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수가 만난 人] '韓 IT산업 문익점' 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 "젊은이들, ‘컴퓨토피아’ 미래 개척해 주길"
[박현수가 만난 人] '韓 IT산업 문익점' 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 "젊은이들, ‘컴퓨토피아’ 미래 개척해 주길"
  • 박현수 편집위원
  • 승인 2024.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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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365] 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

- 컴퓨터산업계 거목…회고록 ‘반세기 컴퓨터와 함께 한 인생’ 펴내
- 컴퓨터 불모지인 한국에 처음으로 컴퓨터 도입하는 산파 역할
- 일본보다 7년이나 앞서 주민등록 전산화 사업 성공적으로 완료
- 600억 원 사재 기부 통한 SW인재 양성과 사회공헌 활동 계속
- ‘미래와 소프트웨어' 설립, 울산 '종하이노베이션센터' 재건립 눈앞
대한민국 정보통신 혁명의 기반을 다지는데 일생을 바친 우리나라 컴퓨터산업계의 거목 이주용 회장은 회고록을 펴내며 “척박한 시절 내가 공들여 개간한 땅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을을 이루고, 다시 새 땅을 찾아 나서는 모습을 바라볼 때면 땀으로 얼룩진 지난 세월이 헛되지 않았다는 만족감과 함께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사진=박현수 

인터뷰365 박현수 편집위원(인터뷰어) = “나의 반세기 컴퓨터 인생사가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젊은 후배들에게 마중물 역할을 계속 이어가길 바랍니다. 특히, 창조적인 젊은이들이 더 많이 컴퓨터 세계에 뛰어들어 ‘컴퓨토피아’의 밝은 미래를 개척해 나가 주길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이주용(90) KCC정보통신 회장이 최근 회고록 ‘반세기 컴퓨터와 함께 한 인생’을 펴냈다. 지난 2007년과 2012년에 이은 개정증보판이다. 이 회장은 “내 기억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황무지를 개척하듯 온갖 어려움을 헤쳐나가야 했던 지난 시절들에 대해 기록해 두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집필하게 됐다”며 출판 배경을 밝혔다.

이주용 회장은 오늘날 국내 정보통신 혁명의 기반을 다지는데 일생을 바친 우리나라 컴퓨터산업계의 거목이다. 이 책은 이 회장 개인의 회고록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 정보산업 역사를 담은 기록이기도 하다.

컴퓨터 외길인생의 시작 

1935년 울산에서 태어난 이 회장은 경기중·고를 졸업하고 1955년 서울대 2학년 재학 중 미국으로 유학, 미시간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60년 미국 IBM사에 한국인 최초로 프로그래머로 입사하면서 본격적인 컴퓨터 외길인생을 걸어왔다.

이후 IBM 코리아 대표를 거쳐 1967년 국내 첫 컴퓨터센터인 재단법인 한국전자계산소(현 KCC정보통신 전신) 소장을 맡으면서 컴퓨터 불모지인 한국에 처음으로 컴퓨터를 도입하는 산파 역할을 했다.

“1960년대 초반 IBM 한국 대표로 귀국했을 때, 우리나라 경제 사정은 말로 형용할 수조차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이 80달러에 불과한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으니까요, 국민 3,500만 명이 1년간 벌어들이는 국민총생산(GNP)이 30억 달러로 직원 10만 명에 불과한 IBM 일개 회사의 연간 매출액에도 미치지 못했으니, 어쩌면 그렇게 가난할 수가 있는지 나로서는 가슴 아프기 그지없었지요.”

이주용 회장은 ‘한국 IT산업의 문익점’으로 알려져 있다.

“갖은 어려움을 뚫고 이 땅에 목화씨를 들여와 섬유 혁명을 일으켰던 문익점 선생처럼 나 역시 정보혁명의 씨앗을 뿌리겠다는 결의를 다졌습니다. 나는 그저 대지에 떨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어요.”

한국을 IT강국 발판 만든 'IT산업의 문익점'

주판알 시대서 컴퓨터 시대로 이끌다

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과 부인 최기주 여사가 2021년 12월 10일 서울대 문화관에서 학교와 지역사회 문화발전을 위해 ‘이주용·최기주 문화관 리모델링기금’ 100억 원 기부금 전달식을 가졌다. 이날 행사에는 오세정 서울대 총장, 이홍구·이수성 전 국무총리를 비롯해 장남 이상현(KCC정보통신 부회장), 차남 이상훈((주)시스원 사장), 장녀 이상원, 사위 민선식(YBM 회장) 등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이 회장은 1967년 한국은행을 비롯한 금융업무 전산화와 기업 전산화를 일궈냈다. 특히 1976년에는 주민등록번호 보안체계를 개발해 주민등록 전산화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료했다. 이는 당시 모든 산업 분야에서 일본을 따라가고 있던 우리나라가 유일하게 일본보다 7년이나 앞서 이룩한 것으로, 국민에게 큰 자긍심을 안겨준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이러한 프로젝트들이 순탄하게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다. 어려움이 이만저만 많았던 게 아니었다. 특히 학계의 무지와 무관심은 예상 밖이어서 이 회장을 당황케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기업경영자들이나 행정가들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들은 대체로 변화를 원치 않았지요. 새로운 것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고, 혹시 그로 인해 불이익을 당하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동의해야 일을 추진할 수 있었던 데 비추어 그것은 심각한 난관이었어요.”

그런데 그 무엇보다 어려웠던 것은 컴퓨터를 주판의 대용품 정도로 생각하는 대다수 사람의 인식을 바로잡는 일이었다.

“컴퓨터가 인간의 정신을 보조하고 고양하는 기계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았지요.”

그런 가운데서도 컴퓨터에 대한 무지와 불신이 압도적인 가운데에서도 국가의 앞날을 내다보고 컴퓨터 보급에 발 벗고 나선 분들이 있었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워낙 심했던 당시로서는 컴퓨터를 이해해주는 말 한마디에도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스럽고 힘이 되었습니다. 내가 보수적일 거라고 지레짐작하고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금융계와 군 기관, 그리고 정부 기관의 몇몇 공무원들은 오히려 컴퓨터를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습니다“

이후 1980년 국민투표 개표 전산화 등 국책사업과 철도 승차권 온라인 전산화를 시작으로 KTX, SRT의 예약발매시스템과 인천공항철도 차세대 정보시스템을 구축했다. 또 1983년 이산가족찾기방송 전산화, 육해공군 전산화 등 우리나라 초기 대형 전산화 프로젝트들에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드물다. 이러한 공로로 지난 2016년 SW업계 처음으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2021년 12월 31일 문화일보는 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을 BTS, 윤여정, 일론 머스크와 함께 ‘2021년을 빛낸 화제의 인물 10인’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이 회장은 앞서 2020년에도 ‘화제의 인물 10인’에 선정됐었다.

이와 함께 재단법인 ‘미래와 소프트웨어' 설립, 울산 '종하이노베이션센터' 재건립, 서울대 문화관 리모델링 후원 등 SW인재 양성과 사재 기부를 통한 사회공헌 활동을 계속해오고 있다.

“컴퓨터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한 발전이 가능하리라 전망되는 분야입니다. 이 분야에서 앞서가는 사람이 미래 사회의 주역이 되리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국가 간의 경쟁에서도 그것은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고물'로 불리던 어린시절...평생을 검소하게 사신 아버지

"돈은 벌기는 쉬워도 그 돈을 쓰기는 어려운 것" 부친 말 늘 새겨

회고록에는 독자의 심금을 울리고, 훈훈한 감동을 주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이 회장이 어릴 때부터 친구들 사이에 별명이 ‘고물’로 불린 사연이다.

이 회장은 6.25전쟁을 전후한 혼란기에 부유한 아이들이 많이 다닌 경기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런데도 소년 이주용은 아버지의 유난함 때문에 학교 친구들에게 '고물'로 불리게 된 것이 못마땅하고 때로는 원망스럽기까지 했다고 회상했다.

이 회장이 고물이 된 이유는 중·고등학교 6년간 교복이나 신발, 하물며 가방까지 단 한 번도 새것을 써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모두 중고품 일색이었다. 당시 남대문 시장에는 중고품만을 취급하는 가게들이 있었는데, 부친 이종하 선생은 주로 이곳에 소년 이주용을 데리고 가서 물건을 사주셨다.

"아버지, 이 구두는 너무 큰데요."

"넌 금방금방 자란다. 조금 신다 보면 맞게 될 게다."

"이 바지는 긴 바지도 아니고 짧은 바지도 아니고 중간쯤에 걸려서 못 입겠습니다."

"그러면 조금 걷어 입어라. 좀 입다 보면 반바지로 입기 좋게 될 테니까."

매사가 이런 식이었다. 이주용이 중학교 2학년 때, 부친이 속에 털이 있는 미군 군용잠바를 하나 사주셨다. 잠바가 얼마나 컸는지 이주용이 대학에 가서도 입었고, 미국 유학 갈 때 가지고 가서 그곳에서도 쭉 입다가 귀국할 때 다시 가지고 들어왔다.

그런데 부친이 그 잠바를 보시더니 "야, 이 옷은 아직도 멀쩡하구나! 앞으로 한 대(代)는 더 내려 입을 수 있겠다"며 좋아하셨다.

그 후로 손님이 오면 잠바를 보여주시면서 "이 옷이 내가 우리 아들놈 중학교 2학년 때 사준 옷인데, 그때부터 입어서 결국은 미국까지 가지고 가서 입다가 다시 가지고 온 옷이라오" 하면서 자랑하셨다.

심지어 헌 양말까지 꺼내놓고 "우리 아들놈이 미국에서 돌아왔는데 짐을 꺼내 보니 신통하게 짝짝이 양말, 해진 양말, 헌 양말까지 하나도 버리지 않고 가지고 돌아왔어요" 하면서 대견해하셨다.

그러면서 이종하 선생은 "돈을 벌기는 쉬워도 그 돈을 쓰기는 어려운 것"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시곤 했다. 그 말을 이주용 회장은 “일곱 살 때쯤부터 듣기 시작했는데, 거꾸로 이야기한다면 모를까 그 말 그대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친아버지가 외사촌 형이 된 이주용 회장 영화 같은 가족史

강정택의 ‘농지개혁’ 자유 대한민국 건설하는데 결정적 역할

한편 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의 가족사는 한편의 영화 같다. 이종하 선생의 친아들로 알려져 있는 이주용 회장은 사실은 친아들이 아니다. 이 회장의 친아버지는 대한민국 건국 초기인 1948년 농림부 차관으로 이승만 정부에서 ‘농지개혁’을 주도한 강정택(1907~미상)선생이다.

강정택은 8.15 광복 후 경성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다 조봉암 농림부 장관에게 발탁돼 농지개혁을 진두지휘했다. 당시 불가능에 가까웠던 농지개혁을 6.25전쟁 발발 직전에 성사시켜 오늘날 자유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강정택의 농지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은 뭘까. 우선 철저한 준비다. 동경제국대학 농업경제학 교수 시절부터 조선의 땅을 직접 조사하고 연구했다. 농가의 실정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농부도, 지주도 수용하는 가장 합리적인 농지개혁안을 만들 수 있었다.

특히 강정택의 농지개혁의 역사적인 의미는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막았다는 데 있다. 만약 실패했었더라면 우리나라는 지금쯤 공산화가 됐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농지개혁으로 농민이 농지를 소유하게 되면서 공산당에 맞서 자신의 농지를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했다는 것이다. 농부들이 농지를 소유하지 못했더라면 토지국유화를 주장했던 공산당의 책략에 쉽게 넘어갈 수 있었다. 이것이 강정택의 빛나는 업적이다.

그러나 강정택은 6.25때 인민군에 의해 납북당해 지금까지 그의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대한민국 최고의 천재이자 농정 전문가로 불린 강정택은 1907년 11월 1일 울산 신정동에서 울산 병영의 진위대장이었던 강영수와 천석꾼 아전 집안의 딸 이유송 사이에서 1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제에 의해 조선군이 해산된 이후 군인이었던 부친이 실직하면서 가세가 기울어 어렵게 생활했다. 울산초등학교를 졸업한 강정택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구멍가게 점원생활을 했다. 그러다 울산을 대표하는 자산가 중 한 명이었던 외삼촌 이종하 선생의 경제적 도움으로 점원생활을 청산하고 1923년 대구 경북고보(현 경북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진학했다.

이후 학업 성적이 우수해 일본의 수재들이 모이는 동경제일고등학교에 유학했다. 1930년 동경제국대학교 농과대학에 입학해 일본 농업경제학의 태두로 불린 오가와 카즈시와 동기로 친하게 지냈다. 오가와 카즈시는 한 번도 강정택의 1등 자리를 빼앗아보지 못했다고 훗날 실토했을 정도로 강정택은 일본에서도 대단한 천재였다. 당시 일본 현대 경제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는 강정택에게 장학금을 주는 등 든든한 후원자였다.

강정택은 학업에 도움을 준 이종하 선생에게 보답하기 위해 아들을 낳자마자 자녀가 없었던 이종하 선생의 양자로 입적시켜주었다. 양자로 보낸 아들이 바로 이주용 회장이다. 이러다 보니 이 회장은 성이 달라졌을 뿐 아니라 아버지와 외사촌 관계가 됐다.

1938년 주용과 동생 경옥이 도쿄를 방문했을 때 찍은 강정택·이간원 부부의 유일한 가족사진./사진=‘강정택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논문집 식민지 조선의 농촌사회와 농업경제’에서 발췌.

이 회장의 친어머니 이간원 여사는 남편이 아들을 양자로 보내고 매우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이주용 회장의 장남인 이상현 KCC정보통신 부회장은 “30세 가까워 얻은 첫아들이어서 사랑이 남달랐을 것”이라며 “할머니는 돈으로 경제적 도움을 받았으면 돈으로 갚으면 되지 왜 자식을 주느냐며 아들을 양자로 보낸 뒤 평생을 마음 아파하셨다“고 말했다.

이 여사는 일본으로 유학해 도쿄여의대를 장학생으로 졸업할 정도로 수재였다. 이 여사는 일본 유학 당시 “의과대학을 성공적으로 졸업하지 못하면 숙소 가까이에 있는 스미다강에 빠져 죽겠다”는 말을 주변에 자주하면서 악착같이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워낙 공부벌레인지라 교우 관계가 넓지는 않았지만, 시인 모윤숙, 무용가 최승희와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이 여사는 목표대로 도쿄여의대를 졸업한 이후 결혼해 울산 성남동에서 병원을 운영했는데 산부인과와 이비인후과 진료를 잘했다. 당시 울산의 지체 높은 양반 딸들은 대부분 이 여사가 운영한 병원에서 출산했다고 한다.

강정택은 농림부 차관에서 물러난 뒤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6·25 때 납북됐다. 강정택에게는 여동생이 두 명 있었다. 강금복과 강소복 여사이다. 금복 여사는 이수성 전 국무총리의 어머니이다. 이 회장과 이 전 총리는 고종사촌 관계인 셈이다. 

박현수 편집위원

서울신문을 거쳐 문화일보 편집국 인터넷뉴스팀장, 조사팀장, 인물팀장으로 35년간 활동. 한국조사기자협회 회장 역임. 정보관리학 박사(국민대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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