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수가 만난 人] 6.25참전언론인 박기병 회장 "역사에서 교훈 얻지 못하는 민족은 미래 없어"
[박현수가 만난 人] 6.25참전언론인 박기병 회장 "역사에서 교훈 얻지 못하는 민족은 미래 없어"
  • 박현수 편집위원
  • 승인 2024.0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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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365] 박기병 6.25참전언론인회 회장(전 대한언론인회 회장)

- 6.25 전쟁 영웅들의 참전 기록 ‘우리는 이렇게 나라를 지켰다’ 출간
- 춘천사범학교 재학 중 학도병으로 참전, 교복 입고 포탄 날라
- ‘6.25’ 최대 격전지 양구 백석산 전투 등서 공적 세워 화랑무공훈장 수훈
- 65년간 기자로 활동 ‘언론 외길’
- 춘천대첩·서울수복기념관 건립과 ‘제2의 6.25를 아십니까’ 출간이 꿈
박기병 6.25참전 언론인회 회장이 서울 중구 세종대로 프레스센터에 있는 6.25참전 언론인회 사무실에서 가진 ‘인터뷰365’와의 인터뷰에서 “춘천대첩기념관과 9.28 서울수복기념관 건립, 강원도 철원 상감령 전투 지역 관광자원화 사업과 ‘제2의 6.25를 아십니까’ 출간이 노병의 마지막 책무”라고 강조했다./사진=박현수

인터뷰365 박현수 편집위원(인터뷰어)= “이 책의 출간으로 6·25전쟁이 우리에게 남긴 진실된 교훈을 바로 일깨우는 동시에 해이해지기 쉬운 안보관을 공고히 다지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그런 차원에서 이 책이 일선 부대 진중문고에 비치돼 참전 언론인들이 이 나라를 어떻게 지켜냈는지, 선배들이 흘린 고귀한 ‘피와 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최근 6·25전쟁 참전 언론인들의 생생한 체험담을 담은 ‘우리는 이렇게 나라를 지켰다’를 출간한 박기병(93) 6.25참전언론인회 회장(전 대한언론인회 회장). 그는 14일 '인터뷰365'와 가진 인터뷰에서 “북한은 아직도 6.25의 침략적 만행을 뉘우치기는커녕 그동안 천안함 폭침, 연평도 도발, 판문점 연락사무소 폭파에 이어 수시로 핵무기와 미사일 등으로 한반도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박 회장은 “일부 국민들 중에서는 북한의 대남 흉계를 잘 모르고 그들의 대남 전략에 편승해 6.25 전쟁을 ‘북침’운운하며 젊은이들에게 잘못된 안보관을 심어주고 있다”며 개탄했다. “6.25전쟁은 누가 어떤 주장을 하든 명백한 북한의 남침이었고, 당시의 안보 상황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안겨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6.25 참전용사가 쓴 ‘우리는 이렇게 나라를 지켰다’...잊지 말아야 할 숨은 영웅들 

박 회장은 6.25 격전지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대한민국을 지킨 참전 언론인들의 수기를 모은 책을 지난 2013년 펴낸 바 있다. 그러나 정규군의 수기는 많이 알려졌지만 전쟁의 참혹한 실상과 승전고를 알린 종군기자들의 눈부신 활약에서부터 학도병(소년병), 호국 경찰, 철도원, 근로보국대(지게부대), 간호병에 이르기까지 정규군을 도와 목숨을 바친 수많은 숨은 영웅들의 실상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 책은 그 증보판으로 첫 출판 당시 수록하지 못한 참전 수기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숨은 영웅들을 찾아 그들의 거룩한 희생을 재조명함으로써 6.25 전쟁의 실상과 교훈을 더욱 심층적으로 분석, 평가해 진정한 ‘나라사랑 정신’이 무엇인지를 심도 있게 일깨워 주고 있다. 정운종 6.25참전언론인회 상임이사(전 경향신문 논설위원)와 공동으로 펴냈다. 한영섭 6.25종군기자동우회장을 비롯해 언론인 34명의 전쟁 체험담과 소년병, 철도원, 간호사 등 잊지 말아야 할 숨은 영웅들이 소개돼 있다.

비가 세차게 내리던 1950년 6월 25일, 당시 난 19세였다

1952년 참전 당시 강원도 화천 구만리 발전소에서 박기병 회장./사진=박기병 회장 제공

책에는 6.25 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19세로 춘천사범학교 3학년에 재학 중 학도병으로 참전한 박 회장의 체험담도 실려 눈에 띄었다. 그는 교복 차림으로 춘천에서 방어하고 있던 포병 16대대에서 포탄을 나르며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키는 데 일조했다.

“1950년 6월 25일은 비가 세차게 내리던 일요일이었어요. 교생실습 준비를 위해 학교에 갔는데 박노언 장교가 전쟁이 났다며 동료 학생들과 함께 남춘천역 앞에 있는 탄약고에서 포탄을 포진지까지 나르는 일을 시켜 포탄을 날랐습니다.”

이후 10월 8일께 유격대 소대장을 맡고 있는 양구 용하초등학교 동창 친구를 만나 그의 권유로 군번 없는 유격대에 입대했다. 퇴각하는 인민군을 격퇴하는 임무를 띠고 대전차포 1문을 가진 병력으로 양구지구 전투에 투입됐다.

박 회장은 “250명쯤 되는 유격대의 임무는 양구 해안면에 집결한 인민군 패잔병을 소탕하는 것이었다”면서 “그런데 어쩌다 보니 북한군 패잔병이 양구군을 포위하게 되면서 생사를 넘나드는 큰 위기에 빠지게 됐다”고 회상했다. 인민군의 포위로 며칠간 물만 마시며 버티는 바람에 아군 사상자가 늘어가는 상황에서 박 회장은 고향인 양구 지리에 밝아 극적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해 11월 2일 포병을 모집한다는 공고문을 보고 춘천사범학교 동기생 5명과 함께 12월 17일 포병 16대대에 현지 입대해 군번 0551137을 부여받았다.

이후 박 회장은 대대와 포대 간 통신망을 구축하는 통신병으로 배치돼 1950년 12월 24일 춘천으로 출동해 7사단을 지원했다. 춘천지구에서 일주일째 인민군과 대치상태에서 전투 중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이 개입하며 인해전술로 총공세를 취하는 바람에 경북 봉화까지 후퇴했다가 2월 영월 녹전리 전투, 3월 평창, 대화, 속사 전투, 4월 인제, 영통, 서화 전투와 인제 관대리 전투 등에 참가해 격전을 벌였다.

“포병은 보병의 지원 사격 요청이 있을 때 포신이 벌겋게 되도록 집중 지원 사격을 하기 때문에 포대 요원들은 청력을 잃는 경우가 많다”고 박 회장은 회고했다.

고향 양구서 운명처럼 다섯 번의 격전…박정희 장군과 인연도  

14일 서울 중구 세종대로 프레스센터 앞에 설치된 ‘6.25 전쟁 사진전’에서 박기병 6.25참전 언론인회 회장이 1951년 12월 11일 대구에서 열린 육군참모대학 개교식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 사진을 가리키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하마터면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과 육사 11기 동기생이 될 뻔했던 이야기도 눈길을 끌었다. 육군사관학교 11기 생도들을 각 부대별로 차출했는데 당시 대상자였으나 부대 작전 장교가 극구 만류하는 바람에 군인의 삶을 살지 않고 기자의 길을 걷게 된 사연도 소개했다.

또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인연도 흥미로웠다. 박 회장은 포병 증강방침에 따라 포병 창설 기간 요원으로 차출돼 전남 나주에서 제15 포병단 창설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1952년 3월 화천으로 2군단 포병사령부로 개편 배치돼 김화 어음산 전투에 투입됐다.

그 무렵 대구사범학교 출신의 박정희 준장이 포병사령관으로 부임하면서 같은 사범학교 출신인 박 회장을 각별히 챙겼다고 했다. 특히 그해 9월 육군 고급 부관학교에서 행정간부요원 교육을 받고 인사과 선임하사로 복무하며 박정희 사령관에게 매일 결제를 받으며 친분을 쌓아 종종 부대 인근에서 막걸리를 마시기도 했다고 한다.

휴전 후 1954년 8월 만기 제대를 앞두고 있었으나 박정희 장군이 “신설 부대의 기간요원이 빠져나가면 부대 운영에 지장이 있다”며 보류 조치를 해 전역이 좌절되기도 했으나 두 달 후인 10월 10일 장도영 2군단장과 박정희 장군의 축하와 격려를 받으며 3년 11개월의 군 생활을 일등 중사로 마쳤다. 그리고 6·25전쟁 최대 격전지로 꼽히는 양구지역의 백석산 전투 등에서 공적을 세워 화랑무공훈장을 수훈했다.

이후 65년간 기자로 활동하며 ‘언론 외길’을 걸어온 박 회장은 6·25전쟁에서 깨달은 교훈들을 후배 전우들에게 알리는 데 힘써 왔다. 강릉·춘천문화방송(MBC) 사장과 강원민방 사장으로 재직할 땐 육군 3군단 예하 부대 안보교육에 매진했다. 2010년에는 직접 창립한 ‘6·25참전언론인회’를 진두지휘하며 6·25전쟁사 발굴과 기록보존사업 등에 힘쓰고 있다.

6·25전쟁 첫 승전보 '춘천대첩' 이끈 김종호 장군을 아시나요

올해 93세인 박 회장은 마지막 간절한 꿈이 몇 가지 있다고 했다.

첫째는 ‘춘천대첩기념관’ 건립이다. 6·25전쟁 3대 대첩 가운데 하나인 춘천대첩은 전쟁 개전초기 춘천지역에서 국군 6사단을 중심으로 애국시민, 학생, 경찰이 하나가 되어 전차를 앞세워 기습 남침한 북한군 6600여 명을 사살하고 전차 18대를 완파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로 인해 개성과 연천 쪽으로 남하한 북한군이 양구, 춘천 방향에서 내려오는 북한군과 합류해 수원방면에서 국군 주력부대를 포위하려던 북한군의 계획이 무산됐다. 춘천 일대에서 북한군을 저지해 파죽지세의 북한군을 3일 동안 서울에 머물게 함으로써 남하를 지연시킨 것이다.

이에 따라 국군이 한강방어선을 구축하고 UN군의 파병시간 확보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는 시간을 벌어 풍전등화와 같은 존망의 위기에서 조국을 구했다. 훗날 북한 김일성이 6·25전쟁이 춘천전투 때문에 실패했다고 인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춘천전투는 중요한 전투였다.

박 회장은 “춘천대첩을 이끌었던 주역이 바로 백마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김종호 장군인데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아 안타깝다”면서 “6사단장이었던 김종호 장군은 6.25 당시 다른 부대와 달리 유일하게 군인들에게 휴가와 외출을 보내지 않아 북한군을 상대로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며 “춘천전투와 함께 역사적으로 재평가 돼야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춘천대첩기념관을 건립하면 안보교육뿐만 아니라 관광자원으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박기병 회장이 서울 중구 세종대로 프레스센터에 있는 6.25참전 언론인회 사무실 앞에서 참전 언론인들이 이 나라를 어떻게 지켜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사진=박현수

둘째는 강원도 철원군에 ‘상감령전투 지역 관광자원화 사업’ 이다. 전쟁이 교착 국면으로 전개되던 1951년 8월부터 중공군은 철원군 상감령에 땅굴과 참호를 파고 난공불락의 지하 요새를 구축했다. 중공군이 가장 위력을 발휘한 전투가 상감령 전투였다. 중국은 실제 상황 보다 부풀려 대승을 거뒀다고 주장하는 등 최대한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시진핑 주석체제에서도 ‘상감령’이라는 영화를 제작해 최고 승리한 전투라고 자랑하고 있다. 상감령 전투가 벌어졌던 오성산 일대에는 지금도 약 6만 명 병력이 숨을 수 있는 터널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북한에서도 선군정치를 강조하며 김정일이 집권 후 처음으로 방문한 곳이 이곳이었을 정도로 중국과 북한은 이곳을 안보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는 데 반해 정작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게 현실이다. 상감령 전투는 중국과 북한의 주장과 달리 우리 국군도 승리한 전투 중 하나다.

철원군 김화 동북방 최전방인 생창리 DMZ생태평화공원 십자탑 전망대와 근남면 마현리 승리전망대에 올라가면 오성산, 상감령, 저격능선이 또렷하게 보인다. 박 회장은 이 일대를 관광지로 개발하면 중국인 관광객이 몰려올 것으로 전망했다. “중국인들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한국을 방문하면 상감령 전적지를 꼭 가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셋째는 ‘9.28 서울수복기념관’ 건립이다. 1950년 6월 28일 북한군에 점령당한 수도 서울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그동안 열세에 있던 한국군과 유엔군의 전세가 역전되기에 이르렀고,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한 것을 역사적으로 기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 회장은 “현재 광화문에 중앙청 건물이 철거되면서 흔적이 하나도 없어졌으니 정부에서 관심을 가져달라”는 것이다

이밖에 박 회장은 ‘제2의 6.25를 아십니까’라는 제목으로 출간 작업을 하고 있다. 북한이 서부전선으로 간첩을 계속 침투시킨 사례들을 모아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기고 국민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자는 취지이다.

박 회장은 “군부대로 안보강연을 하다 보면 6.25 전쟁을 북침으로 잘못 알고 있는 병사들도 있어 깜짝 놀란다”며 걱정했다. “이런 정신을 가지고 있는 군인들이 휴전선에서 나라를 지킨다는 것을 생각하면 군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다”고 했다.

말로만 “잊지 않겠습니다”…참전군인 대부분 90대 고령, 처우 개선 시급

박 회장은 특히 6.25 참전군인들에 대한 처우 개선을 위해서도 힘쓰고 있다. 그는 “6.25에 참전한 생존자가 약 4만 5000여 명 정도인데 국방의 의무를 위해 군에 간 병장 월급이 125만 원인 데 반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킨 참전군인들의 수당은 32만 원 불과해 안타깝다”고 했다.

이어 “정부에서는 걸핏하면 참전용사들에게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말로만 하는데 뭘 잊지 않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지난해 국가보훈처에서 참전용사 전원에게 제복을 지급했는데 박 회장은 “참전용사 대부분이 나이 90이 넘어 병원에 있거나 활동을 제대로 못 하는데 제복을 입을 기회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제복보다는 차라리 처우 개선이 더 시급하다는 것이다. 또 정부에서 참전용사들에게 2028년까지 참전 수당을 50만 원까지 올려주겠다고 하는데 과연 그때까지 생존해서 인상된 수당을 받을 노병들이 얼마나 될지도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또 지방자치단체별로 주는 참전 수당이 천차만별이다. 그는 “강원도 화천의 경우 30만 원, 양구는 20만 원인 데 반해 서울시의 경우는 15만 원이라며 통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미군이 강한 것은 국가를 위해 전쟁에 참여하는 군인들에게 정부가 충분한 보상을 하기 때문”이라고 역설했다.

박 회장은 특히 “적의 위협에 맞서 국가를 지키려면 역사를 알아야 한다”며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강조했다.

■ 박기병 6.25참전언론인회 회장은

1932년 강원 양구군에서 태어났다. 1950년 춘천사범학교(현 춘천교대) 재학 중 6.25 전쟁이 발발하자 19세의 나이에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명지대 행정학과와 연세대 행정대학원을 졸업했고 서울대 신문대학원을 수료했다. 1957년 대한통신사 정치부 기자를 시작으로 언론계에 입문했다. 이어 국제신보와 부산일보로 옮겨 정치부 기자로 활동했다. 국제기자연맹(IFJ) 제14차 총회에 한국 대표로도 참석했다.

예나 지금이나 지역 기자 출신이 한국기자협회장을 맡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박 회장은 부산일보 기자로 있으면서 처음으로 제10대(1973년)와 17대(1978년) 두 차례나 한국기자협회 회장을 지낸 데 이어 방송사로 옮겨 강릉과 춘천MBC 사장을 역임했다. 특히 1998년 11월 강원민방(GTB)을 설립, 2001년 12월 15일 첫 전파를 쏘아 올려 지역 민방 기반 조성에 일익을 했다. 이후 구로케이블TV 사장 등을 지냈고, 현재 전자랜드 홍보그룹 상임고문도 맡고 있다.

공보처장관 표창(1995년), 국방부장관 표창(2009년), 국무총리표창(2021년)을 받았고, 제23회 대한언론상(특별공로부문), 춘천 교대 '모교를 빛낸 인물'상, 연세대 '동문을 빛낸 인물'상 등을 수상했다.

미수(米壽)를 맞아 2019년 기념문집 ‘격동의 수레바퀴 언론의 길 60년’을 펴냈다.

박현수 편집위원

서울신문을 거쳐 문화일보 편집국 인터넷뉴스팀장, 조사팀장, 인물팀장으로 35년간 활동. 한국조사기자협회 회장 역임. 정보관리학 박사(국민대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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