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너 맥퍼슨 각색&이언 릭슨 연출, NTOK Live+(엔톡 라이브 플러스) 시리즈
인터뷰365 주하영 칼럼니스트 = 프랑스 소설가이자 철학자인 파스칼 브뤼크네르는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에서 30세까지 인간은 영원히 늙지 않고 살 것처럼 느끼지만 30대 이후부터 10년 단위로 “지나간 시대의 사람이 되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그는 과학의 발전은 수명을 연장한 것이 아니라 ‘노년’을 연장했다고 할 수 있으며, 현대인은 정체성이 유동적인 시대에 “인생을 여러 번 살아야 할 필요”에 놓이게 되었음을 강조한다.
노년이 “인류 대다수의 미래”가 되어버린 현재에 인생은 더 이상 “직선으로 날아가는 화살이 아니라 구불구불 돌아가는 길”임을 주장하는 브뤼크네르는 미래의 불확실성은 여전히 비극적이지만 실패와 방황이 찾아오더라도 삶은 다시 걸어가야만 하는 “아주 길고 머나먼 여정”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생에 행복한 결말이나 비극적인 종말은 없으며,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끝없이 지속되는 일상이 있을 뿐임을 드러낸 작가 중 러시아의 극작가 ‘안톤 체홉’을 떠올리지 않을 수 있을까?
2020년 1월, 런던 웨스트엔드에 위치한 해럴드 핀터 극장에서 초연된 연극 ‘엉클 바냐’는 별 다섯 개의 평점과 열광적인 리뷰로 큰 화제를 모았다. 하지만 3월, 팬데믹으로 인한 봉쇄 조치가 시작되면서 공연이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올리비에 어워드 최우수 희곡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작가 코너 맥퍼슨의 각색이라는 점에서 처음부터 관심을 모았던 ‘엉클 바냐’는 토비 존스, 리차드 아미티지와 같은 명배우들의 연기에 힘입어 캐릭터를 잘 부각시켰을 뿐 아니라 현재와 관련성이 있는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제작사인 소니아 프리드먼 프로덕션은 갑자기 중단된 공연을 재개할 수 없는 상황이 지속되자 공연을 영상화할 방법을 간구하기 시작했다.
소니아 프리드먼은 ‘왓츠 온 스테이지’와의 인터뷰에서 원래 ‘엉클 바냐’는 NT Live로 송출할 계획이었지만 상황이 불가능해졌고, 무대 세트는 극장에 그대로 보존된 상태였기 때문에 연극의 라이브성을 강조하면서도 영화나 텔레비전의 밀접한 속성을 부각시킬 수 있는 “하이브리드 영상”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프리드먼은 영상화 결정이 이루어진 후 배우들이 극장에 다시 모여 무대에 서기까지 오직 2주의 시간이 주어졌음을 언급하면서, 엄청난 속도로 영상제작이 이루어졌음을 강조했다. 연극을 관람할 때의 라이브성과 현장감을 보존하기 위해 원테이크 촬영을 주로 하고, NT Live로는 할 수 없는 ‘핸드 카메라(handheld camera)’를 사용해 친밀감을 높였다고 설명하는 프리드먼은 결과에 상당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2020년 10월 영화관 상영을 시작으로 12월, BBC를 통해 영국에 송출된 뒤 2021년 5월 미국 PBS를 통해 송출된 ‘엉클 바냐’는 ‘브로드웨이 월드’로부터 “무대와 영화가 완벽하게 결합한 환상적인 관람 경험을 선사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엉클 바냐’는 2020년 3월 16일부터 시작된 몇 달 간의 격리와 봉쇄조치 후 극장으로 되돌아온 배우들이 마스크를 쓰고 출근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무대를 준비하는 제작진과 의상을 점검하는 배우들의 모습 위로 피아노와 첼로의 선율이 흐르고, 하얀 천으로 뒤덮인 가구들의 모습이 드러난다.
오래된 낡은 안락의자의 모습은 체홉의 원작이 초연된 1899년 이후 120년이 지난 세월의 흐름을 상징하는 듯 하고, 텅 빈 저택의 어두운 응접실은 암울한 현재 세상의 위기를 반영한 듯 외롭고 쓸쓸하다.
나이든 유모 나나는 가구 위에 씌워진 하얀 천들을 벗겨내 서랍장 안에 넣는다. 정원으로 통하는 커다란 통유리 사이로 햇빛이 비추는 가운데 의사인 아스트로프가 천천히 응접실로 걸어 들어온다.
새소리가 들리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오후, 나나는 안락의자에 앉아 뜨개질을 시작한다. 주변을 서성거리던 아스트로프는 나나에게 자신이 많이 변했는지를 묻는다.
알고 지낸 세월이 17년쯤 된 것 같다고 말하는 나나는 젊고 활기가 넘쳤던 그가 이제는 술을 많이 마시는 나이 든 의사 선생님이 되었다고 답한다.
아스트로프는 의사라는 직업이 자신을 얼마나 지치게 만드는지, 얼마나 불안정한 상태로 살아가도록 만드는지에 대해 토로한다. 마비된 듯 삶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다는 아스트로프는 사순절에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발진티푸스로 인해 지저분한 곳에 방치된 환자들을 돌보며 잠시도 쉬지 못하고 하루 종일 진료를 하다 돌아온 날 밤 다리 한쪽이 완전히 뭉개진 한 견습생이 실려 온다.
테이블 위에 소년을 눕히고 마취를 한 순간 소년은 숨을 거두고 만다. 아스트로프는 무언가를 할 새도 없이 죽어버린 소년을 바라보며 무력하게 선 채로 마비되었던 모든 감정들이 한꺼번에 되돌아오는 것을 느낀다.
생명을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충격, 좌절과 피로는 모든 일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공허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도록 만든다. 아스트로프는 나나에게 토로한다.
“100년 혹은 200년이 지난 뒤 이게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우리는 모두 사라지고 아무 의미가 없을 텐데요. 사람들은 우리를 기억조차 하지 못할 거예요. 과연 우리에게 좋은 말을 해주기나 할까요?”
나나가 대답한다.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하느님은 기억하시겠죠.”
그 때 뒤쪽 의자에서 선글라스를 쓴 채 잠들어 있던 바냐가 헝클어진 옷차림으로 갑자기 일어나 묻는다.
“우리가 무슨 얘기 중이었지?”
맥퍼슨의 각색은 대부분의 평론가들로부터 체홉의 원작이 담고 있는 나이듦과 목적 없음, 시골 삶에 갇힌 지식인의 답답함과 자연 훼손으로 인한 기후 변화와 같은 주제들을 잘 반영하면서도 희극적 측면을 상당히 부각시킨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맥퍼슨은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는 부분들을 없애고, 현대 영어를 사용한 유머를 강조하면서 매우 실질적으로 느껴지는 인물들을 구현한다. 무능함과 무력함, 무관심과 단절, 패배감과 취약함, 지루함과 우울함의 느낌을 제공하면서도 ‘웃음’ 또한 낳도록 만드는 맥퍼슨의 각색은 암울함 속에서도 “희망은 남아있고 구원은 가능하다”는 체홉의 희극적 감각이 살아있는 ‘엉클 바냐’를 완성한다.
바냐 역을 맡은 배우 토비 존스는 ‘파이낸셜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엉클 바냐’의 현재성에 깜짝 놀랐음을 강조하면서, “삶 속에 찾아온 갑작스러운 변화로 인해 좌초되고 무너진 채 방향을 잃고 무력해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 새롭게 다가온다”고 말했다.
그는 툴툴거리고 비아냥거리며 불만의 감정을 폭발적으로 드러내면서도 사랑을 갈구하고 웃음을 선사하는 매우 슬프고 우울한 중년의 위기에 처한 인물 ‘바냐’를 그려낸다. 존스는 슬픔과 분노, 웃음과 절망이 섞인 것이 인간의 삶이고, 그것이 바로 ‘희극적인 측면’이라고 설명한다.
이언 릭슨 연출은 “러시아 극작가들 가운데 가장 영국적인 작가”라고 불리는 체홉의 무대를 러시아가 아닌 현대 영국의 시골로 가져온다.
무대는 저녁 식사 테이블이 놓여 있는 대저택의 응접실을 고정적으로 비추며 막이 바뀜에 따라 서재로 설정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큰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극이 끝날 무렵 바냐와 소냐가 테이블을 무대 앞쪽으로 옮겨놓고 영지와 관련된 서류들을 점검하며 밀린 일들을 처리하기 시작할 때 망가졌던 일상은 회복되고, 비로소 질서와 안정을 향해 멈췄던 발걸음이 시작된다.
릭슨은 ‘더 스테이지’와의 인터뷰에서 ‘엉클 바냐’는 “정말로 심오한 작품”이며, “유예와 정체에 놓여 있는 공동체에 관한 것”을 다룬다는 점에서 팬데믹 상태에 놓여 있는 현재를 반영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또, “예측할 수 없는 불안정성과 엔트로피 법칙”에 대해 말할 뿐 아니라 경제와 진보, 환경과 상속과 같은 현재 세상이 품고 있는 것들에 대한 논의를 제기한다는 데에서 고전작품으로 여겨지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바냐의 죽은 여동생의 남편인 세레브랴코프가 교수직에서 물러난 후 27세의 젊고 아름다운 새 아내 옐레나와 함께 시골 영지를 방문한다. 도시의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어 시골로 온 세레브랴코프 부부는 조용하고 규칙적인 일상을 유지해 온 가족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딸 소냐와 유모 나나, 대부 텔레긴, 외삼촌 바냐, 그리고 의사 아스트로프의 삶에 불안정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밤새 글을 쓰고, 정오가 될 때까지 일어나지 않으며, 저녁 6시에 점심을 먹고, 새벽 3시에 차를 마시는 교수의 일상은 대저택의 일상에 무질서와 혼란을 가져온다.
나나는 2시간 전에 차를 준비해달라고 한 교수가 아직도 “짧은 산책”에서 돌아오지 않았음을 불평하고, 바냐는 규칙적인 식사를 놓치고 간식으로 배를 채우며, 술에 취해서 대낮까지 잠을 자는 엉망이 된 일상에 대해 불만을 드러낸다.
그는 무언가에 몰두해 지칠 때까지 몸을 움직일 필요가 있음을 인식하지만 조카인 소냐에게 모든 것을 맡겨놓은 채 책임을 외면하고 스스로를 방치하고 있다. 바지에 묻은 소스를 닦아내며 열심히 문지르던 바냐는 세레브랴코프의 말투를 따라하며 계속 비아냥거린다.
바냐는 30년 동안 연구를 했음에도 세상에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고 누구도 읽지 않는 글을 쓰는 세레브랴코프가 40살이나 어린 옐레나를 아내로 맞이한 데 대한 질투를 감추지 못한다.
그는 10년 전 자신이 옐레나에게 청혼을 했더라면 지금쯤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에 좌절과 실망, 회한을 느낀다. 또, 여동생의 지참금을 위해 자신의 상속분을 포기했을 뿐 아니라 세레브랴코프를 위해 지난 25년간 영지를 관리하며 젊음과 에너지를 모두 바쳤다는 데 엄청난 분노를 느낀다.
바냐의 후회와 시기는 통풍으로 고통을 호소하며 매일 밤 죽음에 대한 공포를 토로하는 늙은 남편 옆에서 젊음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옐레나를 향한 열렬한 사랑의 고백으로 표출된다. 하지만 옐레나는 고의적으로 자신을 자극하는 바냐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예전에 당신은 훨씬 멋진 사람이었어요! 이렇게 술을 마시지도 않았고 슬픈 상태로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사람들을 지치게 하지도 않았어요!”
홀로 남겨진 바냐는 카메라를 응시하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녀의 남편이 도시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황소처럼 일했어. 그의 지위를 자랑스럽게 생각했지. 하지만 그의 이름은 한 푼의 가치도 없는 것이 되어버렸어! ... 그는 아무 것도 아니야! 그저 비누 거품일 뿐! 나는 내 삶을 도난당했어! 근데 웃긴 게 뭔지 알아? 나는 항상 내가 그보다 더 똑똑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는 거야.”
맥퍼슨은 삶의 지루함보다는 정체성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좌절과 방황에 초점을 맞춘다. 인물들은 모두 자아를 상실한 채 자신이 속한 곳을 찾아 헤매며 권태와 무기력에 휘둘린다.
세레브랴코프는 이미 자신이 “과거에 속한 사람”이 되어버렸음에도 여전히 성공을 갈망하고 죽음에 쫓기고 있음에 괴로워한다. 옐레나는 명성과 지성을 향한 동경과 사랑으로 결혼에 이르렀지만 사실은 안정을 향한 용기 없는 선택이었다는 깨달음과 후회로 인해 힘들어한다.
아스트로프는 숲을 파괴하는 사람들을 보며 괴로움을 느끼고 나무를 심는 건설적인 일을 통해 창조와 회복을 꿈꾸지만 술을 마시면서 자신의 삶을 파괴하고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끔찍해한다.
소냐는 아스트로프를 향한 짝사랑과 자신의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로 인해 번민에 빠져있으며, 텔레긴은 자신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옐레나의 무관심으로 인해 자존감에 상처를 입는다.
여성참정권에 관심을 가진 마리야는 아들 바냐가 좀 더 적극적인 삶을 개척하지 않은 것에 대한 실망감과 답답함을 간직하고 있다. 그녀는 만약 바냐가 가진 권리와 교육, 사회적 지위가 자신에게 주어졌더라면 전혀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들이 세레브랴코프를 향해 보이는 질투와 힐난에 동조하지 않는다.
인물들은 각자 다른 사람이 삶을 낭비하고 방치하는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들은 자신의 무능함을 혐오하고, 답답한 분노를 느끼며, 스트레스와 억압, 권태와 절망, 패배 속에 갇혀 있다. 그들은 삶을 지탱할 에너지를 내면이 아닌 외부의 무언가에서 찾고자 애쓴다.
세레브랴코프는 경제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영지를 팔아 유가 증권과 채권으로 투자하는 계획을 세우지만 이는 25년의 시간을 아무 것도 손에 쥐지 못한 채 농장을 관리해 온 바냐가 이성을 잃고 권총을 쏘도록 만든다.
하지만 소동은 해프닝으로 끝나고, 세레브랴코프 부부는 결국 영지를 떠나 도시에 머물기로 결정한다. 삶은 바냐의 수치심과 옐레나와 아스트로프의 일탈, 소냐의 실연의 상처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일상을 회복하기 시작한다.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간은 다시 흐르고 인물들은 내면에 고통과 슬픔, 좌절과 아픔을 감춘 채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간다. 아스트로프는 옐레나의 주변을 맴도느라 여름 내내 돌보지 않았던 숲을 향해 떠나고, 소냐와 바냐는 계속 미뤄두었던 송장과 회계장부를 정리하기 시작한다. 나나는 규칙적인 식사와 제대로 된 일과를 회복할 수 있음에 안도를 느낀다.
촛불 앞에서 영수증을 정리하던 바냐는 갑자기 밀려드는 감정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말을 잇지 못한다. 소냐가 삼촌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한다.
“우리가 뭘 어떻게 하겠어요? 우리에게는 살아가야 할 날들이 있어요. 이 모든 것을 견뎌야 해요. ... 그리고 결국 죽음을 받아들이겠죠. 나중에 우리는 말할 거예요. 고통으로 울던 시간들이 있었고,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고 느꼈던 순간들이 있었다고 말이죠. ... 우리는 불행한 순간들을 되돌아볼 거예요. 그리고 동정과 연민 외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겠죠. 우리는 미소를 지으며 안식을 얻게 될 거예요. 난 그렇게 믿어요!”
브뤼크네르는 “삶의 길의 끝에 모든 짐을 내려놓고 쉴 수 있는 약속의 땅이 있다고 믿는 이들에게 늙는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위로”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남은 날들을 어떻게 견뎌나가야 할지 몰라 두려움을 느끼는 바냐에게 소냐는 위로와 희망의 말을 건넨다. 브뤼크네르는 “삶은 늘 영원한 도입부요, 점진적인 전개 따위는 없다”고 말한다. 시간은 언제나 현재로 되돌아오고 반복되며 되풀이되는 속에서 우리를 “고정 거주지가 없는 노숙자들”로 만들기 때문이다.
소냐는 산다는 것은 멈춰 설 수 없는 것이며, 언젠가는 행복한 순간이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앞으로 힘겨운 발걸음을 내딛어야만 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체홉이 전달하고자 했던 치유와 해방, 안도의 메시지는 소냐의 대사를 통해 유보된 삶에 지쳐있는 관객들을 향해 울려 펴진다. 삶은 다시 시작되고 우리에게는 연민과 눈물, 그리고 씁쓸한 웃음만이 희미하게 남겨진다.
-
주하영
앨리스(Alice 한국명 주하영)박사는 영문학자로 주목받을만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관람하고 리뷰를 써온 프리랜서 공연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상지대 겸임교수, 대림대 겸임교수, 한국외국어대 객원교수를 거쳐 현재 한국공학대학교 지식융합학부(교양교육센터)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월간 《한국연극》 편집위원과 한국연극평론가협회 편집위원 및 이사, 세계문화예술경영연구소 초빙연구원, 외국문학연구소 초빙연구원을 역임했다.
- Copyrights © 인터뷰365 - 대한민국 인터넷대상 최우수상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