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하영 365칼럼] ‘고슴도치의 딜레마’ 속 두 사람...연극 '비기닝'
[주하영 365칼럼] ‘고슴도치의 딜레마’ 속 두 사람...연극 '비기닝'
  • 주하영
  • 승인 2025.03.3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앨리스 박사의 문화로 보는 세상풍경]
- 영국 극작가 데이비드 엘드리지의 2인극 3부작 시리즈 중 첫 번째 작품
- 2017년 영국 국립극장 도프먼 시어터 초연 전석 매진 & 2018년 런던 웨스트엔드 화제작
연극 '비기닝' 공연 장면. 불안과 고독에서 헤어나고 싶지만 '로라(김윤지)'에게 선뜻 다가갈 수 없는 '대니(윤현민)'는 자신이 부족한 상대임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연극 '비기닝' 공연 장면. 불안과 고독에서 헤어나고 싶지만 '로라(김윤지)'에게 선뜻 다가갈 수 없는 '대니(윤현민)'는 자신이 부족한 상대임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사진=수컴퍼니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사람은 누구나 친밀한 관계를 원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바라봐 주고, 지지해 주며,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누군가와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픈 마음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이다. 하지만 그토록 누구나 원하는 다른 사람의 존중과 사랑, 공감, 이해, 그리고 진정한 소통은 현재 사회에서 가장 얻기 힘든 것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저명한 법학자 마르셀라 이아쿱은 2016년에 출간한 책 '커플의 종말'에서, “프랑스인들은 끔찍하게 외롭다”면서 “모든 선진국이 고독 전염병에 걸려 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가족, 직장, 친구, 사회단체, 이웃이라는 다섯 가지 사회관계망 내에서”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외로운 사람들의 숫자를 급속도로 늘려나가는 현재 사회의 고독한 상태에 대해, “관계가 존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관계의 질이 형편없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연극 '비기닝' 공연 장면. 7살이 된 딸을 4년째 만나지 못하고 SNS를 통해 지켜보는 '대니(윤현민)'는 극도의 외로움과 절망,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다.
연극 '비기닝' 공연 장면. 7살이 된 딸을 4년째 만나지 못하고 SNS를 통해 지켜보는 '대니(윤현민)'는 극도의 외로움과 절망,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다./사진=수컴퍼니

국가의 개입, 사회관계를 분열시키는 체제가 “고독을 늘렸을 뿐 아니라 투쟁할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탄생시켰다”고 말하는 '커플의 종말'을 번역한 이정은은, 프랑스의 현실을 설명하는 “미혼과 비혼, 이혼율 증가, 저출산”과 같은 단어들이 한국 사회에서도 자주 듣게 되는 말임을 언급했다.

이정은은 '번역자의 글'에서 한국의 경우, 2005년부터 2015년까지 40~50대 1인 가구 증가 추세가 두드러지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한국 역시 “사회경제적 환경의 변화에 휩쓸려 자의든, 타의든 ‘혼자의 삶’에 빠져드는 인구로 빠르게 편입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최근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는 혼자의 삶에서 벗어나 ‘커플’이 되는 어려움과 두려움, ‘커플’이 되는 것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드는 연극 '비기닝'의 짧은 2주간의 공연이 막을 내렸다.

연극 '비기닝' 메인 포스터 컷. 영국 극작가 데이비드 엘드리지(David Eldridge)의 연극 '비기닝(Beginning)'은 ‘커플’을 중심으로 관계와 외로움, 사랑, 소통, 연결이라는 주제를 파고드는 3부작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다.
연극 '비기닝' 메인 포스터 컷. 영국 극작가 데이비드 엘드리지(David Eldridge)의 연극 '비기닝(Beginning)'은 ‘커플’을 중심으로 관계와 외로움, 사랑, 소통, 연결이라는 주제를 파고드는 3부작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다./사진=수컴퍼니

지난 25년간 영국 내에서 매우 활발하게 다작을 선보이며 두각을 드러낸 극작가로 평가받는 데이비드 엘드리지(David Eldridge)의 연극 '비기닝(Beginning)'은 ‘커플’을 중심으로 관계와 외로움, 사랑, 소통, 연결이라는 주제를 파고드는 3부작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다.

2017년 영국 국립극장(NT) 도프먼 시어터 초연 당시 ‘전석 매진’으로 관객과 평단의 호응을 얻은 '비기닝'은 이듬해인 2018년 런던 웨스트엔드로 무대를 옮겨 또다시 큰 인기를 누렸다.

집들이 파티에서 처음 만난 남녀가 서로의 마음에 품고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넘어서서 새로운 ‘관계’의 시작, 즉 ‘비기닝(beginning)’이 될지도 모를 시도에 나서는 결말을 갖고 있는 연극 '비기닝'은 상당히 심플한 플롯과 구조를 갖고 있음에도, 현실의 남녀 모습을 매우 자연주의적으로 리얼하게 그렸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런던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꼽히는 크라우치 엔드(Crouch End)의 아파트로 새로 이사한 ‘로라(Laura)’는 자신의 집들이 파티에 온 ‘대니(Danny)’와 처음 마주한다.

연극 '비기닝' 캐스팅 콘셉트 컷. 런던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꼽히는 크라우치 엔드의 아파트로 새로 이사한 ‘로라(김윤지)’는 집들이 파티를 연다.
연극 '비기닝' 캐스팅 콘셉트 컷. 런던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으로 꼽히는 크라우치 엔드의 아파트로 새로 이사한 ‘로라(김윤지)’는 집들이 파티를 연다./사진=수컴퍼니

친구에게 이끌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집들이 파티에 온 대니는 저녁 내내 로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시끌벅적한 파티가 끝나고 모두들 돌아간 늦은 밤에 유일하게 남은 대니와 마주 선 로라는 서로에게 끌리는 마음과 원하는 바, 두려움과 망설임 사이에서 각자 마음의 줄다리기를 시작한다.

엘드리지는 영화였다면 흔한 로맨틱 코미디의 해피엔딩 결말을 맞게 될 플롯이지만, ‘연극’이라는 매개체의 장점을 활용해 실제 삶 속에 발생하는 현실적인 남녀의 이야기를 무대에 구현한다. 영화에서는 서로에게 감정을 느끼는 남녀가 쉽게 키스에 이르지만, 실제 삶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엘드리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순간을 놓친다”고 강조한다.

평범한 사람들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순간을 놓칠 뿐 아니라, 지나간 그 순간을 되돌려 상상하며 다시 포착하고 싶어 한다는 점은, “두 인물이 서로에게 다가갈 용기를 가질 수 있을지, 서로에게 키스를 할 수 있을지를 관객이 지켜보는 하나의 장면”에 국한된 극을 쓰도록 만들었다.

“연극은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경험”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엘드리지는, 처음 만난 남녀가 서로의 진심을 탐색하고 불안과 초조, 긴장을 누르면서 숨겨진 내면의 진실에 접근하려는 시도를 하는 90분의 시간이 “스릴 넘치는 현재 시제를 공유하는” 살아있는 느낌을 부여한다고 덧붙인다.

연극 '비기닝' 캐스팅 콘셉트 컷. 친구에게 이끌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집들이 파티에 온 '대니(윤현민)'는 저녁 내내 로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연극 '비기닝' 캐스팅 콘셉트 컷. 친구에게 이끌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집들이 파티에 온 '대니(윤현민)'는 저녁 내내 로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사진=수컴퍼니

연극 '비기닝'은 엘드리지가 10년이 훨씬 넘는 기간 동안 간직하고 있던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가 출발점이 되었다. 2015년에 작업 스케줄이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으면서 갑자기 공백기를 갖게 된 엘드리지는 오랫동안 염두에 두었지만, 실현하지 못했던 “아주 보통 사람의 정말 리얼한 관계의 장면”을 세밀하게 포착하는 “자연주의 연극”을 위한 집필에 나선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를 바라보고 서 있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매우 실질적이고 사실적인 이야기는 작가인 자신의 경험과 주변인들의 에피소드, 10여 년이 지나면서 사회의 변화와 함께 인식하게 된 사유들, 상상을 통해 가정한 것들이 얽히면서 30대 후반, 40대 초반의 캐릭터가 완성되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의 핵심은 취약함을 허락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엘드리지는 세월 속에서 겪어온 감정적인 상처가 남아있고, 관계 맺음에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점점 많아지며, 취약함이 더해지는 인물들을 통해 “관객들이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지기를 바란다.

따라서 연극 '비기닝'은 처음 시작을 주저하는 주인공들답게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른 숨겨진 의도와 과거의 상처, 그리고 비밀스러운 소망과 바람들이 껍질을 벗기듯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며, ‘관계’의 긴장감과 흥미를 촉발하는 특징이 있다.

연극 '비기닝' 공연 장면. '로라(김윤지)'는 보다 가깝게 다가설 수 있는 관계의 '시작'의 순간을 당혹스러워하며 피하려 애쓰는 '대니(윤현민)'가 따뜻한 사람이라고 느낀다.
연극 '비기닝' 공연 장면. '로라(김윤지)'는 보다 가깝게 다가설 수 있는 관계의 '시작'의 순간을 당혹스러워하며 피하려 애쓰는 '대니(윤현민)'가 따뜻한 사람이라고 느낀다./사진=수컴퍼니

로라와 대니가 서로에게 관심이 있음을 처음부터 아는 관객들은 적극적으로 밤을 함께 보내자고 말하는 ‘로라’와 주저하며 로라를 밀어내는 듯 보이면서도 그녀를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대니’의 결말이 무엇이 될 것인지 궁금해하며, 막이 내리는 순간까지 두 사람이 어떤 인물들인지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남녀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감정의 기류를 알아채는 ‘레이더’가 없다고 말하는 대니는 어떤 면에서는 데이트 앱이 그런 부분들을 ‘알림’으로 대체해 주고, 비슷한 경제적 수준이나 이혼 여부, 직업, 원하는 바를 정한 범위 내에서 선택할 수 있게 해주기에, 누군가를 만나는 데 필요한 위험 부담을 낮춰준다고 생각한다.

20대에 런던에 첫 아파트를 장만했고, 회사 CEO로 성장해 누구나 살고 싶어 하는 동네에 세 번째 집을 산 로라는 “적어도 상대방의 호감 정도는 눈을 보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연극 '비기닝' 공연 장면. '로라(김윤지)'는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으며 남들이 부러워하는 지역에 세번째 집을 장만했지만, 내면적으로는 공허함과 초라함을 느낀다고 '대니(윤현민)'에게 말한다.
연극 '비기닝' 공연 장면. '로라(김윤지)'는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으며 남들이 부러워하는 지역에 세번째 집을 장만했지만, 내면적으로는 공허함과 초라함을 느낀다고 '대니(윤현민)'에게 말한다./사진=수컴퍼니

대니는 모든 것을 갖춘 듯 보이는 로라가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좋기도 하지만, 두렵기도 하다. 대니는 이혼남으로 7살이 된 딸을 4년째 만나지도 못한 채 SNS로만 들여다보면서, 엄마와 할머니가 살고 있는 집으로 들어와 양육비를 보내는 것도 빠듯한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이 로라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낀다.

로라는 자유분방한 자신과는 달리 캐주얼한 섹스에 대해 엄격한 원칙을 갖고 있고, 어색한 순간을 피하기 위해 어질러진 집을 치워주겠다면서 종량제 쓰레기봉투를 찾거나,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는 대니가 답답하면서도 따뜻한 사람이라고 느낀다.

로라는 화려하게 보이는 성공한 싱글 라이프를 친구들이 부러워하지만, 사실은 평범한 남편과 아이들이 함께 하는 가족을 이루고 싶고, 늙어서도 두 손을 꼭 잡고 걸으며 서로를 향해 웃을 수 있는 다정한 부부를 꿈꾸는 소망을 드러낸다.

대니와 함께 보내게 될 밤이 자신에게 아이를 갖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는 로라는 사랑을 확신할 수는 없지만,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이만이라도 키우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낸다.

연극 '비기닝' 공연 장면. '로라(유선)'는 '대니(이종혁)'와 함께 보내게 될 밤이 자신에게 아이를 갖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한다.
연극 '비기닝' 공연 장면. '로라(유선)'는 '대니(이종혁)'와 함께 보내게 될 밤이 자신에게 아이를 갖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한다./사진=수컴퍼니

한편, 불행한 결혼생활보다 더 끔찍한 것은 없다고 느껴서 이혼했지만, 극단의 고독과 절망 속에서 그냥 선로에 뛰어들어 버릴까 망설이는 지점까지 이른 대니는, 볼 수 없는 또 다른 아이를 갖게 될지 모를 관계의 시작에 무작정 뛰어들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를 드러낸다.

대니는 로라에게 모든 순간 아이 아빠로서의 자신의 자리를 지켜줄 수 있냐고 묻지만, 로라는 두 사람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확실함 속에서 확답할 수 없다고 솔직하게 대답한다.

발생할지 아닐지도 모를 일들을 놓고 서로 밀고 당기며, 때로는 와플 취향이나 좋아하는 축구팀에서나마 공통점을 찾으려는 두 사람은, 각자 나름의 이유로 자신만의 ‘고독함과 외로움’을 간직한 채 관계의 뜨거움 속으로 뛰어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인다.

연극 '비기닝' 공연 장면. '대니(이종혁)'는 불행한 결혼생활보다 더 끔찍한 것은 없다고 느껴서 이혼했지만, 고독과 절망 속에서 그냥 선로에 뛰어들어 버릴까 생각하는 지점에 이른다.
연극 '비기닝' 공연 장면. '대니(이종혁)'는 불행한 결혼생활보다 더 끔찍한 것은 없다고 느껴서 이혼했지만, 고독과 절망 속에서 그냥 선로에 뛰어들어 버릴까 생각하는 지점에 이른다./사진=수컴퍼니

한 사람은 상대에게 자신이 부족한 인물임을 끝없이 드러내면서 상대의 마음을 테스트하고, 다른 한 사람은 왜 스스로를 계속 비하하고 낮추는 거냐면서 상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와 주기를 기대하는 탐색전은,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고슴도치의 딜레마’를 떠올리도록 만든다.

추운 겨울날 서로의 온기를 위해 모여든 고슴도치들은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가시로 인해 가까이할 수 없는 현실을 인식한다. 따뜻함을 위해서는 서로의 가시에 찔리는 고통을 감수해야 하고, 가시로 인한 고통에서 멀어지기 위해서는 추위를 선택해야 하는 고슴도치의 딜레마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서로에게 적절한 거리를 인지하고 추위와 통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아야만 하는 ‘관계’의 어려움을 빗대는 우화로 자주 언급되어 왔다.

엘드리지는 서로의 가시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얼마만큼의 따가운 고통을 서로가 참을 수 있는지 가늠할 수 없는 두 마리의 고슴도치가 서로에게 다가서기 위해서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점을 드러낸다.

연극 '비기닝' 공연 장면. '로라(유선)'는 화려하게 보이는 성공한 싱글 라이프가 아닌, 평범한 가족과 함께 하는 삶을 소망으로 품고 있다.
연극 '비기닝' 공연 장면. '로라(유선)'는 화려하게 보이는 성공한 싱글 라이프가 아닌, 평범한 가족과 함께 하는 삶을 소망으로 품고 있다./사진=수컴퍼니

국내 공연의 경우, 고슴도치와 관련한 대사는 언급되지 않지만, 원작에서는 극 초반에 아주 짧은 대사로 언급되며 주제를 암시하는 특징이 있다. 게다가 극본의 서두에 붙인 에피그라프(epigraph)는 주제의식을 강화한다. 엘드리지는 영국 소설가 조지프 콘래드(Joseph Conrad)의 1911년 소설 '서구인의 눈으로'(원제: Under Western Eyes)와 독일의 극작가이자 배우, 영화감독인 프란츠 크사버 크뢰츠(Franz Xaver Kroetz)의 1976년 희곡 '나뭇잎 사이로'(원제: Through the Leaves)의 문장들을 인용한다.

“진정한 외로움이란 적나라하게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공포”이며, “외로운 사람들은 가면을 쓰고 있다”는 콘라드의 문장은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를 기대하는 환영 자체가 사람을 더욱 외롭고 비참하게 만들 수 있다는 또 다른 문장으로 이어진다.

또, 서로 상호작용하고 공감할 수 없는 관계의 고통에 관한 크뢰츠의 희곡에서 작가는 방어적인 인물들의 고립과 소외가 사회적 환경의 소산이자 결과물임을 강조하는데, 실제로 엘드리지는 '나뭇잎 사이로'의 인물들이 연극 '비기닝' 집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음을 피력한다.

연극 '비기닝' 캐스팅 콘셉트 컷. 시끌벅적한 파티가 끝나고 모두들 돌아간 늦은 밤에 '로라(유선)'는 유일하게 남은 대니와 마주선다.
연극 '비기닝' 캐스팅 콘셉트 컷. 시끌벅적한 파티가 끝나고 모두들 돌아간 늦은 밤에 '로라(유선)'는 유일하게 남은 대니와 마주선다./사진=수컴퍼니

국내 공연의 경우, 문화적 차이와 2015년으로 설정된 극 배경의 현재로의 이동 등으로 인해 세세한 부분에 변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내 관객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한 적절한 선택으로 판단되는데, 주제적인 질문의 제기는 그대로 둔 채, 관객이 감정적으로 보다 공감할 수 있도록 상황을 수정한 부분들이 존재한다. 대니가 이혼하게 된 이유를 다르게 설정한다든가, 로라가 아이를 잃게 된 이유를 변경하는 등 여러 부분에서 출간된 원작 텍스트와는 차이를 보인다.

엘드리지는 '비기닝'의 맨체스터 공연 당시 유튜브 인터뷰를 통해, 다른 도시나 나라에서 해당 관객들이 실제 삶으로 느낄 수 있도록 인물을 드러내는 대사들이 소소하게 바뀌는 것에 관해 환영하는 의견을 드러낸 적이 있다.

연극 '비기닝' 캐스팅 콘셉트 컷. 예상치 못한 곳에서 눈을 뗄 수 없는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힌 '대니(이종혁)'는 두려움과 망설임 사이에서 갈등과 혼란을 겪는다.
연극 '비기닝' 캐스팅 콘셉트 컷. 예상치 못한 곳에서 눈을 뗄 수 없는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힌 '대니(이종혁)'는 두려움과 망설임 사이에서 갈등과 혼란을 겪는다./사진=수컴퍼니

연극 '비기닝'이 처음부터 3부작을 염두에 둔 선택이었는지를 묻는 '옵저버(The Observer)'와의 인터뷰에서, 엘드리지는 세 번째 시사회를 보다가 갑자기 10살 정도 나이가 더 많고 관계의 기로에 놓인 커플을 주인공으로 속편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설명한다.

더불어 두 커플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될 '엔드(End)'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세 번째 극에 대한 아이디어가 없었다면, 두 번째 작품인 '미들(Middle)'을 집필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그는 세 작품이 같은 캐릭터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세 커플을 통해서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것의 의미와 외로움”을 고찰하고, ‘부부 혹은 연인으로서의 관계가 갖는 진실은 무엇인지, 두 사람의 관계가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는지’에 대해 관객이 생각해 보기를 바랐음을 피력한다.

연극 '비기닝' 공연 장면. '대니(이종혁)'는 '로라(유선)'에게 모든 순간 아이 아빠로서의 자신의 자리를 지켜줄 수 있냐고 묻지만, 로라는 확답할 수 없다고 솔직하게 대답한다.
연극 '비기닝' 공연 장면. '대니(이종혁)'는 '로라(유선)'에게 모든 순간 아이 아빠로서의 자신의 자리를 지켜줄 수 있냐고 묻지만, 로라는 확답할 수 없다고 솔직하게 대답한다./사진=수컴퍼니

연극 '비기닝'은 로라와 대니가 과연 커플로 발전할 수 있을지 여전히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막을 내린다. 관계의 시작을 ‘시작’하기 위한 분투와 노력,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머뭇거림과 체념의 벽, 그리고 적극적인 용기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두 사람의 모습은 현실에서 누구나 어느 순간 즈음 경험했던 혼란이자 어려움이기도 하다.

“동전 던지기”를 하듯 인생을 놓고 과감한 시도를 하려다가도 상대의 가시가 날카롭게 찌를 것이 두려워져 곧바로 움츠러드는 평범한 사람들이 느끼는 ‘관계’를 둘러싼 감정적 불안은 연극 '비기닝'의 핵심이다.

사람과 관계의 가치를 탐구하는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브룩스는 “사람을 안다는 것은 늘 취약한 명제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내밀한 진실은 상대에게 지나치게 강렬하거나 공격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고,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심리적 공간을 지키고 싶어 한다.

연극 '비기닝' 공연 장면. 발생할지 아닐지도 모를 일들을 놓고 서로 밀고 당기는 '대니(이종혁)'와 '로라(유선)'는 각자의 이유로 관계의 뜨거움 속으로 뛰어들지 못하고 망설인다.
연극 '비기닝' 공연 장면. 발생할지 아닐지도 모를 일들을 놓고 서로 밀고 당기는 '대니(이종혁)'와 '로라(유선)'는 각자의 이유로 관계의 뜨거움 속으로 뛰어들지 못하고 망설인다./사진=수컴퍼니

브룩스는 “한 사람이 개인적인 이야기를 남과 기꺼이 공유할 수 있으려면, 다른 사람이 이를 존중해 줄 것이라는 보장을 확인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할 때만 다른 사람이 자신의 내밀한 심리적 공간을 통과할 수 있게 해준다.

‘시작’하는 것, 그보다 더 용기가 필요한 일이 또 있을까? 고통과 상처가 어떤 것인지를 아는 사람들에게 ‘시작’은 그 자체로 좀처럼 넘어서기 어려운 장벽이다.

‘안전한 외로움’과 ‘두려운 따스함’ 사이를 저울질하는 로라와 대니의 어려움을 인식하는 관객들이, 어쩌면 ‘환상’에 불과할지 모를 미래를 예상하면서도 두 사람의 시작을 응원하게 되는 것은, 시작이 없이는 그 어떤 것에도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4월 26일 강릉아트센터대공연장 사임당홀.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상지대 겸임교수, 대림대 겸임교수, 한국외국어대 객원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공학대학교 지식융합학부(교양교육센터)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 《한국연극》 편집위원과 한국연극평론가협회 편집위원 및 이사, 세계문화예술경영연구소 초빙연구원, 외국문학연구소 초빙연구원을 역임했다.

주하영
주하영
jhy0219@hanmail.net
다른기사 보기

관련기사


  • 서울특별시 구로구 신도림로19길 124 801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737
  • 등록일 : 2009-01-08
  • 창간일 : 2007-02-20
  • 명칭 : (주)인터뷰365
  • 제호 :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명예발행인 : 안성기
  • 발행인·편집인 : 김두호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문희
  • 대표전화 : 02-6082-2221
  • 팩스 : 02-2637-2221
  • 인터뷰365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6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ess@interview365.com
엔디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