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문화비평가와 출판전문가들의 커뮤니티인 '비평연대'에서는 숏폼 콘텐츠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500자 내외의 '매우 짧은 연대 서평'의 형식을 고안했습니다. 2030세대 지식인 특유의 빛나는 감각으로 제시되는 다양한 책들을 통해 지식의 최전선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편집자주]
■ 국가 (플라톤 지음, 강성훈, 김주일, 김혜경, 정준영 옮김, 아카넷, 2025)
정말 오랜만에 벽돌 책을 샀다. 책은 어제 도착해서 당연히 다 읽진 못했다. 이 책만큼은 표지만 보고 믿고 추천할 수 있을 것 같다. 후루룩 넘겨본 첫인상만으로도 이전에 읽었던 다른 출판사의 판본보다 확실히 술술 읽히는 느낌이다. 대학 시절 내내 정암학당이 다른 플라톤 저작은 꾸준히 내면서 유독 '국가'만 출간하지 않아 늘 의아했는데, 드디어 마주하게 되어 반갑다.
'국가'는 학부 시절 수업 교재로 처음 읽었다. 그때도 지금도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플라톤의 논리보다 트라쉬마코스가 던진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말이었다. '정의가 강자의 이익이어야 한다'가 아니라, '정의란 강자의 이익일 수밖에 없다'라고 읽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짬을 내어 야금야금 읽을 수밖에 없는 바쁜 일상이지만, 오랜만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다. 단숨에 푹 빠져 읽어내려갈 시간이 부족하다는 게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맹준혁 / 출판편집자·콘텐츠기획자)
■ 차별하는 데이터 : 상관관계, 이웃, 새로운 인식의 정치 (웬디 희경 전, 김지훈 옮김, 워크룸프레스, 2026)
시 쓰기를 처음 배웠을 때 가장 놀랐던 것은 시는 은유와 함의로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 시공간을 짓는 일이라는 점 이었다. 시인의 말과 단어는 세밀한 볼트와 스크류, 합판과 알루미늄처럼 기능한다.
산문 시인으로 처음 알려진 오션 브엉의 첫 장편 소설은 그 점에서 소설보다는 시에 가깝다. 혼자가 된 소년이 도망쳐온 가상의 도시는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그 안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꾸리며 만나는 인물 역시 그렇다. 마약중독으로 애인을 잃고 엄마한테 의대를 입학했다며 거짓말하고 가상 도시 글래드니스의 재활 시설로 들어온 ’하이‘는 철교에서 뛰어내리려는 순간 그를 발견하고 소리친 노인 ’그라지나‘를 만난다. 라트비아가 고향인, 스탈린과 나치 시대로 종종 회귀하는 치매 노인 그라지나와 이제 막 재활시설을 나온 베트남계 소년 하이는 파괴된 삶의 터전의 공백에 새로운 터전을 만든다.
소설은 하이가 동네의 체인 음식점에서 일을 하는 장면, 치매에 걸린 그라지나와 전쟁 놀이를 하는 일상적 장면 묘사에 공을 많이 들인다. 세상이 이미 잊어버린 흉터를 몸에 새긴 이들의 일상은 길고 정성스러운 묘사에 의해 실존하는 상처로 형상화된다. 나열된 단어들은 허공을 떠도는 대신 그 인식의 시간속 구조를 만들어준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한번만 사는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잊혀지고 소외된 상처의 연결을 통해 집단의 기억으로 남는 가능성을, 그래서 비로소 하나의 온전한 삶으로 보존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어낸다.(이수련 / 비평연대)
■ 스모크 (존 버거 지음, 셀출 데미렐 그림, 김현우 옮김, 열화당, 김익한 외 지음, 다산북스, 2023)
'스모크'는 연기라는 아주 작은 현상에서 출발해 인간의 시간과 기억, 사라짐의 감각을 천천히 더듬어 가는 책이다. 글을 쓴 존 버거는 눈앞에서 형태를 만들었다가 곧 흩어지는 '연기'를 '삶'의 은유로 바라본다. 연기는 잠시 존재하지만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 짧은 순간에 만들어지는 곡선과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붙잡으려 하지만 결국 손에서 빠져나가는 시간의 결을 떠올리게 된다.
버거의 문장은 과장이 없다. 오히려 조용히 생각을 밀어 올린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의 몸짓, 연기가 천천히 공기 속으로 스며드는 장면을 써 내려가며, 그는 삶의 순간들이 어떻게 기억되는지를 묻는다. 연기는 곧 사라지지만, 그 순간을 바라보던 사람의 생각은 오래 남는다.
특히 눈여겨볼 만한 건 셀축 데미렐의 그림이다. 존 버거의 글과 셀축 데미렐의 그림은 서로를 설명하기보다 서로의 여백을 넓힌다. 독자는 그 사이에서 자신의 기억과 생각을 겹쳐 보며 연기를 통한 세계사 산책을 즐기게 된다.
그렇기에 '스모크'는 빠르게 읽을 수 있지만 빠르게 읽지 않아야 하는 책이다. 잠깐 피어올랐다가 사라지는 연기처럼, 이 책의 장면들도 읽는 순간에는 가볍게 지나가지만 어느 순간 다시 떠오를 테다.(김미향 / 출판평론가·에세이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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