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자체가 한국 연극의 역사“...90세 신구, 연극 '불란서 금고'서 건재함 과시
"무대 자체가 한국 연극의 역사“...90세 신구, 연극 '불란서 금고'서 건재함 과시
  •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승인 2026.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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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헌의 문화와 사람]
- 장진 작, 연출, '불란서 금고 : 북벽에 오를 자 누구더냐'
- 신구, 금고털이 역 맡아...선지자 같은 메시지 전달로 관객 기립 박수 받아
(사진 왼쪽부터) 연극 '불란서 금고'를 연출한 장진 감독, 정중헌 노경식 박정자 주호성 감아라 신구 배우

인터뷰365 정중헌 기획자문위원 = 파크컴퍼니(대표 박정미)가 제작한 장진 작, 연출의 '불란서 금고'를 4월 1일 대학로 서경대 공연예술센터 1관에서 원로 연극인들과 함께 관람했다.

한국 연극계 최고령이자 대학로연극인광장 회원인 신구 배우의 출연을 축하하기 위해 노경식 대연장 회장과 정중헌 주호성 부회장, 같은 날 초대 받은 박정자 대배우와 김아라 국제극예술협회(ITI) 한국본부 회장 등 5명이 회동한 것이다.

90세를 맞은 신구 배우는 거동이 좀 불편했으나 무대에서는 건재했다.

등퇴장이 거의 없는 100분 무대에서 전설적인 금고털이 맹인 역(한쪽 손도 의수)을 맡은 그는 대사 한마디 놓침이 없이 호흡, 감정, 동선을 여유 있게 해내며 자신의 캐릭터를 해냈다.

연극 ‘불란서 금고’ 공연 장면./사진=장차, 파크컴퍼니

필자는 최근 몇 년간 신구 배우의 무대를 지켜봐 왔다.

'라스트 세션' 중 건강에 문제가 좀 있었으나 회복 후 '두 교황'과 '넓은 하늘에 무지개를 보면 내 마음은 춤춘다'에 이어 박근형 배우와 호흡을 맞춘 '고도를 기다리며' 장기 공연까지 쉴 틈 없이 무대에 서 온 것이다. 특히 젊은이들도 벅차할 대사량을 소화해 내 시니어임에도 스타 버금가는 독자적인 관객층을 형성하고 있는 대배우다.

특히 장진 작가의 이번 코미디 무대에서 신구 배우는 금고털이 중 한 명이지만 작품의 주제를 전하는 선지자 같은 묵직한 캐릭터로 주목을 모았다. 헛된 욕망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에게 그 허망함을 북벽 우화로 일깨우는 달관자 역할이었다.

극 초반에 신구 배우는 “북벽장춘(北壁長春)...”을 독백하듯 육성으로 들려주었다.

북벽은 인간이 이루고 싶은 최고의 욕망이고, 장춘은 북벽을 넘었을 때의 긴 봄 같은 행복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은행 지하의 대형 불란서제(製) 금고를 털러 온 교수(장현성), 밀수(정영주), 건달(최영준), 은행 직원(금새록) 등 4명과 관객에게 들으라는 듯 맹인은 북벽장춘을 읇조렸다.

“누가 저 높은 욕망의 북벽을 오르는 영광을 차지하고 북벽 너머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을 맞을 것인가?”

마치 인생을 달관한 듯한 원로 신구 배우의 북벽장춘 대사 장면은 그 자체로 레전드 같아서 감동스럽고 신비스러웠다.

이 역할을 다른 배우도 할 수 있겠지만 신구 배우만큼 무게를 실어 절절하게 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먹먹했다.

연극 ‘불란서 금고’에서 배우 신구./사진=정중헌

'불란서 금고'는 이미 영화와 매체에서 코미디로 정평이 나 있는 장진 감독의 신작이다.

필자는 그의 전작 '꽃의 비밀'을 보며 재미와 스릴을 느꼈다. 등장인물 이름이나 장소가 외국어여서 번역극인 줄 알았는데 장진의 대표적 창작 코미디로 정착한 스테디셀러였다.

'불란서 금고'는 웃음 코드 못지않게 유명 배우 캐스팅으로 화제가 되고 있지만 관객을 끄는 핵심은 장진의 극작술 및 연출력이라고 본다.

서두의 북벽장춘이 암시하듯 서로를 알지 못하고 다섯 명이 각자의 욕망을 가슴에 품은 채 금고를 털기 위해 한자리에 모인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서로의 믿음에 균열이 생기고, 천신만고 끝에 금고를 열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이 금고에 있었을까?”

코미디로 전개하기에는 다소 무거운 주제일 수도 있으나 장진 특유의 언어적 재치와 리듬감, 배우들의 앙상블에 의한 스릴 연기와 유머로 관객을 몰입시켰다.

북벽 너머(금고 속)에 뭔가 있을 것 같은 막연한 욕망과 환상, 결국 아무것도 아무도 승자가 되지 못하는 허무와 공허를 극대화한 블랙코미디라고 할 수 있다.

연극 ‘불란서 금고’ 커튼콜 무대에 오른 배우들./사진=정중헌

6명의 캐릭터를 인기 배우들이 감칠맛 나게 해내면서 앙상블에 의한 시너지로 재미를 더하는 것이 이 연극의 매력이다.

금고털이 기술자 역 신구는 외팔이 맹인으로 금고 속 톱니바퀴가 맞아떨어지는 금속음을 즐기는 노인 역을 능청스레 해냈다.

교수 역의 장한성 배우는 논리와 원칙을 내세우나 먹혀들지 않지만 노련함으로 캐릭터를 살렸다. 그림의 진위를 확인하려는 밀수 역의 정영주 배우는 현실주의자답게 매사를 거침없이 몰아세우는 박력의 연기를 보였다. 건달 역의 최영준 배우는 무대에서는 처음 접했는데 생각보다는 말과 행동이 앞서는 본능적인 연기를 좌충우돌식으로 젊고 실감 나게 해내 극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은행 직원 역의 금새록 배우는 은행 구조를 잘 아는 캐릭터인데 왜 금고털이에 가담했는지 미스터리한 성격 연기를 매체에서의 인기 못지않게 발랄한 연기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라스트에 의외의 인물 그리고가 등장하는 것도 웃음의 한 수였다. 경비원 역할인데 신고할 생각보다 욕망에 눈먼 이들을 가지고 놀려고 하는 역할을 안두호 배우가 걸쭉하게 해냈다.

연극 ‘불란서 금고’ 커튼콜 무대에 오른 배우들./사진=정중헌

신구 배우의 존재감은 라스트에서 더 강렬하게 드러났다.

‘북벽장춘’을 다시 뇌이는데 이번에는 육성이 아닌 녹음된 음성으로 들려주어 관객들에게 진한 울림과 여운을 안겨주었다.

뭔가 있을 것 같고 잡힐 것 같았던 북벽 너머에는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를, 환상을 깨는 공허를 안겨주는, 양심의 메아리 같고 운명의 심판자 같은 묵직한 메시지로 웃음의 서늘한 뒷끝을 보여준 것이다.

인간이 도달하기 어려운 한계인 북벽을 넘보지 말고 지금 주어진 환경에 자족하며 살라는 것이 희극 같았던 '불란서 금고'의 뼈아픈 교훈으로 다가왔다.

만석의 관객들은 배우들의 재치 있는 대사와 호흡이 맞는 연기에 웃으며 연극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커튼콜에서 출연 배우들은 대선배 신구 배우게 존경을 표했고,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연극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준 노배우에게 기립 박수로 예우했다.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공연을 마치고 일행은 분장실을 찾아 신구 배우와 기념사진을 찍은 후 극장 인근 식당에서 맥주를 곁들인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눴다.

정중헌

인터뷰 365 기획자문위원. 극단생활 대표. 조선일보 문화부장,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한국방송비평회」회장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서울예술대학 부총장, 한국생활연극협회 이사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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