하면서도, 결코 지우지 못할 상흔을 남기는 계절이기 때문이다.(김도경 / 출판편집자, 비평연대)
■ 헤르만 헤세의 책이라는 세계 (헤르만 헤세 지음, 김지선 옮김, 뜨인돌, 2022)
‘헤르만 헤세의 책이라는 세계’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깊은 공감을, 읽기의 중심을 잃은 사람에게는 따끔한 죽비를 내리치는 독서 에세이다. 특히 요즘처럼 책을 읽고 싶어도 무엇부터 읽어야 할지 몰라 독서를 미루는 사람에게 더욱 유용하다.
이 책에서 헤세는 많이 읽는 것보다 제대로 읽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유행이나 추천 목록에 휩쓸리기보다 자기에게 맞는 책을 천천히 발견해가는 것이야말로 진짜 독서의 기쁨이라는 것이다. 그는 독자들에게 친구를 사귀듯 신중하게 책을 고르고, 자신만의 도서관을 만들어가기를 권한다. 책을 많이 읽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 권을 읽더라도 깊이 읽는 일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헤세는 독서를 삶을 비켜 가는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삶을 더 단단히 붙드는 행위로 바라본다. 그래서 책은 삶의 도피처가 아니라 삶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는 힘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이 독서론인 동시에 삶의 태도에 관한 책처럼 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고전을 향한 경외, 장서에 대한 성찰, 비평을 둘러싼 태도, 재독의 기쁨까지 두루 아우르는 이 책은 결국 책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묻게 한다. 유행과 속도에 휩쓸린 독서가 아니라, 몇 권이라도 깊이 읽고 오래 곁에 두는 독서의 가치를 강조하는 대목들이 특히 오래 남는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한 독서 예찬을 넘어, 책과 다시 친해지는 방법을 알려주는 안내서처럼 읽힌다. 빠르게 ‘소비’하고, 경쟁하듯 읽은 권수를 ‘전시’하는 독서에 익숙한 시대일수록 더욱 천천히 곁에 두고 싶은 책이다.(김미향 / 출판평론가·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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